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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스부르크 왕가와 고려왕조의 근친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21. 19:48

     

    올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특별전은 꽤 인기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명가(名家)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집한 루벤스,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등의 화가들이 그린 명화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화려한 궁중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래의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주목을 받았다.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이 그림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 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림으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과거 미술 교과서에 실린 '궁중의 시녀들'(Las Meninas)이라는 작품 속에 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위 그림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展)의 타이틀로도 소개되었다. 오늘 얘기하려는 것도 이 어린 공주가 주제로서, 결론은 근친혼으로써 결국은 멸문(滅門)에 이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을 말하고자 함이다.
     
     

    1656년 벨라스케스가 그린 '궁중의 시녀들'

     
    1656년 그려진 이 그림 속 소녀의 아버지는 스페인 국왕 필리페 4세이고 어머니는 필리페 4세 조카였던 마리아나였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역시 당대의 흔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테레사는 성장을 해 166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게 되는데 테레사의 외삼촌인 사람이었다. 공통된 관심사가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고 테레사는 거의 매년 임신을 해 결혼 6년 동안 4명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아이는 아래 그림 속의 안토니아 1명만 남고 모두 영·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테레사 자신도 21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는데, 임신했던 다섯 번째 아이를 유산한 직후였다. 아래 그림은 죽기 얼마 전 그려진 작품으로, 그림 속에서는 이미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 어두운 그림자는 남편인 레오폴트 1세를 그린 그림 속에도 출현한다.

     
     

    디른 궁중화가 마솔(추정)이 그린 테레사와 딸 안토니아
    1672년 벤야민 폰 블로크가 그린 레오폴트 1세

     

    성인이 된 테레사와 남편인 레오폴트 1세에게서는 뭔가 공통점이 느껴진다. 바로 주걱턱이다. 이 주걱턱은 근친혼에서 비롯된 유전병으로 테레사의 아버지인 필리페 4세도 마찬가지로 주걱턱이었다. 이 주걱턱은 합스부르크의 유전병이자 천형(天刑)으로서, 필리페 4세는 길어진 주걱턱 길이와는 반대로 무너진 치조골과 약해진 하악골로 인해 죽과 같은 연한 음식만을 먹어야 했고 보기 싫게 늘 침을 흘려야 했다. 침을 흘리는 것이야 그러다 해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던 바, 그는 몸이 점점 쇠약해져 40세에 죽고 말았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스페인 국왕 필리페 4세

     

    우리 인류는 옛날옛적부터 같은 종족끼리 오랫동안 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써 근친혼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고대에도 근친혼을 피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족외혼을 해왔던 것인데, 이것이 귀족이나 왕족에게서는 통용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유는 끼리끼리 수준을 맞추어 결혼하는 까닭도 있었지만 귀족끼리의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지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또 반대로 결혼을 통해 전쟁을 피하려고도 하였다. 
     
    그것이 1~2대라면 모르겠거니와 근친혼이 지속되면 반드시 위험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위에서 말한 합스부르크 왕가로서, 그들의 근친혼은 결국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등장했으며 영아 사망률까지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국 필리페 4세의 아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러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그는 1661년 스페인 왕 필리페 4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비 마리아나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필리페 4세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기에 카를로스 2세 출생은 스페인 왕조의 거대한 기쁨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별명이 바보왕(El hechizado)일 만큼 현저하게 모자랐고 병약했다. 그래도 장수했으면 유럽은 평화스러웠을 것을, 자식마저 생산하지 못하고 일찍 죽음으로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2세기만에 단절되고 말았고, 공석이 된 왕위의 계승을 두고 제0차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에 앞서는)이라고도 불리는 14년간(1701~1714년)의 대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가장 턱이 길어 보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

     

    시간을 잠시 앞으로 되돌리자면, 제대로 먹지 못했던 카를로스 2세 역시 시름시름 앓더니 1700년 초 결국 병상에 누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가까웠다'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병약했으므로 그의 병고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유럽 국가의 시선이 온통 스페인에 쏠렸으니 그에게 후사가 없던 까닭이었다. 카를로스 2세가 죽게 되면 그와 혈연이 있는 나라 중의 하나가 스페인을 합병하게 될 터인데, 그의 혈연은 현재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아내인 누나와, 현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아내인 여동생이 있었다. (이 여동생이 위에서 말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이다)  
     

    '나무위키'에서 빌려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 / 맨 아래가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왕조를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을 것인지가 유럽대륙 전역의 초미의 관미사로 떠오른 가운데 스페인을 향한 시선이 지속되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스페인을 눈독 들임은 당연한 노릇이었고, 다른 나라들 역시 그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떤 나라가 됐든 새로운 거대 제국이 탄생하게 될 터, 이제 유럽의 세력 판도는 새롭게 짜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은근히 신성로마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그 이름뿐 사실상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로이센 등으로 사분오열된, 지는 해의 나라였다. 반면 프랑스는 여전한 강국이었고 두 나라는 국경 또한 연접돼 있었다. 게다가 국왕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전제군주였고 호전적이기도 했던 바, 그 두나라가 합쳐 이룩하게 될 새로운 라틴 제국인즉 다른 나라에는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다. 특히 루이 14세의 칩입으로 크게 홍역을 치른 네덜란드는 그 향배에 더욱 민감했다. 
     
    1700년 11월 1일 바보왕 카를로스 2세가 온 유럽의 관심 속에 향년 38세로 죽었다. 그리고 결론은 프랑스로 결정났다. 카를로스가 죽으면서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계승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환호작약했으나 다른 국가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새롭게 만들어질 아래와 같은 거대 제국인즉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다. 
     
     

    만일 그 두나라 합쳐진다면 이런 거대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게다가 두 나라가 가진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 시너지가 더욱 배가될 것이었다. 이제 곧 그 거대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될 네덜란드와, 세상의 새로운 패권을 꿈꾸는 영국은 그 두 나라의 합병에 가장 크게 반발한 국가였다. 이에 곧 영국과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끌어들인 반(反) 프랑스 동맹을 형성하였고, 1701년 마침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던 바,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라는 14년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가다 보니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 이쯤에서 끊고 다시 본론인 근친혼으로 옮겨오도록 하겠다. 이번에는 고려의 근친혼이다. 태조 왕건 이후의 고려왕조는 앞선 나라 신라의 근친혼은 물론이요, 위에서 말한 합스부르크 왕가 저리가라 할 정도여서 말하기조차 민망한 구석이 있다. 신라 말의 호족 세력들을 누르고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킨 고려 왕씨 왕조는 다른 혈족들과 혼인할 경우 외척과 같은 새로운 호족 세력들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같은 왕씨 왕족들끼리만 결혼을 했던 바, 근친혼을 피할 수 없었는데, 대강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아다시피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 출신의 왕비 29명과 혼인했고 많은 아들 딸을 낳았는데, 이들 사이에서 마구 상간이 이루어지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 초기 왕들이 된다. 
     
    장남인 왕무는 왕건을 계승해 왕위에 올라 2대 혜종이 되었으나, 왕건이 유언으로 보좌를 부탁한 왕규라는 자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혜종을 시해한다. 그러나 반란은 왕건의 또 다른 아들이자 왕무의 배 다른 형제인 왕요와 왕소에게 진압당하고, 이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라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 된다. 여기서 혜종의 부인은 왕소의 누이인 경화군부인 임씨이다. 따라서 혜종과 왕소(광종)는 이복형제임과 동시에 장인-사위관계가 된다. 
     
    광종의 아들 5대 경종은 부모가 이복남매이며, 본인도 또 사촌이랑 결혼했는데 부인도 조부와 외조부가 왕건이다. 따라서 6대 목종은 증조 할아버지와 증조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건의 핏줄인 아주 순수한(?) 100% 순도의 후손이다. 경종은 부인을 5명 두었는데 그 또한 모두 사촌 간으로 다른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100% 근친혼 관계를 형성했다. 이중 셋째 왕비 헌애왕후와 넷째 왕비 헌정왕후는 친자매간이다. 
     
    경종의 아들은 훗날 7대왕 목종이 되는 왕송이나 경종이 죽을 때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으므로 왕건 손자 중의 한 명이자 경종의 사촌인 왕치가 6대 왕이 되었다. 이 자가 초기에 큰 업적을 쌓은 성종이다. (성종의 누나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임을 잠깐 상기하자)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목종은 말한 대로 친가와 외가가 모두 한 사람(왕건)의 핏줄에서 파생된, 외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성종의 누이 헌정왕후는 제 삼촌인 안종욱과 간통을 해 아이를 낳는 별개의 근친상간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왕순이라는 남자아이가 생긴다. 그리고 헌애왕후에게도 변화가 있었으니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의 아들 왕송(목종)이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당시 왕송은 17살로 여전히 어렸으므로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천추전에서 섭정을 하게 되는데, 이 여자가 바로 유명한 천추태후이다. 또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터진다. 모후(母后) 천추태후가 섭정기간 김치양이라는 젊은 사내와 사통을 벌여 김현이라는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자식의 이름을 외가 성을 빌려 왕현으로 바꾸고 목종에 이어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공교롭게도 목종은 동성애자로서 후사가 없었다. 이에 왕현이 왕이 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행인지 불행인지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겸 중대사(中臺使)인 강조라는 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목종, 김치양, 천추태후를 몰아내고 천추태후에 쫓겨 숨어 지내던 헌정왕후의 아들  왕순을 데려다  왕위에 올린다. 이 자가 바로 8대왕 현종이다. (따라서 5대왕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도 되고 이모부도 된다)
     

    역시 복잡한 고려 왕씨 왕조
    왕순이 천추태후를 피해 숨어 있었다는 북한산 진관사

     
    이상 매우 복잡한 고려 초기의 근친혼은 정리하기조차 어려우나, 왕실 내에 지독한 근친상간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개족보다. 아무튼 이렇게 왕이 된 자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으로,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탤런트 김동준이 그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다. 엊그제 보니 강조 역할을 맡은 탤런트 이원종이 왕마저 억압하는 세도를 부리고 있던데 사실 그럴 만하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의 대량원군 왕순과 현종(김동준 분)
    개성직할시 해선리의 성릉 / 8대 혜종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왕릉이다. (뉴시스 사진)

     
    그리고 거란은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로 쳐들어오기 직전인데, 고려는 이에 대항해 전군(全軍) 30만 명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 40만과 30만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비현실적이나 아무튼 양국간의 대충돌 전야(前夜)이다. (얘기가 또 다른 곳으로 새려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비롯한 역사상의 심한 근친혼이 이루어진 나라는 예외없이 그로 인해 멸망했다. 유전학적으로는 우성이 쇠퇴하고 오직 열성에 열성이 이어지는 핏줄에다, 의학적으로도 우매하고 면역력이 극히 취약한 아이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유전환경이니 멸문에 이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고려왕조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고려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했을까? 글이 너무 길어진 까닭에 그 비밀을 부득이 다음 회에 밝히려 하는데, 우선 열쇠를 품고 있는 인천의 원인재(源仁齋) 사진을 게재한다. 인천도시철도 1호선 원인재역 가까이 있는 바로 그 원인재이다.

     
     

    원인재 / 연수구청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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