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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여래좌상은 15세기 제작된 티베트계 목조불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2. 17. 00:34
기억에만 의지해 말한다면 조계사 대웅전은 2004년 대대적인 내부수리를 했다. 앞서 I편에서 말한 대로 이 건물은 불교 건축물이 아니라 보천교라는 신흥종교의 본당 십일전(十一殿)이었다. 보천교는 전라도 정읍에 본부를 둔 도교 계통의 신흥종교로 한때 신도가 20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번창했으나, 교주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사망과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급격히 기울어졌고, 급기야 1938년에는 십일전 본당마저 매물로 나왔다.
이것을 1938년, 서울 도성 안 사찰 건립을 추진하던 태고사(1954년 조계사로 이름을 바꿈)에서 1만 2000원이라는 헐값에 구입해 서울 수송동 지금의 조계사 자리로 옮겨와 대웅전으로 삼았는데, 이전 건립 비용으로 17만원이 소요되었다. 배보다 배꼽이 큰 모양새였다. 하지만 신축 비용보다는 싸게 먹혔으니 나쁠 것은 없었는데, 문제는 이것이 본래 도교 사원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내부에 불전이나 닷집 같은 전래 불당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2004년 대대적인 내부 공사로써 대웅전 바닥의 다다미를 마룻바닥으로 바꾸고, 천장을 우물천장으로 변형함과 함께 닷집과 공포를 두었으며, 폭 14.57m, 높이 2.3m의 초대형 불단도 마련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 게 아니었으니 이곳에 봉안할 부처님을 찾아야 했다. 이에 전남 영암의 고찰 도갑사의 부처님 가운데 한 분을 모셔와 개금을 한 후 불단에 모셨다. 그런데 모양은 영 아니었으니, 불단 크기에 비해 불상이 너무 왜소한 까닭이었다. (도갑사에서 이안한 목조여래좌상도 높이 1m로서 작지 않은 크기임에도)
이후 조계사 측에서는 이 불상을 대웅전 옆에 새로 지은 극락전으로 옮기고, 대신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약사여래불의 17자(5.2m) 크기의 대형 삼존불이 봉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너무 커서 말이 많았으니, 검증된 전문가의 종합적인 종무 진단 없이 그저 대형불상만을 선호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이 일에 비껴 서 있어 불상이 안치된 경위에 대해 알지 못하고, 또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았지만 필시 FRP 불상을 봉안했으리라)
그러다 2000년 극락전에 안치됐던 불상이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와 삼존불 옆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조계사에 그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불자들 사이에서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서"라는 다소 뜻밖의 대답을 들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즈음에 이 불상에 대한 서울시 관계자의 고찰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불상은 2000년 7월 15일 조계사 목불좌상이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이 불상이 2022년 4월 26일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서 보물(제2164호)로 지정됐다. 시골에서 올라온 이름 없던 목조불이 일약 보물이 된 것인데, 문화재청에서는 "조계사 목조여래상는 안정된 비례, 탄력적인 양감, 생동감 있는 세부 표현 등이 조선 전기 불상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높은 수준과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15세기 불상 중에서도 우수한 조형성과 예술성이 돋보인다고 이견이 없이 평가됐기 때문"이라며 보물 지정의 이유를 밝혔다.
간단히 말해, 19세기말~20세기 초의 불상이 졸지에 15세기 불상 중에서도 우수한 불상으로 변모하며 보물 지정이 된 것이었다.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1937년 도갑사 대웅보전에 있던 9존의 불상 가운데의 하나를 모셔온 것으로, 이것은 <동아일보> 1938년 10월 23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기사에 따르면 9존의 불상은 좌불상 3존과 보살상 6존으로서, 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아래 유리건판 사진이 1937년 도갑사 대웅보전에 있던 불상들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에 촉탁된 일본학자가 찍은 것이다)그런데 나머지 불상이 보존돼 있던 도갑사 대웅보전이 안타깝게도 1977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때 내부의 불상 또한 소실되었고, 이에 1937년 서울 조계사로 이안된 위의 여래좌상과 유리건판만이 도갑사의 불상을 말해주는 자료로 남게 되었는데, 이를 근거로써 국립중앙박물관·미술사연구회가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본 한국미술사' 학술대회에서 논문 '조선 전기 도갑사 불상군의 특징과 제작 배경'을 발표하며 조계사 목조불좌상의 연원을 밝혔다.
2020년 11월27일 온라인으로 개최된 이 학술대회에서 주최 측은, 사진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사료('도갑사수미왕사비' 등)로 볼 때 도갑사의 불상은 이제껏 알려진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이 아니라 15세기의 불상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후 나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을 확인했지만 사실 유리건판 안에 있는 불상 중에서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으로 여겨지는 불상은 없었다. 다만 주최 측에서 제시한 아래의 또 다른 유리건판과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과의 연관성(제작기법, 조성시기 같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여래좌상과 보살상으로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국립중앙박물관·미술사연구회의 주장을 종합하자면 (비록 사진 속에는 없지만)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위의 관음보살과 지장보상을 협시불로 둔, 혹은 관음보살과 세지보살 삼존불 구성된 불상 중의 중앙부처님이라는 것이었다. (발제자는 이런 경우는 중앙부처님이 항마촉지인 수인에도 불구하고 아마티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관적 견해를 덧붙였다)
어찌 됐든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2021년 1월 전문가의 엑스레이 촬영 등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제작연대가 1460년대로 추정된다는 답을 얻었던 바,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것은 없고, 이 불상이 서울로 이안됨으로써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영험하게 여겨질 뿐이다. 15세기 제작된 티베트 양식의 불상은 매우 드문 편으로서, 보물로서의 가치에 전혀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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