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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유원지와 쌍칠년(1977) 안양대홍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7. 22. 19:48
이제는 안양유원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안양유원지는 인천 송도유원지와 더불어 지난 50~70년대 한국의 대표적 유원지였다. 그래서 비단 안양 시민들 뿐 아니라 서울 사람들도 몰려드는 여름철 최고 향락지로 이름을 떨쳤는데, 풀장으로 대표되는 이곳 유원지의 물은 흔히 '똥물'로 불리며 소독약 냄새 풀풀하던 서울의 여느 풀장과 달리 유달리 맑고 깨끗해 인기를 끌었다.
안양유원지의 물이 깨끗했던 이유는 관악산(629m)과 삼성산(461m)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삼성천 물을 막아 계곡 풀장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공 둑에는 따로 수문을 만들어 고인 물을 정기적으로 하류로 흘려보냈으므로 항시 물이 차갑고 깨끗할 수 있었다. 그 맑은 물을 즐기려 서울에서도 피서객들이 몰려들었던 것인데, 그 가운데는 나와 내 친구들도 있었다.
이곳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가는, 체신부가 하절기인 6월 10일부터 8월 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장소를 운영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로도 알 수 있다.(1968년 6월 8일자) 당시는 핸드폰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 당장의 급한 용무를 위해서는 체신국의 전화나 전보, 혹은 일반 우편을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아울러 국립도서관에서는 안양유원지에 피서객들을 위한 하절기 임시 문고(文庫)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용률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모르겠다.
또 철도청에서는 8월달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을 만들어 피서객들을 실어 날랐는데, 매시간마다 안양유원지 입구에 정차하며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들이 이용했다는 <매일경제>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1967년 7월 29일자) 당시 요금은 왕복 40원이었다. 아무튼 안양유원지는 한해 평균 10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로서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몰렸는지 무료 풀장인 1, 2 풀장 외에 상류 쪽에는 유료인 대영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풀장 등이 들어섰지만 그것도 꽉꽉 찼다. 나아가 유원지에는 안양관광호텔이 건립됐고 그곳에 안양 최초의 캬바레가 들어서며 또한 호황을 누렸다. 아울러 계곡은 틈마다 영계백숙 간판을 내건 음식점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찼다. 이렇게 되자 계곡 물이 차차 더러워지기 시작했던 바, 그 맑던 물은 어느덧 2급수로 전락됐는데, 그럼에도 안양유원지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 정도의 타락은 아니었겠지만 안양유원지의 무질서를 1977년 하늘이 심판했다. 흔히 '쌍칠(77)년 대홍수'로 불리는 안양대홍수가 발생했던 것이니 7월 8일 밤부터 9일까지 단 하루 만에 무려 454.5mm라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이는 당시까지 기상청 창설 이래의 최대 강수량이라 했는데 이후로도 이와 같은 강수량은 보고 들은 기억이 없다.
안양은 그 폭우에 하룻만에 수중도시가 되었던 바, 짧은 시간임에도 수재민 9천4백39명, 사망·실종자 257명, 재산피해 1백85억이라는 사상 유래 없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때 안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안양대교의 교각과 상판이 주저앉았고 안양천을 비롯한 모든 안양 하천이 범람하였으며 제방이 유실되었다. 아울러 관악산과 삼성산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하였던 바, 산에서 쏟아져 내린 거대한 바위와 다량의 토사가 민가와 안양유원지를 덮쳤다.
이것으로 안양유원지의 영화는 끝이 났다. 그 피해가 복구의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컸던 것이었다. 즈음하여 자리를 굳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정책으로 더 이상의 개발이 제한된 것도 종말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1932년부터 시작된 안양유원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32년이라는 연도가 들먹여졌기에 하는 말이거니와, 안양유원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 안양역장이던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 서이면장,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해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삼성천 계곡을 막는 공사를 한 것이 당시 '안양 풀'이라 불렸던 안양유원지의 시작이었다. (<안양지사> ·안양학연구소 자료)
1932년 공사를 시작해 1933년 개장한 '안양 풀'은 바위돌과 콘크리트로 둑을 쌓아 각각 성인용과 어린이용의 풀장을 만든 것으로서, 계곡 양쪽에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피서객들이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것, 둑에 배수와 청소를 위한 수문을 설치한 것도 그때였다.
그 흔적이 지금도 안양예술공원 입구주차장 부근 하천 암반에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銘文) 및 공사책임자 '마쓰모도(松本)'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명문은 훗날 시멘트로 메워졌지만 세월이 흘러 시멘트가 박락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글씨가 드러나자 흥분하는 자도 생겨났다. 일제의 잔재이므로 필히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 어처구니없다. 수혜를 누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흔적을 없애야 한다니....? 그런 논리라면 경인선, 경부선과 같은 철도도 없애야 한다. 아무튼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으로 옛 안양유원지도 안양 풀도 모두 사라졌고,(일대는 2006년 '안양예술공원'으로 명명되었다) 지금은 '걷기 좋은 아름다운 경기도 길' 7곳 중의 하나가 되었던 바, 그저 가볍게 즐기면 될 일이다.
참고로 2012년 경기관광공사가 소개한 '걷기 좋은 아름다운 경기도 길'은 수원화성, 안양예술공원, 양평 산음휴양림, 여주 여강길, 오산 독산성 삼림욕장, 용인 호암미술관, 양평 수종사이다. 아래는 안양예술공원의 삼성천 계곡으로, 옛 안양유원지가 있던 곳이 원상회복되어 본래의 계곡으로 돌아온 모습인데, 휴일이라서 인지 인파는 여전하고 '아름다운 길'을 걷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 어떤 무식한 양반이 안양천 각자를 콕 찝어 시비를 건다. 그러면 조선총독부는 왜 헐었느냐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험담과 궤변을 늘어놓는데, 정 그렇다면 서울역, 옛 서울시청(현 서울도서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남대문 한전사옥, 신세계백화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의회 건물 등도 모두 철거해야 옳지 않겠는가. 헐,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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