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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업사지와 신비감 도는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7. 27. 22:19

     
    올해 6월 안성 봉업사지(奉業寺址)가 국가유산청에 의해 사적 지정되었다. 봉업사는 신라의 화차사(華次寺) 자리에 고려 광종(재위 949∼975) 시기 중건된 절로, 광종이 왕권강화와 왕조 정통성 확보를 위해 태조 왕건의 어진(御眞, 왕의 얼굴을 그린 그림 또는 초상화)을 봉안한 진전(眞殿)을 두며 진전사원으로서 격이 높아졌다. 
     
    <고려사>에 1363년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죽주 봉업사에 들러 태조 왕건의 어진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봉업사는 역대 왕들의 참배가 이루어지던 대규모 국찰(國刹)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은 폐허가 되고 석탑만 남아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조선초에 폐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곳 빈 들에 서면, 견주어 인간사의 흥망성쇠와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고려는 숭불(崇佛) 국가로 수도 개경에만 유명사찰이 300 곳이었다 하는데, 이를 젖히고 나말여초(고려말 조선초) 경기 3대 사찰로 불렸다는 대찰에 (여주 고달사, 양주 회암사와 더불어) 지금은 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은 것이니 무상함이 느껴짐은 당연한 노릇이다.  
     
     

    빈 들에 홀로 서 있는 봉업사지 오층석탑
    가까이서 본 석탑 / 높이 6m의 탑으로, 기단부가 둔중하고 1층 탑신이 높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탑 양식이다. 탑신에는 감실을 두었으며 자세히 보면 감실에 문짝을 설치했던 흔적도 보인다. 보물 435호
    당간지주 / 높이 4.7m 평범한 형태로서 옛 화차사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 바로 세웠다.
    봉업사지 전경 / 국가유산청 제공 사진

     
    봉업사지는 처음에는 사찰명을 알 수 없어 지명을 따라 죽산리사지로 불리다가 1966년 경지정리 과정에서 대소(大小) 향로 등이 발견되며 거기 새겨진 명문으로써 봉업사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봉업사지는 5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뤄졌으며, 華次寺(화차사)라 쓰인 8~9세기의 명문기와 및 大中八年(대중8년)·皆次(개차)·竹州(죽주)·能達(능달)·峻豊四年(준풍4년)·乾德五年(건덕5년)·太和六年(태화육년) 등, 인명, 지명, 연호가 새겨진 50여 종에 달하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준풍4년'은 고려 광종 14년(963)으로 '준풍'은 광종 황제가 사용한 연호이다. 기타 소조불상편, 불교용품, 중국자기류, 고려청자, 청동북, 범종 주조유구(鑄造遺構) 등이 출토되어 규모가 매우 컸던 절임을 짐작케 했는데, 이중 청동향로와 청동북 등은 오층석탑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봉업사지가 사적이 된 것은 올해 6월. 보물이 쏟아져 나온 장소치고는 꽤 늦게 지정된 셈이라 할 수 있다.
     
     

    봉업사지 오층석탑 출토 사리구
    봉업사명(銘) 청동향로 / 보물 1414호, 호암미술관
    봉업사명(銘) 청동북 / 보물 576호, 연세대박물관
    봉업사지 출토 명문기와편 / 경기도박물관
    봉업사지 출토 고려청자 / 경기도박물관

     
    아울러 봉업사지에서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탑지를 비롯해, 고려시대 지어진 30여 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어진을 봉안한 진전(眞殿) 영역은 중심 건물지와 중정 주변으로 회랑이 배치되는 등 고려시대 왕실 건축 양식이 잘 보존돼 있어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봉업사지 진전 영역 발굴 때의 모습 / 국가유산청 제공사진

     
    그밖에도 봉업사지 반경 500m 내에는 석탑, 불상이 남아 있는 죽산리사지와 매산리사지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장명사지를 비롯한 두 세 곳의 고려시대 절터들이 있다. 절이 이렇듯 밀집되어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죽주'(竹州)라 불렸던 이곳이 조선시대의 안성읍, 혹은 지금의 안성시보다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죽주는 남쪽 계립령에서 수도 개경으로 넘어가는 중요 교통로에 위치했으며,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의 안성휴게소가 안성시 부근에, 중부고속도로의 일죽IC가 죽산면과 일죽면 사이에 위치한다. 1235년(고종 22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 손문주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과 몽골군의 대규모 전투가 이곳 죽주산성에서 벌어진 것도 당시의 죽주가 주된 교통로이자 중요 도시였음을 방증한다.
     
     

    죽산리 석불입상 / 3.36m의 고려시대 석불상으로서, 죽산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옛 절터로 옮겨왔다. 앞쪽의 석물은 석등기단부로 추정된다.
    죽산리 삼층석탑 /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고려시대 3층석탑이다. 하지만 기단부는 통일신라시대에, 그 윗부분은 고려시대에 중수되었다.
    근방에서는 2~3m의 대규모 석재가 쉽게 발견된다.
    죽주산성 남문
    죽주산성 성벽 / 송문주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이곳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크게 물리쳤다.

     
    죽산리사지에서 죽주산성 가는 길에 매산리사지가 있다. 동네의 이름은 미륵당 마을로서, 마을 안에 있는 거대한 미륵을 모신 당우에서 유래되었다. 당우 안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5.6m의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상은 매산리 석불입상으로 불리고 있으나 보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임에 분명하다.
     
    현재 이곳에 있던 절터의 흔적은깨끗이 사라졌지만 석불만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불상과 석탑이 미륵당 당우 안에 있는데,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 뭔지 모를 신비감과 마주하게 된다. 흔히 이 석불은 형태와 시기가 유사한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상, 혹은 은진미륵이라 불렸던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비교되나 그보다 훨씬 표정이 깊으며, 나아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적인 견해로서는 개태사지 석불은 맹하고, 관촉사은 퀭하다. 따라서 생기를 느끼기 어려운 반면 미륵당 석불은 그 길고 그윽한 눈매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압도당하는데, 얼굴에 비해 작은 입이 소심한 느낌이라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말을 아끼고 조심하려는 느낌이고, 과도하게 늘어진 귀가 권위적 인상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후덕하고 원만하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배우 소지섭을 만난 적이 없지만, 예전 그를 보러 한국 여행을 왔던 일본 여자가 "다른 화려한 한국 배우들의 외모와 달리 깊고 그윽한 인상"이라 상찬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매산리사지 미륵당 석불의 인상이 그 평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여전히 경기도 유형문화재(제37호)에 머물러 있다.
     
    상향하자면 후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하여 당시의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민초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을 법한 미륵불로 여겨지는 데도 말이다. 불상의 규모도 그러하거니와 고려 초로 평가된 조성시기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보물급 이상의 가치가 느껴지는, 이 저평가된 미륵불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당 부처 이모저모
    안내문 뒤 담장 문양도 아름답다.
    미륵당 오층석탑 /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영태(永泰) 2년(신라 혜공왕 2, 766) 병오 3월 30일 박씨(朴氏)와 두 승려가 탑을 조성하였다'는 탑지석이 1966년 발견되었다.
    근방의 신(新) 봉암사 탑은 백제식으로 조성했다. 죽산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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