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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송문주 장군의 죽주산성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8. 13. 23:49
궁예가 출가했다는 세달사(世達寺)는 강원도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에 위치했다. 세달사지의 확인은 지난 2012년 5월 26일, 이곳의 땅 주인이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興敎'(흥교)라는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외 다량의 매장문화재를 수습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신고를 받은 문화재청에서는 중요성을 인식해 같은 해 10월 11일 중부고고학연구소에 발굴허가를 내주었고, 한겨울임에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0월 11일부터 12월 24일까지)
겨울에는 땅이 얼고 폭설과 한파로 인해 발굴조사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파괴를 막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지 발굴이 강행되었다. 왜냐하면 이곳 폐사지에서는 80년대 금동불상과 청동여래좌상이 나온 바 있고, 2007년에는 근방의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 교정에 있던 석종형 승탑이 도난당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흥교사가 신라시대의 세달사'라는 <삼국사기>의 기록 때문이기도 했다.
세달사는 김부식이 살던 시기에 흥교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는데, 아울러 <삼국사기/열전> '궁예' 편에는 "궁예가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세달사로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불렀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즉 말썽꾸러기 소년 궁예가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10살 때 출가한 절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2012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해발 540m의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 일대에는 흥교사와 그 전신인 세달사가 있었고, 그 절의 중심지가 흥교분교 건물과 운동장 지역임이 확인됐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는 세달사의 흔적은 물론 흥교사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도 학생수 감소로 폐교되었던 바, 학교의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현재는 태화산 탐방객을 위한 주차장으로 변모했다. 따라서 옛 세달사지에서 궁예의 흔적을 찾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대신 안성 칠장사에 궁예 젊은 날의 편린이 전한다. 칠장사 승려 궁예가 이곳에서 19세까지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해다는 것과 활 [弓] 솜씨가 무척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궁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즉 세달사 출가 후 이 절, 저 절을 떠돌던 궁예가 칠장사에서 수도하다 안성에서 봉기한 기훤의 휘하로 합류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물론 근자에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칠장사 명부전 벽에는 궁예의 활 쏘는 모습과 수도 모습이 묘사돼 있다.
칠장사에 전해지는 전설을 받아들인다면 궁예는 궁씨(弓氏)가 아니다. 앞서 '왕건의 기습 쿠데타에 당한 태봉국왕 궁예'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궁예가 궁씨인지 김씨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말한 바대로 우리나라에는 단일본인 토산궁씨(兎山弓氏)가 500명 정도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궁예를 종조로 삼는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들 세보에는 궁예가 신라의 왕족으로 기재돼 있는 바, 자연히 김씨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삼국사기/열전> '궁예' 편에도 그의 성은 김씨로,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였다고 기록돼 있다. 더불어 그의 유모가 어린 궁예를 안고 궁을 탈출하는 급박한 과정에서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언급돼 있기도 하는 바, 신라 하대의 물고 물리는 왕위 쟁탈과정에서 왕재(王材)였던 그가 경주를 탈출해 영월 산골에 칩거해 살기까지의 과정이 미루어 짐작된다. 따라서 그의 어릴 적 이름은 김씨 성을 가진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궁예는 영월에서 유모를 자신의 모친으로 생각하며 컸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소년 궁예가 매우 말썽꾸러기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어느 날 모친으로부터 출생의 비밀에 관해 들은 후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야망을 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궁예는 한주 개산군(介山郡/지금의 안성)에서 봉기한 기훤의 아래에 들어가며 시대의 저항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무능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진성여왕(재위 887~897) 시절이었다.
기훤은 신라말에 군웅할거한 여러 인물 중에서 유독 적괴(賊魁)로 지칭되고 있다. 이는 당대 기훤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대목으로서, 궁예가 기훤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훤은 궁예가 탐탁치 않았는지 크게 쓰려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궁예는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 원회 등과 함께 북원경(지금의 원주)으로 가 양길에게 의탁했는데, 이후 승승장구하며 중원경(중추), 명주(강릉), 철원 등을 점령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나아가 궁예는 개산군의 기훤마저 제압하고 기훤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며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관도대전으로 불리는 비뇌성(非惱城)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조조와 원소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벌인 관도대전에서 의외로 조조가 승리하며 중원의 새로운 강자가 되었듯, 비뇌성 전투에서도 궁예군이 승리하며 궁예는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다. (秋七月, 北原賊帥梁吉忌弓裔貳己, 與國原等十餘城主謀攻之, 進軍於非惱城下, 梁吉兵潰走)그 비뇌성이 어디인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등의 지속적인 논문 개진으로 지금은 안성 죽주산성이 옛 비뇌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전설이기는 하나 안성시 기솔리에 위치한 쌍미륵사 미륵불 2기는 비뇌성 전투 승리 후 궁예가 세운 불상이라고 한다. 이 석불이 '궁예 미륵'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궁예가 웅지를 편 죽주산성을 보노라면 과연 그럴 만한 곳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죽주산성은 외성· 내성·중성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철옹성으로, 해발 391m의 비봉산에 연접한 능선 250m 지점에 돌로 쌓은 1,322m의 성석이다. 이 같은 죽주산성의 규모는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하는데, 내벽과 외벽 및 속채움까지 모두 돌로 처리하고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치(雉)가 설치돼 있어 최초 주인이 고구려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236년 고려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생몰년 미상)는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몽골의 3차 침입을 막아냈다. 송문주는 고려 고종(高宗) 18년(1231) 박서(朴犀) 장군의 휘하로 참전해 귀주성 전투에서 목공군의 격퇴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그는 이때의 공로로 낭장(郞將)이 되었고 몽골의 3차 침입시에는 죽주성을 방어하는 방호별감으로써 죽주산성을 지켰다.
몽골군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으로 내려와 8월에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9월에는 온수군(溫水郡/지금의 온양)과 죽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송문주는 죽주산성으로 몰려든 몽골군과 장장 15일간의 혈전을 벌였는데, 공성기를 앞세운 공격과 화공 등, 적의 공격을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한 단단한 준비로써 번번이 적을 패퇴시켰다. 이에 성의 군사들과 양민들은 송문주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는데, 그 신과 같은 지혜는 최후까지 빛난다.
약 보름간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함락이 어렵자 몽골군은 지공(遲功)으로 작전을 바꾸었던 바, 성내에 식량과 물이 부족할 것이라 여긴 몽골 장수는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자 송문주는 성 안 연못에서 커다란 붕어를 잡아서 몽골군 진영에 보냈다. "멀리서 오셔 공격하느라 배가 고프실 것 같은즉 물고기를 대접해 올립니다"라는 글과 함께였다.
성에 물이 많음을 안 몽골군은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났는데, 송문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군을 몰아 후퇴하는 몽골군의 배후를 쳤고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 조정은 죽주산성에서의 승전을 치하함과 함께 송문주를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삼았다. 죽주산성에서 호되게 당한 몽골군은 이후 온수군과 대흥성(大興城)에서도 패했고 결국 그해 12월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조선시대에도 송문주 장군에 대한 존경과 배향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니, 조선 후기 채제공(蔡濟恭)의 문집 <번암집(樊巖集)>에 실린 '송장군 묘비명'에는 성 북쪽에 송문주의 사당이 있으며, 죽주산성과 함께 퇴락한 것을 1767년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가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제향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상의 사료에 따르면 사당은 1200년 대 후반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측된다. 송문주 장군의 사당은 이후로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니, 1933년 8월 25일 <동아일보>는 지역 주민들이 수백 마지기의 위토(位土, 제사와 관련된 일에 드는 비용을 위해 장만한 토지)를 마련하고 제향하였다는 기사가 전한다.
지금의 사당 '충의사'는 원래 1칸짜리 건물이었던 것을 1978년에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익공집으로 중수한 것이나, 퇴락하여 몹시 보기 흉하다. 찢어진 창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영정이나 위패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문에는 매년 음력 9월 9일에 안성시 주관의 제향 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때그때 위패를 마련하는 것인지.....?
충의사 가는 길도 평소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그래서 찾기조차 어려웠는데, 신기하게도 사당 계단 입구의 나무에는 무궁화 한 송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좀 더 설명을 보태자면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었다.
▼ 미처 못 실은 칠장사 풍경
▼ 칠장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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