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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봉 정도전의 집터와 무덤 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8. 26. 19:17

     
    2023년 12월,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 앞 세종로가 3년 간의  정비를 끝나고 새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첫 느낌은 과거로의 회귀에 성공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광화문 월대가 복원된 것과 조선시대의 육조거리를 재현하려 애쓴 흔적이었다. 이를 테면 육조의 표석을 세우거나 삼군부, 사헌부 등의 발굴된 유구를 노출시키는 노력 같은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광화문 월대*를 제외하고는 한양 정도(定都) 초기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었다.
     
    * 월대는 1394년 이성계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시설물이 아니라 1866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되었다. 그리고 1924년 전차노선이 가설되며 사라졌던 바, 길게 잡아도 존속기간은 60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일천한 역사의 건축물을 거금의 세금을 투여해 복원시킬 필요가 있는지 문제 되기도 했지만 해놓고 보니 보기가 좋다. 기타 아래와 같은 조형물들이 광장에 들어섰다.  
     
     

    공사 시작 무렵의 광화문 거리 / 2021년 1월 1일 찍은 사진이다.
    변화된 모습 / 서울시 제공 자료
    구체적으로는 1.월대복원 2.잔디마당 3.육조마당 4.역사물길 5.유구전시공간 6.시간의 정원 7.사계 정원 8.세종대왕상 9.시간의 물길 10.문화 쉼터 11.터널분수 12.열린마당 13.광화문계단 14.한글분수 15.명량분수 16.광장숲이 조성됐다.
    2023년 12월 24일 빛의 축제 때 찍은 광화문과 월대
    신설된 세종대왕상 / 비로소 세종로라는 이름이 명분을 찾았다.
    이순신 장군 상 앞에 신설된 명량분수
    노출시킨 사헌부 문 터
    사헌부 터 옆 '시간의 정원' 폭포
    사헌부 터 부근의 옆 '시간의 정원' 물길

     
    이 도시의 축(軸)을 만든 사람이 삼봉 정도전(1342~1398) 대감이다. 그는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을 때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과 타락산(낙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는 이른바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을 펼쳤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찮아서, 그의 백악주산론은 안산(신촌 봉원사, 연세대, 이화여대 등을 품고 있는 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하륜 대감의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 및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무학대사의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과 충돌했다.  
     
    이중 인왕주산론과 백악주산론이 끝까지 갑론을박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사대론(事大論)인 백악주산론이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모든 궁궐들이 남향(南向)이고, 임금의 남면(南面)해야 하는 것이 유학의 기본이라는 주장을 이성계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백악주산론을 관철시킨 정도전은 백악산을 등지고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조영했다. 그 결과 백악-궁궐-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주작대로가 만들어졌고, 내사산(內四山)인 백악,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자리 잡게 됐던 바, 한양의 설계는 전적으로 삼봉대감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한양의 중심 축을 잡은 정도전은 그 길의 왼쪽(광화문에서 볼 때)에 자신의 집을 지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울 인문지리서인 <한경지략>에는,
     
    정도전의 사가(私家)가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다. 지금 중학(서울에 설치된 국립 중등교육기관)이 자리 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 집의 서가가 있던 곳이요, 지금 제용감(왕실 의복의 염색과 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안채 자리요, 사복시(궁중에서 사용한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는 사가의 마구간 자리이다. 정도전이 지세를 잘 살펴 말 4000필을 매어둘 수 있는 땅을 차지해 마구간을 두었다.  
     
    라고 되어 있다. 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있던 삼봉은 그 권세를 이용해 지금의 중학동~수송동에 걸치는 대저택을 마련한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은 '지세를 잘 살펴 말 4000마리를 매어둘 수 있는 땅에 마구간을 두었다'는 대목이다.
     
    아무리 위세가 대단하기로서니 말 4000마리라니....? 언뜻 이렇게 이해가 미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국가가 관할하는 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군대를 거느린 사병(私兵) 체제였다. 정도전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려 4000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마장(馬場)의 유구가 2021년 10월 구 종로구청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서 발견됐다. 잡석다짐의 이 터의 정체에 대해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가 한필교(1807~1878)가 1843년 그린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조선 관청을 그린 화첩) 속의 사복시 그림을 참조해 비로소 말 훈련장임을 확인했다. 이후 신 종로구청의 개관과 함께 건물 앞에 사복시 표석이 설치됐다.
     
     

    중부학당 터 표석 / 서울 종로구 중학동 19
    제용감 터 표석 / 서울 종로구 중학동 54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2 종로구청 앞의 사복시 터 표석
    정도전 집터에서 본 의정부 터
    세종로에서 본 의정부 터

     
    아울러 정도전은 자신의 집 가까이 의정부를 두었다. 그는 당시 중요 5개 관직을 겸임하며 국정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그가 꿈꾸는 것은 임금의 권력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신권(臣權)의 나라였다. 마침 국왕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어린 방석(1382~1398)을 세자로 세우자 정도전의 뜻은 더욱 공고해졌고, 차제에 이성계 첫 번째 부인 소생의 야심가 이방원(훗날의 태종, 1367~1422)을 제거하려 들었다. 

     

     

    신의황후가 잠든 제릉(齊陵)
    신의황후 한씨는 정종과 태종의 어머니이며 이성계의 첫 부인이다. 1392년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 부소산 남쪽에 묻혔다.
    제릉 신도비 / 왼쪽 것은 1744년에 재건된 비(1404년 태종이 건립된 비가 임진왜란 때 파손되어)이며, 오른 쪽 1900년 고황후(高皇后)로 격상시켜 세운 비석이다.


    아마도 그때 역시 무더위가 극심했을 1398년의 8월 26일, 정도전은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송현방(지금의 송현동) 남은의 첩 집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 임금(이성계)이 위독하다고 거짓으로 알려 정원군 이방원을 비롯한 전처소생의 왕자들을 궐내로 불러들인 후 모조리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정도전과 그 일당은 이 계획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미리 축배를 들었다. 
     
    그런데 술이 거나해질 무렵,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 밖을 보니 어둠 속 사방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모두 집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아뿔싸! 대문 밖에 이방원의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휘두른 칼에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이 즉사했고, 남은은 생포됐다. 그 와중에서도 머리가 빨리 돌았던 정도전은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담장을 넘어 이웃집으로 피했다.
     
    이방원은 목표였던 정도전이 보이지 않자 그를 찾게 했고 전 판사(判事)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던 정도전이 민부의 고변으로 붙들려 길로 끌려 나왔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목을 치라 명했다. 이후 사람들이 이곳을 정도전의 수명이 다한 곳이라 하여 수진방(壽盡坊)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한경지략>과 <연려실기술> 등에 전한다.  
     
    <태종실록>에는 이때 정도전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정안군(이방원)이 가차 없이 참수를 명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체념한 정도전이 시 한 수를 짓고 깨끗하게 칼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아래의 절명시(絶命詩)는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전하는데, 만일 사실이라면 현장에 있던 정도전 측의 누군가에 의해 채록돼 전했을 것이다. 
     
    조심히 성찰하고 한결같은 공력을 더해 
    서책 속 성현의 교훈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이 
    송현방 정자 속에서 한 번 취해 허사가 돼버렸도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양가공)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 중)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정도전이 목숨을 잃은 송현동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의 정도전과 정원군

     
    그후 590년이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의 옛 무덤에서 몸통은 없고 해골만 달랑 있는 이상한 유골이 발굴됐다. '정도전 묘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의 기록을 근거로 후손들이 이 일대를 뒤져 지금의 양재고등학교 정문 부근에 있는 옛 무덤에서 찾아낸 유골이었다. 상당히 고급진 조선 초기의 백자들도 함께 나왔다.
     
    발굴을 담당했던 한양대박물관은 위 <동국여지지>의 기록과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태종실록>의 기록, 그리고 함께 발굴된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를 근거로 이 유골을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했다. 어떤 용기 있는 이가 정도전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사지냈을 것이라는 추측도 덧붙였는데, 혹시 그자가 위의 절명시를 채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용기있는 자로서 흔히 삼봉의 첫째 아들 정진(鄭津, 1361~1427)을 꼽는다. 정진은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하거나 자진한 다른 세 아들(정유·정영·정담)과 달리 해를 입지 않았다. 평소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에 훗날 복권되어 판나주부사가 되었고, 세종조에 충청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개관 당시의 모습
    함께 발굴된 백자
    한양대학교의 발굴보고서

     
    정도전의 무덤 터는 찾기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양재역 11번 혹은 12번 출구를 나와 서초구청 방면으로 곧장 200미터 쯤 가다 국립외교원, 양재고등학교 표지판을 만나면 그 길로 다시 100미터 쯤 걸으면 된다. 그러면 양재고등학교 정문을 볼 수 있는데, 그 오른쪽 소공원 내에 서초구청에서 조성한 정도전 산소 표석이 있다. 표석은 정도전의 호가 기인한 담양 도담삼봉에 기인해 만들어졌다. 일세의 풍운아가 묻힌 곳 치고는 무척 초라한지라 문득 연민이 솟는다. 
     

     

    양재역 11번 출구 앞의 옛 양재역참 터 표석
    '양질의 인재' 배출의 요람 양재고등학교
    정도전 무덤 터 표석
    표석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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