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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의 핵 개발 및 신흥종교 장막성전 · 신천지가 뒤엉킨 과천 청계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8. 17. 00:02

     
    과천 서울대공원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 5월 1일 문을 열었다. 약 913만㎡로서 동양 최대로 조성된 (당시는 동양 최대가 최고 미덕이었다) 서울대공원에는 동물원·식물원·놀이동산·산림욕장 및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섰는데, 이로써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창경원 놀이동산 시대는 끝나고 과천 시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과천 서울대공원 놀이동산 / 뒤로 청계산이 보인다.
    과천 서울대공원 놀이동산 기공식

     
    청계산 서쪽 자락 과천 서울대공원 자리는 본래부터 산림이 울창해 조선시대에는 왕의 사냥터로 쓰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된 금단의 땅이었다.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이 일대에 핵과 미사일을 포함한 신무기 개발 비밀기지를 기획했다. 박정희는 그 의지가 확고했으나, 미국의 눈을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임금님이 머물기도 했던 과천 객사인 온온사

     
    이에 박정희는 김종필과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한 3대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에게 당시 그가 운영하던 농장 '인산농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과천 땅을 구입하게 했다. 국가재정으로 직접 큰 땅을 사면  미국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재춘은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정작 과천 신무기 개발기지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서울과, 구체적으로는 휴전선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써 기지 건설부지가 대전으로 바뀐 탓이었다. 다만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김종필과 김재춘 / 1963년 사진


    그러나 박정희의 핵무기개발 프로젝트는 결국 미국 CIA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박정희에게 포기를 종용하며 압박을 가했으나 박정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미국에서는 당근책으로 핵 공여를 제안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박정희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부산항을 통해 핵폭탄이 도착했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던 박정희는 홍성 부근 지하에 건설했던 핵무기 실험장에서 이를 터뜨리게 했다. 하지만 불발됐고, 박정희는 글라이스턴 신임 미국대사를 초치해 미정부의 기만술을 강력히 성토했다. 결국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진짜 핵을 보냈고 이번에는 정확히 폭발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홍성 일대는 진도 5의 역대급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고 핵무기는 그 즉시 철수됐다. 
     
     

    신부군 집권 시절 최규하 대통령을 예방한 글라이스턴 미국대사
    글라이스턴의 한국 관련 저서 / 그는 핵무기 및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대처 전략을 놓고 벌인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과의 갈등 등, 한국 현대사의 비밀에 관한 더 많은 증언을 해줄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2002년 백혈병으로 돌연 사망했다.
    1978년 지진으로 무너진 홍주성 / 홍주일보 사진
    홍성 지진으로 무너진 집과 금이 간 도로 / 연합뉴스 사진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신무기 개발 비밀기지가 대전으로 변경되자 김재춘이 매우 곤란해졌다. 당시 김재춘이 대출을 받아 매입한 땅은  913만㎡가 아니라  24만8000㎡ 정도였으나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땅은 당시의 강력한 사유재산 제한 법이었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에 묶이는 바람에 팔기도 어려웠고 건물을 지을 수도 없었다. 이자에 허덕이던 김재춘은 차일피일 미루던 박정희에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김재춘은 한편으로는 국토건설부에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요구했으나 대답은 NO였다. 그렇게 되면 힘 있는 놈은 모두 같은 요구를 하게 되어 애써 자리를 잡은 그린벨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었다. 대신 건설부에서는 서울시가 과천 부지를 사들여 동물원을 포함한 대규모 놀이동산을 짓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박정희는 옳다구나 싶어 이를 받아들였는데, 그러면서 규모를 크게 상향시켰다.
     
    지금은 이미 게임 상대가 안 되지만, 당시는 북한과 모든 면에서 경쟁하던 시절이었다. 까닭에 박정희는 6.25 남침으로 창경원의 동물들이 모두 아사한 일까지 들먹이며, 이왕 짓는 것 평양의 조선중앙동물원(268만1000㎡)보다 크게 지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공원의 면적은 계획안의 10배가 넘는 290만4806㎡로 늘어났다.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이은 세계 2위의 면적이자 아시아 최대였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1977년 정부가 이곳을 공원용지로 고시하며 퇴거를 명령하자 청계산 자락에 터전을 잡았던 신흥종교단체가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바로 '신천지'였다. '신천지'는 철거 집행에 물리적으로 강하게 저항했다. 당시 '신천지'는 자신들이 퇴거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교주인 이만희 총회장께서는 이곳 청계산에 들어와 3년간 기도하셨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출애굽기의 모세처럼 신의 계시를 받았다. 청계산(淸溪山)의 '계(溪)' 자는 '시내 계' 자인즉 청계산은 동방의 시내산인 것이다. 총회장님께서 계시를 받은 이곳 시내산을 절대 떠날 수 없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은 이집트 시나이(Shinai) 반도의 시나이 산이었지만 그들은 제멋대로 시내산으로 축약시키며 퇴거 명령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당시는 정부가 요즘처럼 물렁물렁하게 대처할 때가 아니어서, 결국 신흥교단을 이끌던 젊은 이만희는 포기를 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외도 이곳에서 단체생활을 하던 유사한 기독교 계통의 신흥종교 단체들이 모두 쫓겨 인근 문원동의 빈 땅으로 이주했다.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계산은 신흥종교의 발흥지로서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뿌리를 내린 신흥종교는 장막성전(帳幕聖殿)이었다. 장막성전의 교주는 놀랍게도 만 17세의 고교생 유재열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앙촌 천부교 교주 박태선의 휘하에 있던 김종규가 독립해 세운 호생기도원의 신도였으나, 김종규가 여신도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자 신의 계시를 내세우며 독립하였다.
     
    1966년 4월 4일, 부친과 함께 청계산 아래로 들어온 유재열은 장막 교회를 짓고 모양 그대로 장막성전이라는 신흥종교를 창시했다. 지금까지도 신흥종교 역사상 최연소 교주로 꼽히는 유재열은 종말론을 앞세운 겁주기 설교로써 신도들을 끌어모았다. "곧 세상은 종말이 올 것인즉 불바다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안전한 장막성전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C채널 "신천지의 뿌리, 유재열의 장막성전"
    설교하는 유재열

     
    이후 유재열은 자신을 감람나무, 어린 종, 군왕, 선지자라 칭하며 "군왕의 말에 순종하는 자는 세상의 종말이 와도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성기 때 5천 명 이상의 신도들을 거느렸으니, 장막으로 지은 교회는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고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돈이 들어오자 그 역시 김종규처럼 타락의 길을 걸었던 바, 신도들의 헌금으로 호화주택을 짓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요정과 나이트클럽에서 술과 여자로 향락을 일삼았다.(동아일보 1975년 4월 3일자 기사 내용)
     
    그럼에도 유재열은 196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을 장막성전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의 설교는 점점 과감하게 구라를 쳤으니, "장막성전은 말세에 아마겟돈 전쟁의 환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밀실이다. 장막성전에 신도가 다 들어가면 세상은 불바다가 된다. 그러나 신도들이 다시 나와 신천지를 이루고, 신도들은 왕이 되어 각 지역을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장막성전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세를 확장하고자 함인지, 아니면 교인들의 주머니를 좀 더 털어내기 위한 수단인지 유재열의 설교는 구체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불바다의 환란이 지나가면 14만 4000명이 피신처에서 나와 신천신지(新天新地)를 이루게 되며, 장막성전을 지은 1966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260일째 되는 날 예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예언 등이었다. 그의 종말론에 현혹된 신도들은 아예 교회 근방에 집을 짓고 생활을 하는 이도 있었으니 400 세대, 2천여 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이 마을을 이루며 그간 조용했던 청계산 막계2동은 주를 외치는 소리로 내내 시끄러웠다.  
     
     

    청계산 장막성전 교회 / 교회 아래의 건물들은 장막성전 교인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당시 중앙일보에 실린 장막성전 교회 앞 모습 / 왠지 기괴하다.

     
    그러나 예언한 그날(1969년 11월 1일)이 당도했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교인들은 패닉에 빠졌고 일부 교인들은 유재열을 사기 등으로 고소했다. 당시 26살이던 유재열은 실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언론기관인 '디스패치'가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의 나이는 현재 70대 초반이며 한남동 UN빌리지 안에 있는 70억 원대 고급빌라에 산다. 그의 딸 가족도 UN빌리지에 거주한다. 딸은 지난 2006년 가수 싸이와 결혼했다.
     
     

    장막성전에 대한 수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75년 7월 5일자 기사

     
    싸이는 지난 2000년 대구 신천지 교회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후 가수가 아닌 유재열의 사위로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싸이는 자신은 신천지 신도가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장인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본인도 말했지만 싸이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신천지 신자가 아니다. 싸이가 그런 오해를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신천지 교주 이만희 때문일 것인즉  유재열의 증거장막 교인이었던 이만희는 1984년 3월 14일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을 창립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증거장막성전은 장막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증거하는 성전이란 뜻이다"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유재열의 장막성전에 의지하려는 기색이 아닐 수 없다. 유재열이 이끌던 종교 단체의 정식 명칭은 '대한기독교장막성전'이었다. '신천지'는 이제 세간에 잘 알려진 바, 여기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다만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하고,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로버트 퍼시그의 말을 재삼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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