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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와 북한산 승가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8. 22. 21:34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추사를 만나고 온 후, 내친김에 북한산 승가사(僧伽寺)까지 갔다. 잘 알려진 대로 승가사는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던 절이다. 그가 왔을 때는 지금처럼 뽀샵으로 번잡해진 절이 아니었을 터, 만일 현재의 모습이라면 김정희도 난색을 표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입구의 화려한 청운교 돌계단을 오른다.
내가 승가사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이 절에 있다는 추사 김정희의 각서(刻書)를 찾아보려 함이고, 두 번째는 약사암에 있는 승가대사의 등신대 석상을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김정희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으나 불교 사상에도 상당한 식견을 자랑하였으니, 대표적으로 1843년 승려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62)이 지은 <선문수경(禪文手鏡)>의 내용을 두고 오랜 기간 백파율사(=백파긍선)와 논쟁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승가사는 인도 스님 승가대사를 기려 건립한 절이다. 승가대사는 서기 640년에 인도에서 출생해 당나라로 건너와 중국 사주(泗州) 보광왕사에 주석한 것을 비롯해 53년간 불법을 포교했는데, 당나라 시인 이백이 자신의 시 '승가가'(僧伽歌)'에서 '높은 하늘의 밝은 가을 달 같은 참 스님(眞僧)'이라고 칭송했을 만큼 명망이 있던 승려였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백은 도교를 신봉했다)
과거 한반도에서 인도의 승려가 포교한 예는 사실 허다하다. 앞서 말한 '인도승려 지공의 승탑이 회암사에 있는 까닭'에서 말한 고려 말의 지공이 그러하거니와, 백제 침류왕 때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신라 눌지왕 때 불교를 전한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 역시 인도 사람이었다.
흔히들 묵호자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하나, 문자 그대로 얼굴이 먹처럼 검은 호인(胡人), 즉 남방계 외국인을 말한다. 즉 묵호자는 고구려에 왔던 인도의 승려로서 내친김에 불교 불모지 신라 땅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전래한 승려 순도(順道)와 신라에 온 아도(阿道)화상도 중국에서 포교하던 인도 승려로 추정된다.(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승가대사는 직접 한반도에 온 적은 없고, 중국 전역에서 떨친 사주대성(泗州大聖)의 영향력이 당과 교류가 활발했던 통일신라 때 유학승을 통해 전해진 듯하다. 승가의 사상은 고려 초기에 이르러서도 불교의 일맥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이니 북한산 승가사 석굴에 조성된 승가대사상이 이를 증거한다. 때는 고려 현종 15년(1024)으로 지광스님과 광유스님이 승가대사상을 만든 사실이 광배 뒷면의 각서(刻書)로 남아 있다.
승가대사상이 약사전이라 불리는 석굴에 모셔졌기에 혹간 약사불로 오인하는 겨우도 있으나 승가대사상은 불상이 아니다. 까닭에 나발이나 백호와 같은 불상의 요소가 없이 당대의 유행이었던 두건을 쓴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승가는 사후 십일면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고 강우나 홍수, 전염병 등에 대한 기복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손이 불상과 비슷한 모양의 수인(手因)을 하고 있는 것과 광배를 갖춘 모양새도 부처와 격을 같이 하는 대상으로 숭배받았음을 의미한다.
단순미와 사실성을 추구한 석상에 비해 광배는 연화문, 당초문, 보상화문, 연주문, 화염문 등으로 매우 화려하게 조성됐다. (그래서 석상과 광배가 시대적 차이를 두고 만들어졌다는 인식도 있다) 광배 뒷면에는 앞서 말한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각자돼 있는데, 태평(太平) 4년이라는 요나라 연호가 새겨진 것이 흥미롭다. 거란족이 세운 대제국 요나라가 고려에도 영향력을 미쳤음이다. 태평(太平) 4년은 1024년, 즉 고려 현종 15년으로 거란의 2차 고려 침공이 있었던 1010년으로부터 14년이 지난 때이다. 얼마 전 KBS에서 극화한 '고려·거란전쟁'이 바로 이 제2차 여요(麗遼)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인 756년 낭적사(狼迹寺) 승려 수태(秀台)가 굴을 파 창건했다는 기록(1116년 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이 전하나 확실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에 현종·숙종·대각국사 의천(숙종의 동생)·의종 등이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승가대사상이 안치돼 있는 지금의 승가사 약사전은 적어도 고려 초기부터 존속해 온 유서 깊은 석굴임에 분명하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승가대사 석상 뒤에서 솟는 샘물이다. 이 물은 자연 샘물인 만큼 흘러넘치며 약사전 석굴 바닥을 적시는데, 이는 경주 석굴암이 샘물이 솟는 암반 위에 건립되었다는, 그리하여 바닥의 찬 공기가 실내의 더운 공기를 유인해 바닥에만 결로 현상이 일어나고 벽체와 불상은 습기가 차지 않는다는 가설을 실증으로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일제강점기 석굴암이 보수되며 샘물은 인공 파이프에 의해 석굴 밖으로 배출되었고, 이후 심한 결로현상과 곰팡이를 막으려 지금도 365일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다.
그 약사전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바위에는 '영험한 샘'이라는뜻의 '영천'(靈泉) 각자가 있다. 바로 이 글자를 김정희가 썼다는 것인데, 그의 해서체와 너무도 흡사해 아니라고 하기 힘들 듯하다. 그렇다면 필시 김정희도 영천의 물을 마셨을 터, 괜한 동질감 속에 그의 족적을 좇아 한 발을 더 나아간다.
1816년(순조 16년) 늦여름, 김정희는 친구인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에 놀러왔다가 이 절의 승려로부터 뒷산 비봉에 옛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즈음하여 경주 암곡촌 수풀더미 속 무장사(武藏寺) 터에서 무장사 비의 한 조각을 찾아낸 후 "너무 놀라고 기뻐 소리를 질렀다(驚喜叫絶)"는 금석문의 덕후 김정희가 이를 그냥 지날칠 리 없을 터, 그 길로 산에 올라 비를 확인하였다. 이 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김정희는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술회했다. (<완당집>권1,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妖僧) 무학이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1816년) 가을, 친구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표면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나타나는 것이 풍화로 이지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던고로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을 확인하였던 바.... 마침내 이 비석이 진흥왕의 고비(古碑)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김정희는 다시 그 이듬해인 정축년(1817년) 6월 8일, 친구인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던 바, 이상의 행적들을 진흥왕비의 측면에 새겼다.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서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음.(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확인하였음.(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1250년간 잠들어 있던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비는 이렇게 깨어났다. 김정희는 이때 비문의 68자를 확인하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더 찾아 도합 70자를 확인하였다. 김정희는 정축년 동행했던 조인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북한산비는 황초령비와 같은 진흥대왕순수관경비(眞興大王巡狩管境碑, 진흥대왕이 국경을 순수하며 세운 비석)로서, 진흥이라는 시호와 상대등⋅거칠부의 관등으로 보아 비는 진지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황초령비와 내용 및 글씨가 같으므로 같은 시기에 세워진 듯하다"는 탁견을 피력하며 북한산비에 관한 연구를 마감했다.
김정희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김정희와 조인영은 도합 70자를 확인하였고, 이후 세도가인 조인영이 비문의 탁본을 떠 청나라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廷 =유희해, 연정은 자)에게 의뢰함으로써 120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쓴 내용이 종종 발견된다. 한 사람이 쓴 내용이 퍼온 글로써 계속 재인용되고 있는 듯한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바른 내용이 아니다. (설마하니 천하의 김정희가 탁본의 글씨조차 확인하지 못했을라구?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됨)
김정희는 자신의 금석문 탁본과 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고증학자 유희해에게 전달했다. 이는 1831년 그가 편찬한 금석학의 명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의 저본이 되었는데, 그는 <해동금석원>에 조선인 김정희와 조인영이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적었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북한산 비봉에 갈 때마다 추사의 학문적 성과와는 또 다른 비범함과 대단함을 체득한다. 비봉의 꼭대기 부근은 사실 등산화를 신고도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로 가파르고 거칠다. 그런데 옛 사람인 김정희는 그런 것도 없이 어떻게 몇 번씩이나 비봉에 오를 생각을 했는지....? 하긴 이 위험한 곳을 1.5m가 넘는 화강암 비석을 메고 오른 신라인도 있었던 마당이니.... 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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