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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신석기 유적을 세계에 알린 사라 넬슨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6. 30. 22:32
몇 해 전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사라 넬슨은 1973년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사라넬슨은 빗살무늬토기 전문가이자 지독한 암사동 사랑꾼임을 알 수 있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빗살무늬토기 유적지로서, 우리가 교과서 등에서 익히 보아 온 포탄 모양의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사라 넬슨은 이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를 집중 연구했다.
▼ 암사동에서 발굴된 여러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B·C 5000~4000년기의 신석기시대 유적지로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 오롯이 투영되는 귀한 장소이다. 이 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다량의 토사가 유실돼 선사시대 지표면이 드러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때 다수의 석기시대 유물과 토기편이 발견되는 바람에 눈길을 끌게 된 것인데, 이에 경성제국대학 요코야마(橫山將三郞) · 후지다(藤田亮策) 교수 등에 의해 최초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국인에 의한 발굴 조사는 1967년 이루어졌다. 당시 장충고등학교가 야구부 연습장을 마련하기 위해 터고르기를 했던 중 다량의 토기편과 돌무지 등이 발견되었고, 이에 경희대와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조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유적발굴 조사서가 발간되지 않아 어떠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는 당시의 신문보도를 통해서만 겨우 짐작된다. 아무튼 이때 많은 유물이 수습되었고, 그중 일부가 경희대박물관과 서울국립중앙박물관 선사실에 전시되어 있다.
본격적인 발굴은 1971~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4차에 걸쳐 진행된 이 발굴 조사에서는 신석기인의 주거지 26기를 비롯해 다량의 생활 도구(빗살무늬토기·어망추 등)와 무기(돌화살촉·돌도끼 등)가 발굴되었고, 이곳이 선사시대인의 집단 취락지임이 밝혀졌다.(지금껏 발견된 수혈주거지는 100여 곳에 이른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79년 7월 26일 국가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8월 30일 암사동 선사주거지로써 일반에 공개되었다.
▼암사동 출토 유물▼ 암사동 선사주거지
이상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도끼·긁개·찍개 등의 뗀석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한편 돌끌·창·화살촉 등은 간석기에 속한다. 이는 이곳 암사동 유적이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이 유구한 선사유적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연구해 온 사람이 바로 위의 사라 넬슨이다. 그는 이곳에서 발굴된 기능성(접착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과 미려함을 두루 갖춘 빗살무늬토기에 특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세계 고고학계에서 주변국으로 처져 있던 한국을 중심부로 끌어올리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96년 드디어 하와이 세계동아시아고고학대회에서 중국고고학과 일본고고학으로부터 분리된 한국 독립분과를 만들어내는 결실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명함에 '사라내선(思羅奈善)'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박은 일도 한국 사랑의 일례이다.
나아가 그는 1992년 양양 오산리 신석기유적을 세계고고학사전에 등재시켰으며, 그곳 신석기유적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소설로 승화해 'Spirit Bird Journey'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소설은 어릴 적 미국에 입양된 한국 출신의 여아(女兒)가 고고학도가 되어 강원도 양양 오산리의 8000년 전 신석기시대를 환상여행하며 자신의 뿌리와 인류 문화의 원천을 찾아가는 내용으로서, 전문 소설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탄탄한 구성과 고증을 평가받아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별 5개의 최고 평점을 받았다.
그럼에도 2020년 그녀가 타계했을 때 한국 학계에서 사라 넬슨을 추도하는 성명을 냈다거나 학술대회를 가졌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고, 다만 어느 서울시 의원이 애도 현수막을 암사동 선사유적지 입구에 내건 기억만 있다. 넬슨은 말년에 <한국고고학 개론서>의 집필에 몰두하다 타계했다 하는데, 탈고가 됐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최후의 시각까지 한국고고학에 대한 식지 않은 애정을 보인 사라 넬슨이기에 암사동 유적지 안에 흉상 정도는 세워질 법한데 그에 관한 이러다 할 언급마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및 유적지를 둘러보는 마음이 내내 착잡했는데, 그러면서 문득 이상한 점도 발견됐다. 암사동유적지에 재현된 선사인 가족들의 주변에 거꾸로 세워진 빗살무늬토기였다. 우리는 배우기를, 빗살무늬토기는 강가에서 생활했던 원시인들이 젖은 땅에 꽂아쓰기 편하도록 끝이 뾰족하게 제작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집(움집) 안에서는 과연 어떻게 썼을까? 설마 하니 원시인들이 토기 사용을 위해 집도 젖은 땅 위에 짓지는 않았을진대.... 그렇다고 아래 재현처럼 토기를 엎어놓고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토기의 사용 목적을 아예 벗어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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