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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이 눈물로 건넌 송파나루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8. 15. 23:08
서울 강남에 무슨 전설이 있겠냐 싶겠냐만은 의외로 전해지는 전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송파의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어부의 꿈은 흡사 예지몽처럼도 여겨져 흥미롭다. 내용인즉, 한강 고기잡이로 생활하던 한 어부가 낮잠을 자다 인근의 소나무 언덕이 한강물에 의해 무너지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주위 사람에게 이를 떠들어댔고 이후 이곳이 소나무(松) 언덕(坡)이란 뜻의 송파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전: 송파구청 홈)
이 꿈은 1925년에 을축년 대홍수가 터지며 현실이 됐다. 앞서 '강남역 물난리와 을축대홍수'에서 언급했듯 그해 여름 한강 유역에는 753mm라는 기록적인 비가 내렸다. 특히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무려 400~500mm의 비가 쏟아지며 수많은 사상자와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켰다. 조선총독부는 전체 예산의 60%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고 발표했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당했던 송파나루 일대 주민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돈을 갹출해 당시 송파나루가 있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사무소 앞에 기념비석을 세웠다. 1.7m 높이의 그 비석 앞면에는 ‘을축7월18일 대홍수기념’(乙丑七月十八日大洪水紀念), 옆면에 ‘증수사십팔척 유실이칠삼호'(增水四十八尺 流失二七三戶: 물이 14.5m나 불고 273호의 집이 유실됐음)이라는 짧고도 강렬한 문구를 새겼다.
홍수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한강의 물줄기를 바꿀 정도였으니 강북에 속했던 잠실은 강남이 되었다. 당시 한강은 지금의 롯데월드 석촌호수 자리인 송파강으로 흘렀다. 그런데 며칠 동안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지금의 한강 자리에 새로운 물길이 생겼다. 그 물길은 새로운 강이란 뜻에서 신천(新川)이라 불렸다. 송파강과 신천 사이의 잠실벌은 섬이 되어버렸고 한강에는 여의도보다 큰 또 하나의 섬이 생겼다.
어부의 꿈은 이후 1970년대 잠실개발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니, 옛 강인 송파강이 메워지고 단거리인 신천을 한강 본류로 삼으면서 잠실은 강남이 됐다. 그렇게 해서 생긴 땅에 잠실주공아파트가 지어졌고, 송파강이 채 메워지지 않은 곳에 석촌호수가 조성됐다. 지금은 그 호수를 롯데월드가 서울시로부터 장기 임차해 쓰고 있다.송파나루는 한강 3대 나루로 불릴 만큼 번성한 곳으로, 나루터 인근은 5일장을 너머 상설장이 설 정도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말에는 무려 270호의 객주가 이곳 송파나루에 들어섰는데, 한양 시전상인(市廛商人)이 지닌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피해 몰려든 상인들이 성업했다. 한양 경계를 벗어나 광주부에 속한 곳이었기에 시전상인들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송파나루의 은성함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한강개발로 송파강이 매립되고 교량을 건설하며 기능이 쇠퇴해졌고, 인근에 천호시장과 모란장이 개설되며 사라져 버렸다. 이상을 보면 송파강을 끼고 울고 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터,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눈물을 흘린 자는 아마도 이괄(李适, 1587~1624)이었을 것이다.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켰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돼 있다. 하지만 앞서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에서도 언급했거니와, 그는 그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정황으로 보자면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반란의 생각은 없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랑캐들이나 막자며 평안도 병마절도사로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한 1만5천 명 병사들의 조련에 매진해 마지않던 마당이었다.
그런데 해가 바뀐 1624년 1월의 어느 날, 영변성의 이괄 앞에 금부도사 고덕률 일행이 나타났다. 지금 한양에서 당신의 아들 이전과 지인인 기자헌 등이 역모 혐의로 잡혀 와 조사받고 있으니 당신도 가서 조사를 좀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폭탄을 맞은 이괄은 역으로 금부도사 일행을 죽여버렸다.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는 일갈과 함께였다.
이후 곧바로 거병한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있는 평양과 다수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안주를 피해, 방비가 허술한 샛길만을 택해 기동력 있게 남하하였다. 이어 황주의 신교 및 예성강 마탄전투에서 관군을 깨고 임진강을 건너자 인조 임금은 서둘러 공주로 도망갔고, 이괄은 1624년 음력 2월 10일 위풍당당히 창의문을 통과해 입성했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한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예였다.
이괄은 때마침 눈앞에 나타난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사실 그보다는 도망간 임금을 추격해 붙잡는 게 급선무일 터, 하지만 한양 입성에 도취된 이괄은 이를 게을리했고, 그동안 이괄을 추격해 한양으로 내려온 도원수 장만은 부원수 정충신과 함께 한양 북쪽 안산을 점령하고 이괄과 일전을 벌였다.
전투는 한양 점령 다음날인 음력 2월 11일 아침 곧바로 벌어졌다. 이괄은 백성들에게 싸움을 구경하러 오라는 방을 붙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으나 결과는 뜻밖에도 패배였다. 결국 이괄은 그날 밤 부하들과 함께 도성을 빠져나와 야밤에 송파나루를 건넜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항장(抗將)이었으나 그가 도성에 머문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
다음날 12일 아침, 도망가는 이괄의 부대를 광주목사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가 이끄는 관군이 막아섰으나 무참히 패했고, 사로잡힌 임회는 잔뜩 독이 오른 이괄의 명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이천 방면으로 방향을 잡은 이괄은 그날 밤을 곤지암 묵방리 초가에서 묶었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졌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수하인 기익현, 이수백의 배신에 그만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기익현과 이수백은 15일 이괄과 그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관군에 바치고 항복했다.
그것으로 이괄의 반란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혹자는 이괄의 반군이 한강진나루를 건넜다고도 하나 광주목으로 가는 가장 첩경인 송파나루를 택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 가락시장 역 입구에 비석거리가 조성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 당시 이곳은 송파나루를 건너 광주목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광복절 휴일을 이용해 석촌호수와 가락동 비석거리공원을 다녀왔다. 땀이 비오듯 한 몹시 더운 날씨였는데, 위에서는 경축일인 오늘도 좌·우가 나뉘어 난리를 피운다. 광복절 행사마저 쪼개져 치른 것이다. 해방 후 광복절 기념식도 좌·우가 나뉘어 거행됐다고 하는데, 역사가 퇴행하는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정부가 임명한 신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뉴라이트'라며 임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결국 별개의 경축행사를 벌였고, 많은 야당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종찬 광복회장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그는 독립투사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손자로 누구보다도 민주화와 민족정통성 확립에 앞장서야 할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는 과거 전두환 정부에 부역한 자로서, 민정당 원내총무·사무총장 및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장과 국정원장을 지냈다. 그때도 갑갑했는데 늙은 지금도 딱히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오늘의 별개 행사는 자신이 지지하는 두 명의 독립기념관장 후보가 탈락한 것에 대한 몽니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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