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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과 억측이 혼재된 망우리와 동구릉 건원릉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8. 30. 17:33

     
    앞서 말한 '함흥차사 & 이성계가 여덟 밤을 잔 팔야리 전설'을 잇자면,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전과 달리 괄괄했던 성격이 사라지고 매우 얌전히 지냈다. 말수도 급격히 줄어 태종에게도 달리 하는 말이 없었는데, 그도 이미 나이 쉰을 바라보고 있었던 바, 딴은 기력이 부칠 만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때부터 제 묏자리를 보러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이야기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의 망우리 고개와 망우동 295-2에 있는 양원샘에 얽혀 전한다. 먼저 현 망우리 고개 안내판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1934년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세웠으나 아직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명당을 찾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명당을 찾게 한 결과 드디어 명당을 찾게 되었는데, 그곳이 곧 동구릉(東九陵) 안에 있는 건원릉(健元陵) 자리이다.

     

    태조는 중신들과 지관을 거느리고 양주로 가서 검암산(劍岩山) 밑에 있는 능터를 직접 보고 과연 그 자리가 명담임을 확인하였다. 태조는 흡족한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망우산 고개 위에서 잠시 쉬면서 멀리 건원릉 터를 바라보면서 "아아! 이제야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於斯吾忘憂矣)"라 하였다. 

     

    이후로도 이 고개를 망우(忘憂) 고개(근심을 잊은 고개)라 하고 이 일대를 망우리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망우리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망우리 고개에 있는 '망우리 고개 유래 안내문'
    안내문 옆 '소통의 문' / 중랑구에서 망우리 고개가 동북의 관문임을 의미하는 문을 세웠다. 한자 門을 형상화했다.
    망우리 고개 차도
    망우리 고개 인도 / 서울↔구리 경계점의 해치 상

     

    안내문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면, 윗글의 출전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2000년 12월에 펴낸 <서울의 고개>이다. 망우리 고개에 대해서는 그 외의 버전도 전하나 남재(南在)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윗글과 대동소이하다. 참고로 남재 버전은 아래와 같다.

     

    남재는 앞서 소개한 팔야리 전설에서 함흥에 있던 태조 이성계를 매사냥을 핑계로 유인해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기화가 되어 이성계는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후 이성계는 자신이 묻힐 유택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던 중 검암산 밑에서 명당을 발견했으나 공교롭게도 그곳은 이미 남재가 자신의 묏자리로 잡아 놓은 곳이었다. 

     

    이성계는 그 자리를 요구하였고 남재는 선뜻 양보한다. 이에 이성계는 남재에 대한 고마움에 이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불망기(不忘記) 서찰을 써 주었다. 이것을 내밀면 조선팔도 어느 곳이든 무덤 터로 쓸 수 있을 것인즉 이 불망기로써 '근심(憂)을 잊으라(忘)'는 위안의 말과 함께였는데, 이후 이 일대의 지명이 망우리(忘憂里)가 되었다는 설이다.  

     

     

    건원릉 부감

     

    건원릉과 소전대(燒錢臺) / 능묘 앞의 소전대는 저화(종이 돈)를 태워 극락왕생을 빌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물이다. 소전대는 '돈을 태우는 대'라는 뜻이다.

     

    중랑구 망우동의 양원샘 전설 역시 이성계의 능침과 관련이 있다. 태조가 양주 검암산 밑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의 샘물 마셨는데, 물맛이 좋아 양원수(養源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이름이 양원리가 되었고, 지금의 전철 양원역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양원리 우물의 예전 사진
    1995년 12월 30일 중랑구청에서 찍은 표석과 우물 사진

     

    그런데 엊그제 이곳을 찾아가니 2020년 말까지 존재하던, 위 스토리가 쓰여 있던 양원리 우물 표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는 민가 내에 알량하게나마 물이 고이던 양원샘의 흔적이 있었으나 그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당시에는 없던 동래정씨 집성촌 표석이 생겼고, 바로 옆에는 난데없는 공덕비가 우뚝하다.

     

    양원리 동래정씨 집성촌은 고려말의 인물인 정구(鄭矩)가 정착한 이래 600년 넘게 이어져 온 동족촌(同族村)으로, 이성계가 이곳에서 우물물을 마시지 않았다면 근방은 아마도 정촌마을로 불려졌을 성싶다. (동구릉 부근에는 최촌마을이 존재한다) 표석에는 현존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라 쓰여 있는데, 지금도 동래정씨가 30여 호 산다고 한다. 

     

    공덕비에는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양원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애써 주신 분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합니다"라는 노골적인 문구와 함께 30명 정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양원리가 낙후를 면한 지는 모르겠으나 정비된 마을은 왠지 썰렁하다. 좋은 말로 하면 고즈넉한 분위기다.  

     

     

    동래정씨 집성촌 표석
    공덕비
    양원역로 거리 풍경
    옛 양원우물이 있던 곳
    양원역 앞 거리

     

    아무튼 전설은 그러한데,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위 이야기는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다. 앞서 '이성계의 건원릉과 소전대(燒錢臺)'에서도 밝혔거니와, 이성계는 애당초 건원릉에 묻힐 생각이 없었고 또 그곳을 자신의 묏자리로 봐 둔 적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애오라지 자신의 유해가 먼저 죽은 왕비 신덕왕후 강씨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부인 강씨의 무덤을 도성 안에 조성해 정릉(貞陵)이라고 했고(지금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 자신의 무덤 수릉(壽陵)은 그 옆에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그 수릉에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다른 묏자리를 보러 다녔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아들인 태종이 문제였다. 그는 죽은 양어머니 강씨와는 철천지 원수였던 바, 아버지 이성계의 무덤을 그곳에 쓰지 않았을뿐더러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아예 도성 밖 후미진 골짜기로 퇴출시켜버렸다.(지금의 성북구 정릉동) 아버지 이성계의 무덤은 양주 검암촌에 따로 마련했으니 이것이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성북구 정릉 / 1409년 태종의 명에 따라 도성 안에 있던 무덤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1가 광통교 다리 부재로 쓰인 석물은 중구 정릉 신덕왕후 무덤을 장식했던 돌들이다.
    광통교 다리 밑 /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태종은 그녀의 무덤 돌을 가져다 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또 한가지 사실과 다른 것은, 이때 이방원이 무덤에 고향 함흥의 억새풀을 심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능상(陵上, 봉분)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건원릉 봉분에는 억새가 무성한 까닭에 이 역시 정설처럼 들리는데, 그래서인지 최근 어느 유튜브 방송에 나온 역사학자도 건원릉에 대해 말하며 이를 사실인양 언급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이성계는 왕세자였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이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정릉이 훼손되는 것을 보자 유언을 바꾼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방원이 자신을 강씨의 무덤 곁 수릉에 장사 지낼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유해를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함흥에서 억지로 데려온 마당이니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만은 거두어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태종은 이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태조를 멀리 함흥에 묻을 경우 제사를 지내기 어려운지라 양주 검암산 밑에 능침을 마련해 묻었다. 이것이 지금의 동구릉 내 건원릉인데, 다만 유언을 받들었다는 생색은 내야 할 터, 신하들과 궁리 끝에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만드는 꼼수를 창출했다.  

     

    지금의 억새 무성한 건원릉은 그 같은 꼼수에 따른 결과일 뿐으로, 건원릉의 벌초는 1년에 한 번, 매년 한식날에 '청완 예초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이처럼 봉분의 억새풀을 벌초하지 않고 두는 연유에 대해서도 혹자는 이성계의 뜻처럼 설명하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에서는 이것이 편의대로 이루어진 일임을 밝히고 있는 까닭이다.(인조 7년 3월 19일 기사)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였다.

     

     

    건원릉 봉분의 억새
    '청완 예초의' 전과 후
    '청완 예초의' 광경 /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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