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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미칠적과 박제순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9. 29. 00:33

      

    1905년 11월 17일 밤 8시, 덕수궁 중명전에는 참정대신 한규설 · 외부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이지용 · 법부대신 이하영 · 학부대신 이완용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군부대신 이근택 ·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대한제국의 대표로, 일본국 전권특사 이토 히로부미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일본국의 대표로 마주 앉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에 관한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협상은 자정을 넘긴 18일 새벽 1시,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지휘하는 착검한 일본군들이 중명전을 포위한 가운데,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체결됐다. 1905년 을사년에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 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도 불리는 이 일은 <황성신문>을 통해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을사년에서 파생된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에 재현된 역사의 현장
    조약문
    중명전 뒷면
    중명전 뒷편의 만희당지 / 중명전은 고종의 서재로, 만희당은 침전으로 이용된 곳이다.
    옛 사진 속의 중명전과 만희당
    만희당 터와 미국대사관 / 만희당 담장 너머의 한옥집은 고종이 오매불망 도피하기를 원했던 미국공사관이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어네스트 베델이 <트리뷴>지의 기사를 옮겨 싣다 오보를 내며 고종이 을사늑약을 반대했다고 알려졌지만(지금까지) 고종은 을사늑약에도 반대한 적이 없다.
    만희당지 안내문 / 일제강점기 외국인들의 클럽하우스로 사용되다 소실되었다.
    어찌됐든 중명전이 비운의 장소임는 틀림없다.

     

    우리는 흔히 이 조약에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반대하고 이완용 · 권중현 · 이근택 · 박제순 · 이지용의 이른바 '을사오적'이 찬성함으로써 조인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한규설 ·박제순 · 민영기 · 이하영이 반대표를 던졌던 바, 찬반이 4:4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협상의 발언권이 큰 외부대신 박제순이 강력히 반대했다.

     

    그가 국무총리 격인 참정대신 한규설을 독려한 내용을 앞서 '박제순과 이완용,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인가?'에 실었다. 그런데 그가 왜 이완용에 비견될 만한 나쁜 놈이 되었으며 '을사오적'이라는 만고의 역적이 되었을까? 그리고 박제순과 함께 찬성으로 돌아선 민영기와 이하영은 어떻게 역적의 오명을 쓰지 않았을까? 혹자는 박제순 대신 이하영을 '을사오적'에 올려야 한다는 데 합당한 논리가 따르는 말일까?

     

     

    중명전 전시관 내에서 이완용을 제치고 악덕 친일파로 특별대접(?)을 받고 있는 박제순

     

    이상의 질문은 '을사오적'이 특별한 기준 없이 제멋대로의 척도로써 리스트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규설 제외한 나머지 자들은 '정미칠적'의 호칭처럼 '을사칠적'이 되어야 마땅하다.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년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정미7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말한다. 

     

     

    정미칠적 /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법부대신 조중응, 내부대신 임선준, 학부대신 이재곤,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정미7조약'을 체결한 내각은 이완용 친일내각으로 당시 이완용이 총리대신을 지냈으므로 그렇게들 부른다. 그런데 이 '정미7조약'에 찬성한 각료 중에 외부대신 박제순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반대를 했다는 특별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아무튼 '정미칠적'에 그의 이름은 없다. 반면 이완용은 '을사오적'에 이어  '정미칠적'에도 등재됐는데, 훗날 '경술국적'에도 이름을 올리며 매국 3관왕의 그랜드슬램을 이룬다.

     

    을사늑약 현장에서 한규설은 박제순과 더불어 끝까지 분투하다 열이 잔뜩 받혀 황제에게 물어보겠다며 회의장을 나섰다가 일본헌병에 붙잡혀 골방에 구금된다. 이후 박제순은 한규설의 행방도 모른 채 홀로 싸우다가 자정 너머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말과 함께 결국 굴복하고 만다. 이렇듯 전후 사정을 따지자면 박제순은 다른 대신을 제치고 '을사오적'에 오를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박제순은 한규설과 더불어 이토가 내민 조약문 원안 자체를 부정해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有二)한 사람이기도 하다. 조약문에 끝내 날인하지 않아 체결 직후 일제가 그의 외부대신관인을 훔쳐 강제로 서명날인했다는 말도 전한다. 굳이 박제순을 변호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 책임을 묻는다면 '을사오적'과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 궁내부 대신 이재극, 경리원경 심상훈을 포함한 9명의 대신들에게 공동책임을 지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며 정의일 것이다.

     

    ※ 친일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산 다른 친일파들의 후손과 달리 박제순 손자 박승유(1924~1990)는 친일하지 않았으며 을사오적 후손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광복군에 입대해 독립운동을 한 공로가 인정돼 대통령표창과 건국운동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 앞줄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이 보인다. 배경은 대관정(현 한국은행 옆 부영호텔 공사 현장)이다.
    대관정 / 본래 대한제국 황실에서 빈관으로 쓰기 위해 1898년 미국선교회로부터 매입한 건물이나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관저로 무단 점용됐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온 이토 히로부미의 숙소로 쓰였다.

     

    박제순은 고종에 명에 의해 김홍집·어윤중이 타살된 뒤 풍운 속의 조선 외교를 홀로 지탱한 인물로서 그저 '을사오적' 쯤으로 간과하기 힘든 면이 있다. <위키백과>에 잘 정리돼 있는 그의 업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고종 32) 이후 외부협판·중추원의관·외부대신·육군참장 등을 지냈다. 외부대신 재직 시에는 간도행정관리권 교섭 그리고 경흥과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었다. 그 뒤 관제 개정 이후 외무부협판과 중추원의관을 거쳐 외무대신,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했다. 1899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전권대신으로 임명되어 조청(朝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했고, 1901년 필리핀에 파견되어 조비(朝比)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1902년 9월 대한제국에 파견된 벨기에의 L. 뱅카르트와 조백(朝白)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했다.

     

    1902년 10월 31일 청국 주재 공사 즉,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로 파견되어 베이징에 있다가 1904년 귀국했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 중추원의관을 거쳐 외부대신으로 복귀하여 청나라, 일본과의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어느 쪽의 편을 들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외부대신 재직 중 그는 간도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여 간도행정관리권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육군참장, 의정부찬정 등을 지냈다. 1902년(광무 5년)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부임하였다가 1904년 면관되어 귀국했다. 1904년 한규설 내각에서 외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905년 전권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조인하였다. 같은 해, 한규설의 뒤를 이어 부수상 격인 참정대신이 되었다.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1902년 조백수호통상조약 이후 세워진 벨기에 영사관 건물
    1905년 건립된 건물로 중구 회현동에 위치했으나 1979년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전되었다.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쓰이고 있다.

     

    구한말에 이렇듯 제 역할을 견지한 관료도 드물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일본의 독도 편입에 브레이크를 건 사실이다. 러일 전쟁 당시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전을 치른 일본은 독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식하였고, 이에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령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했다. 그러자 박제순 당시 참정대신은 일본의 행위를 강하게 비판한 후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며 이 사실을 보고한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에게 재조사의 명을 내렸다.

     

    박제순의 항의 사실은 1905년 시마네현 편입 고시를 가장 중요한 법적 근거로 삼는 일본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한데, 최근 NEW 친일파 논란 속에 박제순만도 못한 무늬만 반(反) 친일파들이 독도를 들먹여 어처구니가 없었다. 2019년 서울 지하철 잠실역 대합실에 설치했다가 시민 혼잡을 이유로 일시 철거된 '독도 모형 전시물'을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은(혹은 팔아먹으려는) 증거"라며 떠들어댄 것이다. 

     

    그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정치인들이 하고 있었던 바, 더욱 한심하고 어처구니없었는데, 그즈음 우연찮게 광화문 지하철을 이용하다 그곳 대합실에 전시된 '독도 모형 전시물' 부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분명히 좌파 언론에서는 8월 16일 기사에서 "잠실·안국·광화문역 3곳의 독도 조형물이 치워졌다가 논란이 커지자 서울교통공사가 사과한 후 10월 25일 '독도의 날'에 맞춰 재설치하겠다고 밝혔다" 했는데, 내가 광화문 지하철역에서 '독도 모형 전시물'을 마주한 날은 8월 16일 며칠 후였다. 철거됐다는 말 자체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화문 지하철역의 '독도 모형 전시물'

     

    말하자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떠든 셈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독도 괴담은 아주 잠깐 들썩여지다 사라졌다. 전형적인 '아니면 말고 식'의 괴담이다. 작금의 말도 안 되는 계엄령 괴담도 마찬가지로서, 기실 독도 괴담이나 계엄령 괴담 등은 그렇게 함부로 들먹어져서는 아니 될 정말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인데, 농담이라도 안 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 말하면, 박제순은 1916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사망시 나이 58세로 을사오적을 포함한 친일관료 중에서 가장 일렀다. 아마도 친일관료 중에서는 가장 마음고생이 많았던 듯싶다. 그의 집은 현 종로구 북촌로 정독도서관 자리였는데, 지금도 그의 집 마당에 있었다는 돌우물과, 발견 당시 말라 있었다던 그 우물의 돌에 새겼다는 글을 볼 수 있다.

     

    박제순 사후 그의 집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1900년 설립된 관립한성중학교가 넓혀졌고,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 공립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학교가 거쳐갔으며, 해방 후인 1946년에 경기중학교, 1951년에 경기고등학교가 세워졌다.  

     

     

    정독도서관 내의 돌우물
    작년 겨울 찍은 사진이다.
    박제순이 새긴 글이 보인다.
    안내문
    박제순의 글
    정독도서관  내의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정독도서관  내의 경기고등학교 이전기념비 표석
    표석 뒤로는 아직도 옛 대갓집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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