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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돈덕전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9. 30. 18:24

     

    2023년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에 대해 쓰려하는데, 처음부터 고민에 빠졌다. 경운궁 돈덕전이 맞는가, 덕수궁 돈덕전이 맞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덕수궁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건축광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신축하며 '국가의 기운을 드높이는 궁'이라는 의미로서 작명했다. 이후 이 궁궐의 이름은 내내 경운궁이었으나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며 머물 때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킨 후 경운궁에 살게 했는데, 이때  명칭을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의 덕수궁으로 바꾸었고 고종황제의 호칭도 '덕수궁 이태왕 전하'로 바뀌었다. 훗날의 순종은 대한제국 멸망 후 창덕궁에 살게 하고 '창덕궁 이왕 전하'로 호칭했다. 황제 폐하에서 '왕 전하'로 격하된 것이지만, 허명이나마 왕족의 이름을 이을 수 있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할을 한 사람이 매국노 이완용이었다.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왕족도 아닌 일본 황실에 속한 공족(公族), 즉 귀족계급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순종의 호칭은 대공(大公)이었다. 이것을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 이완용이 극력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일제의 그와 같은 처사가 너무도 모욕적인 바, 적어도 왕족으로의 지위는 보장하고 경제적 안정 또한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 이완용의 주장이었고, 결국은 관철시켰다. '병 주고 약 주고'이지만 어찌 됐든 다행이었다. 

     

     

    덕수궁 광명문
    고종의 침전 함녕전 / 고종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고종은 허례허식에 쩌든 사람으로, 재위 시절 평양의 풍경궁 건축을 필두로 남발한 궁궐 공사는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경운궁 내의 서양식 전각 석조전(石造殿)이었다. 그리스 신전을 흉내낸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이 거대한 전각의 이름은 그냥 '돌로 지은 전각'으로, 동양의 건축 재료인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라 서양의 '돌 집'이라는 것에 모든 의미를 부여했다. 

     

     

    덕수궁 석조전 / 석조전은  완공에 10년이 걸렸는데, 완공된 때는 조선이 멸망한 후였다.

     

    그런데 고종은 1900년 석조전이 착공된 마당에 경운궁(덕수궁) 안에 자신의 친경식(親耕式, 즉위 40주년 기념식) 행사를 위한 또 하나의 서양식 전각을 부랴부랴 건립했다. 이것이 돈덕전이다. '돈덕(惇德)'은 ‘덕(德)을 도탑게(惇) 한다'는 뜻으로서 <서경(書經)>에서 빌려왔고, 현판 글씨는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집자(集字)해 새겼다. 서양 것을 지향해 서양식 건축물을 지었으면서도 사고는 여전히 고루했다. 

     

     

    덕수궁 돈덕전 / 1925년경 소실된 것을 2023년 재현했다.
    일제강점기의 돈덕전 사진
    돈덕전 현판
    경운궁 돈덕전(가장 왼쪽)과 석조전 / 망국 후인 1910년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말한 대로 고종은 이 서양식 집에서 1902년 10월18일로 예정된 자신의 친경식 행사를 멋지게 치르려 했다. 하지만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그래서 10월로 예정됐던 행사는 이듬해  4월 30일로 미뤄졌다. 그런데 그해는 또 마마가 유행했고 영친왕(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도 천연두에 감염됐다. 행사는 다시 이듬해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04년에도 열리지 못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제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음에도 고종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이에 뜻 있는 자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중 봉상시 부제조 송규헌의 상소는 이러했다.

     

    ㅡ 궁궐 공사를 영원히 중단하십시오.

    ㅡ 매관매직을 영원히 중단하십시오. 

    ㅡ 각종 잡세를 폐지하십시오.

    ㅡ 말로만 하지 말고 이상의 것들을 실제로 실천해 주십시오.

     

    하지만 실천된 것은 없었고, 결국 조선은 러일전쟁의 승자 일본에 의해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다. 위 돈덕전에서는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됐으며 퇴위한 황제에 대한 위무 생일잔치도 열렸다. 그리고 1905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여기서 머물렀다.

     

    앨리스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날은 9월 19일로, 결혼에 앞서 약혼자 롱워스와 함께한 예비 신혼여행 격인 여행이었다. 그녀의 아비 루스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의 승전국 일본 대표와 패전국 러시아 대표를 미국 동부 뉴햄프셔의 군항(軍港) 포츠머스로 불러 조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아울러 그해 7월의 카쓰라-태프트 회담으로써 한반도의 명운이 이미 기운 때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고종은 동양 여행 중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방문한다고 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조선을 농락한 '미국 공주' 앨리스

     

    조선 땅도 '미국의 공주'가 온다는 소식에 들떴고 서울 전역에는 대한제국기와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고종은 성대하고 극진하게 앨리스 일행을 맞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면 미국이 조선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착각에서였다. 고종은 자신의 슬픈 처지를 보여 동정을 사려 했는지, 아니면 황제국의 예법을 보여주려 했는지 그녀를 명성왕후의 무덤이 있는 청량리 홍릉으로 안내했다. 1905년 9월 27일의 일이었다.(그녀의 방문기간은 9월 19일에서 30일까지였다) 

     

     

    앨리스의 대한제국 방문을 보도한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엥지

     

    시종 시니컬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앨리스는 홍릉에서는 무척 밝고 즐거워보였다. 아마도 말을 타고 와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묘역 안에 들어서와서도 약혼자, 수행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이곳 저곳을 훑었다. 그리고 곧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앨리스가 이번에는 봉분 옆의 석마(石馬)로 옮겨 탔던 것이었다. 그녀는 황후의 묘역에서 말과 석마를 함께 즐겼던 것인데, 이 거듭된 무례를 지적하는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 

     

     

    약혼자 롱워스가 찍은 석마 위의 앨리스
    일행들도 석마를 탔다.

     

    고종은 미국을 '큰 형(빅 부라더)'라고 부르며 응답 없는 짝사랑을 이어가던 시절이니 그만한 무례 쯤은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는 노릇이었다. 앨리스의 무례에 대해서는 그녀의 의전을 담당했던 황실 의전담당관 독일인 엠마 크뢰벨이 오히려 분노했다. 크뢰벨은 당시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앨리스의 홍릉 방문 행사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예복을 갖춰 입고 일행을 기다렸다. 앨리스가 수행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녀는 승마복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짝이 가죽장화를 신었고 손에는 말채찍을,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석상으로 올라타며 약혼자에게 사진을 찍으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망나니 같은 짓에 경악했고,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저지른 그같은 무례한 짓은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일이었다."

     

    이어 앨리스와 일행은 때맞춰 나온 삼페인을 마시며 잡담을 즐기다 떠났다고 썼다. 그녀는 이듬해 전도양양한 청년 정치인인 약혼자 롱워스 하원의원과 결혼했는데, 앨리스는 훗날 대한제국에서의 일을 이렇게 술회했다. 

     

    "원치는 않았겠으나 속수무책으로 일본에게 빨려들어가고 있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슬퍼보였고 낙담한 듯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나간 듯했는데, 반면 조선의 거의 모든 땅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장교들과 병사들은 대조적으로 똑똑하고 유능해보였다..... squrt(짜리몽땅)한 황제와 그의 아들이 나를 안내했다. 그는 이 세상 황제 중에서 가장 황제답지 않아 보였으며 pathetic(1.불쌍한 2.한심한 3.슬픈)하고 stolid(1.무신경의 2.둔감한 3.멍청한)하게 느껴졌다. 황실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이제 얼마가지 못할듯 했다."

     

    필시 그녀도 보고 듣는 것이 있었을 터였다. 그와 같은 선입견이 아니라면 알만한 처녀가 일국의 황후 묘역에서 그와 같은 무례를 범하지는 못했을 터..... 그런데 불행하게도 무례한 이 처녀의 예측은 맞아떨어졌으니 그 두 달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했고, 그 5년 후 pathetic하고 stolid한 황제의 나라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반면 앨리스는 96세까지 장수하다 1980년 사망했다.

     

     

    홍릉에서의 앨리스 일행
    앨리스 일행이 묶었던 돈덕전
    돈덕전에서의 고종 / 2층에서 아래를 내려보고 있다. 한때 아관파천 때의 러시아 공사관이라고 잘못 알려졌던 사진이다.
    그 위치를 찍어보았다.
    덕수궁 중명전 / 고종 이곳에서 앨리스 일행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식탁은 황제의 생일잔치에 오르는 음식으로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졌다. 공교롭게도 그해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당시의 미국공사관 / 을사늑약 체결 후 미국은 외국 공사관 가운데 가장 먼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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