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동에 있던 관상감과 남이 장군의 사(死)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8. 00:17
조선후기의 지리지 <한경지략>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계동의 유래는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이던 제생원(濟生院)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훗날 음이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다가 1914년 동명 제정 때 계동으로 등록된 것이다. 제생원은 세조 때 혜민서와 통합되었다. 또 계동에는 국초(國初)에 설치한 천문·지리·기후 등을 관찰하는 서운관이 있었다가 마찬가지로 세조 때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대 계동사옥 마당에 있는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의 흔적이다. 관천대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는 높은 장소'로서 관상감 근무자가 천문을 살피던 곳이다. 과거 이 위에는 간의대(簡儀臺)가 놓여 있었고 소간의(小簡儀)라고 하는 관측기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간의대를 오르기 위한 계단이 있었다. 대간의와 소간의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대간의 : 혼천의를 간소화하여 만든 관측기기. 1276년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것을 세종대에 조선식 간의로 개량한 것이다. 극축(하늘 중앙, 북극성 주변)을 기준으로 하여 적도(赤道)의 위치를 찾은 후 정밀하게 그려진 기준자와 별을 비교해 보며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 후 기록했다.
소간의 :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대간의를 간소화하여 이동이 편리하도록 축소해 개발한 관측기기. 궁궐에서는 세종대에 2대를 만들어 경복궁과 서운관에 설치했고, 이후 성종대에 1대가 더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만들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는 약 70~100cm, 받침은 40X66cm, 각 환의 크기는 40cm였다.
일대의 조선시대 유구가 모두 사라진 마당에 관천대가 남아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19세기 중엽의 지도 <수선총도> 등을 보면 본래 관상감은 옛 휘문고등학교 자리에, 관천대는 지금의 자리보다 위쪽 언덕인 현재의 현대사옥 자리에 있었다. 현대사옥은 1970년대 중동건설로 돈을 벌은 현대건설이 계동 9천 여평의 부지를 확보한 후 그곳에 있었던 한옥 65채를 비롯한 주택들을 철거하고 건립되었는데, 다행히도 관천대는 사옥 건설 과정 중 이건되었다.
그런데 현대건설이 확보한 9천 여평의 부지 내에는 위의 제생원과 관상감 외에 조선시대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금군(禁軍)인 용호영 터,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의 사당이자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거(移居)했던 경우궁 터, 갑신정변 때 고종 부부가 다시 자리를 옮겼던 계동궁 터 등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 같아서는 건물을 올리기 곤란한 자리였다. 이를 테면, 10여 년 전 호텔을 올리려 한국은행 뒤에 어렵게 부지를 확보한 부영건설이 터파기 과정에서 대관정이라고 하는 구한말 영빈관 유적의 초석이 발견됨으로써 지금껏 지지부진 대고 있는 현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문화재관리법이 위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었고, 또 이 땅을 매입한 정주영 회장의 사옥 건립 의지가 워낙에 강해던지라 대지면적의 30%를 시민공원으로 기부체납하고, 건물 층수를 33층에서 12층으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정안이 서울시와의 타협 끝에 통과됨으로써 1983년 12층 규모의 계동사옥이 완공될 수 있었다. (기부체납지는 지금의 원서공원이 됐다)
당시 왕회장이라 불리던 정주영은 욕심을 부려 국내 최대 오피스빌딩인 높이 33층 길이 100미터 건물을 고집했으나 사옥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종묘, 서쪽의 북촌한옥마을과 인사동 문화지구 등과 충돌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33층은 무리였고 결국 계동 사옥은 14층 규모의 본관과 8층 규모의 별관으로 완공됐다. (별관은 2년 뒤인 1985년 지어졌다)
계동 사옥은 1983년 완공 당시 12층 규모였지만 1996년 증축하며 14층으로 층수를 늘렸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13층이 없는 구조이다. 즉 12층 다음 층은 14층과 15층으로 이어지는데, 공학적인 설계가 아니라 그저 미신에서 비롯된 일이다. 서양의 13일이 불길한 숫자로 꼽히는 까닭에 빼버린 것으로서, 이는 엘리베이터 내에서 4층이 영문 F로 표시되거나 4를 건너뛰고 5층으로 이어지는 사례와 같은 경우이다.
말하자면 미신이 과학을 누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사례가 조선시대에도 존재하였던 바, 공교롭게도 그 일이 이곳 관상감 터에서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관상감은 천문·지리·기후 등과 관련한 일을 담당했던 관서로서 조선시대 과학의 산실 같은 곳이었다. 앞서 'C/2023 A3 혜성과 핼리혜성 & 토성'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공식기록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핼리혜성 관찰 기록인 <성변측후단자>가 저술된 곳도 이곳 관상감이었다.
아래의 <성변측후단자>는 1759년(영조 35) 관상감이 25일 동안 핼리혜성을 관측한 기록인데, 더 오래된 현종 때의 것도 존재하며 현종 때의 기록은 무려 85일이나 된다. 이 같은 성변(星變, 별의 변화) 기록은 관상감이 설립된 세조 때부터 기록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자료는 현종, 경종, 영조 때의 관찰기록 모음집 6개뿐인데, 그중 현종 때의 85일 관찰기록은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의 관찰기록이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날마다 33가지 천문기상 현상을 관찰했으며, 이 가운데 성변(혜성이 나타남), 백홍관일(햇무리)와 백홍관월(달무리), 객성(떠돌이별)과 운석 등의 8가지 징조는 왕이 침소에 있을 경우 쪽지를 써서라도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이 국가적 변란과 관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니, 그 대표적인 예가 1468년 9월 2일 출현한 혜성이었다.
이 혜성은 9월 8일 세조의 사망과 맞물리며, 새로운 왕이 된 예종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남이(南怡)가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고변이 있었다. 남이는 17살에 무과에 합격한 이후 28살에 병조판서가 된 신진관료였다. 그는 계유정난에 반발해 난을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예종이 즉위함과 함께 그를 시기해 온 구세력에 의해 역모로 몰려 죽고 말았다. 반란과 상관 관계가 있다는 혜성의 출현이 결정적이었으니 예종 즉위년인 1468년 10월 24일 <예종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자광이 이르기를) "신이 급히 계달할 일이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유자광을 불렀다. 유자광이 아뢰기를,
"....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혜성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天河) 가운데에 있는데 광망(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將軍)이 반역(叛逆)하고 두 해에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하고, 조금 오랜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거사(擧事)하고자 하는데.... 나는 호걸(豪傑)이다'하고 갔습니다."
▼ 관련 기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덕동천 장경교에서 반궁천 서반수 빨래터까지 (3) 2024.11.18 큰 빛을 보지 못한 시카고학파의 박인준 (9) 2024.11.14 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 (12) 2024.10.06 덕수궁 돈덕전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6) 2024.09.30 정미칠적과 박제순 (3)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