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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빛을 보지 못한 시카고학파의 박인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14. 22:49
1세대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 ~ 1943)은 비교적 알려진 반면 (☞ '종로에 남은 박길룡의 건축물') 박인준(朴仁俊, 1892 ~1974) 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 블로그에서도 '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니, 편의 대로 옮겨 싣자면 다음과 같다.
.... 윤치왕은 1982년 말 여의도 수정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윤도선(서울대 산부인과의)의 집에서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는데,(향년 87세) 이후 그가 살던 가회동 1-10번지 집은 부근 가회동 1-6번지 윤치창의 집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매입되어 대사관 사택으로 이용되었다. 이 두 집은 1927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박인준의 작품이다.
* 시카고학파는 1930년대 시카고를 비롯한 미동부의 고층빌딩 건축붐을 선도한 일단(一團)으로, 선두주자였던 루이스 설리번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유명한 원칙으로써 기능주의 건축을 선도했다. 마천루와 그 마천루의 외관을 장식했던 커튼월은 시카고학파의 대표적 기능주의적 건축양식이다.
하지만 박인준은 귀국 후 인맥 결핍으로 빌딩은커녕 이러다 할 건축물을 설계하지 못했으니, 윤치왕과 윤치창의 집을 건축한 것도 당시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나온 윤치창이 설계를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윤치호의 집도 1936년 박인준의 작품이었으나 윤치호·윤치창 집은 아쉽게도 남아 있는 사진조차 없는 듯하다.
차근차근 설명하자면, 박인준은 1892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서군은 지금 남포시로 평양시 바로 옆이다. 박인준은 일찌감치 대도시 평양으로 와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연희전문 수물과(數物科)에 입학했다. 수학+물리학과=수물과이니 명석했던 누뇌의 소유자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인생의 출발은 결코 순탄치 못했으니 졸업도 못하고 일본 경찰에 쫓기어 중국 상하이로 도피해야 했다. 항일운동에 가담한 중요 범법자로 분류돼 수배된 까닭으로,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중국을 거쳐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고학 끝에 루이스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로 미국 공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재학시절 성적 또한 우수하였던 바, 1923년 7월 17일 <동아일보>에 그와 관련된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인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27년 다시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에 들어가 수학했다. 조선인은 물론이요 동양인조차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아래 <Koean Student Bulletin>은 '북미 대한인 유학생총회'의 영문 기관지로서, 그는 당시 미국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인 최대 학생단체인 '북미 대한인 유학생총회'에서 총무를 맡았다. 1923년 서른 한 살 나이였는데, Y. J. Park은 미국식 신건축교육을 정규대학코스에서 이수한 최초의 조선인으로 부각됐다.
박인준은 1927년 미네소타 주립대학를 졸업하고 시카고 건축사무소에서 건축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다 1931년경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돼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또다시 YMCA와 연관된 항일사건에 연루되어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이후 1933년 종각 부근에 '박인준 건축사무소'를 개업했다. 1932년 관훈동 197번지에 개업한 '박길룡 건축사무소'에 이은 조선인이 설립한 2번째 건축사무소였다.
여기서 '박인준건축사무소'는 그 위치가 흥미로운데, 현 도로명 주소는 종로구 우정국로 36, 얼마 전까지 '동헌필방'(東軒筆房)이 있던 건물이다. 공평동 모퉁이 길 다각형 건물 1층에 위치한 동헌필방은 1966년 개업한 이래 무려 5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가게였던 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많은 분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박인준 건축사무소'는 현 '세계로 약국' 2층에 위치했었다.
동헌필방이 세 들었던 이 건물의 시작은 '남계양행'(南桂洋行)이었다. 남계양행은 외국산 식료품을 수입·판매하던 회사로서, 위에서 말한 윤치왕의 동생 윤치창이 처남인 손원일과 함께 운영했다. '남계'는 윤치창의 호인데, 그 역시 1928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부를 졸업한 당대의 드문 인사로서 남계양행을 바탕으로 사업가로 성공하였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참여해 군정청 재무부 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전매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동업자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1924년 중국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 졸업 후 항해사로 임관했고, 다시 1927년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이후 함부르크 해운사에 취업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수에즈 운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장거리 항해를 경험하였으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1만 5천 톤급 대형 원양 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으로 해운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이와 같은 경험은 훗날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는 데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변변한 함선조차 없던 시절에 그가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퇴역 전함 백두산호는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이 부산으로 보낸 600명의 특수전 병력이 실린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만일 계획대로 북한군의 부산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울러 손원일 제독이 지휘하는 한국해군은 옥계·삼척 상륙의 시도하는 북한군 선단도 막아냈으며 옹진반도의 북한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박인준이 이 건물에 입주하게 된 데는 '북미 대한인 유학생총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윤치창의 도움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박인준은 이 건물의 2층 사무실에서 당시 다수의 건축물을 양산하던 기업형 건축사무소인 '박길룡 건축사무소'와는 다른 소수정예의 작품성 있는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설계를 의뢰받은 건물이 앞서 말한 윤치왕·윤치창·유치호의 집이다. (이중 윤치왕의 집만 남아 있다)
하지만 박인준은 많은 주문을 맡지 못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인준은 일본과 연줄이 없었을 뿐더러 일본말도 능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인 재력가과의 상담과 주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무엇보다 박원준 그 자신이 일본인과의 연줄 쌓기를 거부했다. 반면 총독부 건축기사 출신에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연을 등에 업은 박길룡은 주문이 쏟아졌던 바, 주택을 하루에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고, 실제로도 종로 어디에서든지 그가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까닭에 '박길룡 건축사무소'는 팀을 이뤄 각각의 팀이 주문을 소화해내는 시스템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따라서 팀에 따른 편차가 있었고 설계도 일률적이지 않은 단점도 드러났다) 반면 '박인준 건축사무소'는 아틀리에와 같은 분위기였으니 설계는 박인준이 혼자 하고 공업학교 정도 나온 직원 두세 명이 도면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선진ㅈ 미국풍이었고 디자인은 일관성이 있었으나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오더'가 없었다.
그래서 대표작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니 가회동에 있는 윤치창 주택, 윤치왕 주택, 윤치호 주택, 리모델링한 박흥식 주택, 동대문부인병원장 그라보스 주택, 북아현동 조준호 주택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개발과 더불어 모두 철거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윤치창 주택 뿐인데, 다만 가회동에서 박인준이 설계한 집이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외로웠으니, 일제의 섬 속에서 조선인 건축계와도 거리가 있던 '섬 속의 섬'에 살다 간 조선인 건축사라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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