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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6. 01:16

     

    앞서 강화도 고려산 최우 무덤에서 나온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고려청자의 최고봉', '청자의 왕중왕'으로 불리는 이 매명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넘어갔고 다시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쌀 1가마가 16원,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 '최충헌, 최우,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1962년 국보 제68호로 지정됐다.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아파트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이 매병은 2013년 500억원의 보험료가 책정됐다) 1940년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때 지불한 1만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자세히 보면 이 매병에는 도굴꾼의 탐침봉(도굴꾼들이 땅을 짤러보는 데 쓰는 쇠꼬챙이)에 길게 긁힌 상처 또한 발견할 수 있어 도굴품이었음이 증명되는데, 출토지인 고려산 최우의 무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진달래로 유명한 해발 436m의 강화도 고려산 / 경인종합일보

     

    이충렬 저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이 매병은 맨처음 치과의사 신창재에게 팔렸고 → 이것을 골동품상 마에다가 6000원에 구입 →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만원을 제시했으나 마에다가 거절 → 간송이 2만원에 구입 → 뒤늦게 소문을 들은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4만원을 간송에게 제시했으나 거절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것은 일제강점기 고려청자의 인기가 그 정도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인데, 아마도 고려청자 수집 열풍을 불러온 것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왜장들처럼 그 역시 조선의 자기에 심취되었던 바, 많은 관심을 나타냈고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이 앞다투어 고려청자를 진상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즈음하여 개성 왕릉을 비롯한 전국의 고려 무덤은 거의 도굴꾼의 손을 탔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이 매병을 도굴꾼으로부터 맨처음 구입했다는 치과의사 신창재다. 그래서 개인적 관심으로 추적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무엇이 없었고 대신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함석태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의사로서(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허가받았다. 그는 일본인 치과의사 일색의 경성에서 1914년 6월 한국인 최초의 개업의가 되었다.

     

    토선 함석태는 서울 삼각정(현 서울시 중구 삼각동) 1번지에 한성치과의원을 개업한 후 6.25 전쟁 때 피랍될 때까지 의료 활동을 했으며 소전 손재형과 더불어 꽤 알려진 고미술품 수집가였다. 그는 1935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15권에 조선 사람으로는 가장 많은 미술품 소장자(15점)로서 이름을 올렸는데, 애소장품이었다는 '백자 금강산연적'을 비롯한 도자기 소품을 많이 모아 소물진품대왕(小物珍品大王)이라 불렸다고 한다. 

     

     

    함석태가 소장했던 백자 금강산연적 / 북한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언뜻 치과의사는 과거에도 수입이 좋았고 그 돈으로써 값비싼 골동품들을 구입했나 보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재원은 치과 수입이 아닌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그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 세죽리 유지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간송 전형필과 마찬가지로 선대의 유산을 오롯이 물려받아 갑부가 되었고 그 일부가 미술품 구입에 쓰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흔히 광화문 비각이라 부르는 세종로 '기념비전(紀念碑殿)'(정식 명칭은 '서울 고종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의 문이 함석태의 소유였다는 것이었다. 기념비전은 11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즉위 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1902년에 세운 것이지만 훗날 일제가 광화문 육조거리를 넓힐 때 문이 뜯겨 경매에 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돌 문은 진고개(충무로)의 일본인이 사 자신의 집 대문으로 썼고 태극 철문은 함석태가 낙찰받았다.

     

    이후 돌 문 소유자였던 일본인이 함석태에게 철문을 고가로 매입하겠다며 접근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해방 후 함석태는 태극 철문을 국가에 헌납하였고 1954년 돌 문과 합체돼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념비전의 돌 문과 태극철문
    비전 앞의 도로원표 / 일제강점기인 1914년 설치했으며, 옆에는 전국 18개 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해 놨다. 이후 83년간 서울 도로원표의 역할을 하다 1997년 세종대로 사거리 앞에 새로운 원표가 설치됐다

     

    토선 함석태와 교류한 소전 손재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고미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다.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던 손재형은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한학과 서예를 배웠고 또 그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소전은 무엇보다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츠카(藤塚隣)가 가지고 돌아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거금을 싸들고 가 찾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후지츠카가 세한도를 양보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100일 동안 계속해 찾아 와 "세한도는 조선에 있어야 된다"고 간청한 손재형의 정성 때문이었는데, 이 열정의 스토리 속에는 석 달 뒤 후지츠카의 집이 미군의 공습으로 불이 나 전소된 사실이 빠지지 않는다. 만일 손재형이 당시 세한도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세한도를 볼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외도 소전은 많은 추사 작품을 수집했으니, 195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100주기 전람회 출품작 중 절반이 그의 소장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재형이 애써 수집한 추사의 작품을 비롯한 컬렉션들은 그가 정치에 뛰어들며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출마를 하며 선거자금이 달리던 그는 급기야 세한도까지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는데, 낙선을 하며 결국 되찾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세한도는 일곱 사람을 거쳐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의 소유가 되었고 아들 손창근 선생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며 국보로 지정되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같은 명작은 호암미술관으로 흘러들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부가 30대 나이에 최초로 구입한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헐값에 샀을 것이다. 종로구 부암동 사거리의 석파랑이라는 음식점 내 별당은 본래 부암동 석파정(서울미술관 내)에 딸린 별당이었으나 1958년 서예가 손재형이 가옥을 건축할 때 석파정 안에 있던 별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다시 세운 건물이다.

     

    이 별당이 세한도 속에 나오는 집과 닮았다 하여 자신의 집 후원에 이 건물만을 이건한 것으로서, 손재형의 고미술품에 대한 열정이 지금은 한식당 혹은 결혼식장으로 쓰이는 석파랑의 소품이 되어 있다.  

     

     

    추사의 세한도
    석파정 별당은 우리 전통 양식과 중국식 건축 기법이 조화를 이루는 특색 있는 건물로 대청은 흥선대원군이 난초를 치던 곳이라고 한다.
    석파랑 안내문 / 서울유형문화재 제23호이다.
    바깥 담벼락에 손재형의 스토리가 짧게 쓰여 있다.

     

    일본인 중에서는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자를 빼놓을 수 없다. 곤도는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일본인 동네인 진고개 본정통 4정목(현 충무로4가)에 고려청자 전문 골동품 가게를 차린 인물이다. 말하자면 1호 골동품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곤도가 처음부터 골동상인을 희망해 건너온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1897년까지 일본에서 백신 제조업에 종사한 자로서 그해 서울에 와 종두용 백신 제조업체를 차렸다. 조선에서는 꼭 필요한 천연두 백신이었던지라 큰 돈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이미 조선에서도 지석영 등이 일본에서 서양식 종두법을 배워 와 세운 사설(私設) 우두국(우두 접종소)이 있었다. 나아가 지석영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위생국의 책임자로서 종두를 관장하였고 1899년 경성의학교(대한의원 의학부의 전신)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으로 선임되어 백신 제조와 접종에 나섰던 바, 천연두 백신 사업으로 돈을 벌어 보려던 곤도의 사업은 곧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에 곤도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되었고, 불법이지만 큰 돈이 되는 고려청자 거래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곤도의 두 번째 사업은 대박을 쳤으니, 도굴품을 거래하는 일이 불법임에도 그의 가게에 전시된 고려청자는 전시되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러한 소문이 나자 조선인 도굴꾼들이 물건을 팔러 몰려들었고 곤도는 조선의 법을 공공연히 어겨가며(말하자면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장사를 이어갔다. 을사늑약으로 이미 기울어진 나라는 그를 제재할 힘이 없어 보였던 바, 곤도의 배짱 장사가 성공을 거둔 케이스라 하겠다.

     

    게다가 시운(時運)도 따랐으니 마침 창경궁 내에 서양의 박물관을 흉내낸 조선 황실의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 건립되며 고가의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왕가박물관이 사들인 도자가들이 1908년 9월 공식 개관 때 전시된 조선자기 컬렉션의 대종을 이루었는데, 훗날 국보로 지정된 청자상감 국화모란무늬 참외모양병(靑瓷象嵌牡丹菊花文瓜形甁) 등이 이때 곤도로부터 구입한 물건들이었다.

     

     

    창경궁 자경전 자리에 세워진 이왕가박물관 / 1992년 철거됐다.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바뀌었을 때의 덕수궁 내 이왕가미술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된 이왕가미술관
    이왕가박물관→ 이왕가미술관 → 조선총독부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별관 →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천했다.
    청자상감 국화모란무늬 참외모양병 / 국보 제114호

     

    곤도가 성공을 거두자 시마오카 타마키치(島岡玉吉), 시라이시 마스히코(白石益彦), 야나이 세이치로(矢內瀨一浪), 오다테 카메키치(大舘龜吉), 에구치 토라지로(江口虎次郞) 등의 골동상이 뒤를 이었던 바, 시마오카 타마키치와 시라이시 마스히코는 어느새 곤도를 제치고 1위와 2위의 골동상이 되었고, 이들 두 명은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 미술품 전체의 37.7퍼센트에 달하는 압도적인 물량을 납품했다.

     

    이에 곤도는 어느덧 7위로 밀렸으나 그 와중에도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주자승반'과 '철채 백상감 연당초문 화병' 같은 수준 높은 자기를 발굴해 각각 950엔과 600엔에 납품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 같은 활황에 힙입어 야이노스케(新田曲伊之助), 아카보시 사키지(赤星佐吉), 진나이 요시지로(陳內次郞), 이토 도이치로(伊藤東一郞) 등의 재력 있는 상인들도 건너와 경쟁에 뛰어들었고, 1920~1930년대에 들어서는 도쿄의 류센도(龍泉堂), 고츄교(壺中居), 교토의 야마나카상회(山中商會) 등 서양과 도자기 거래를 하던 중견무역상들까지 서울에 지부를 내었다.

     

     

    청자상감포도동자문주자승반 / 국보 제113호

     

    그리고 조선에서의 미술품 거래는1922년 골동상 이토 도이치로(伊藤東一郞), 아가와 시게로(阿川重郞),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주식회사 형태의 경성미술구락부가 등장하며 경매라는 새로운 거래방식이 출현하게 되는데, 1922년 3월 일본인들의 거류지인 남촌(南村) 소화통(昭和通), 지금의 명동 프린스 호텔 자리에 사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성미술구락부의 등장과 함께 미술시장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던 바, 도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대난굴(大亂掘) 시대'가 더불어 도래했다.  

     

     

    경성미술구락부 사옥 / 1942년 개축 후의 사진이다.
    경성미술구락부의 운영진과 주주

     

    이렇듯 일본인들이 조선 미술시장을 점유하게 되자 미술계의 큰손인 간송 전형필도 1934년부터는 일본인 골동상인 신보기조(新保喜三)를 전속 중개인으로 삼게 되는데, 이때 얻은 정보로써 구매한 것이 서두에서 말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아울러 1936년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는 내로라는 일본인 수장가들을 물리치고 은행장 출신 모리 고이치(森悟一)의 유품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병을 1만 4천 580원에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2만원에 맞먹는 금액이다)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병 / 국보 제294호

     

    이후 조선의 미술시장은 최창학·전형필·손재형과 같은 재력가, 함석태·박창훈·박병래 같은 전문직 의사들, 그리고 일본인 재력가 컬렉터의 세 부류가 경쟁하였는데, 전문직 의사가 고미술품 시장의 큰손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사는 예나 지금이나 돈을 잘 벌었던 모양이다.

     

    방금 말한 박창훈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보통문관시험에 수석합격한 수재이나 공무원의 길을 마다하고 1918년 경성의학전문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총독부 국비장학생으로 교토의대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경성에 항문외과의원을 개설해 치질 치료로 큰돈을 모았다. 그는 그 돈을 바탕으로 경성미술구락부의 큰손으로 군림했는데, 당시 경성의학전문대학 일본인 의사들의 조선 미술품을 사 모으는 취미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한다.

     

     

    박창훈(1897~1951)

     

    그런데 그는 자신이 끌어모은 엄청난 양의 미술품들을 태평양전쟁이 고조된 1940~41년 무렵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를 통해 모두 팔아치웠다. 모두 573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는데 워낙 양질의 작품들이 많아 4000~7000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서울의 기와집 한 채가 1천원하던 시절이었으니 그가 경매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사람들은 그가 모은 고가의 미술품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그러자 박창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 교육비를 위해 처분하여 부모의 노릇을 다하고 싶다."

     

    (※ 갑자기 상속세 낼 돈이 없어 동교동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을 처분했다는 부동산 부자 DJ 아들이 생각난다. 사실 나는 그가 미국유학시절, 항공기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물론 그러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설사 해외유학을 보냈더라도 그만한 돈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높은 지위로 수집한 '세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에 따라 미술품을 처분하여 돈을 재 놓으려 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고도의 재테크를 발휘한 것일 수도 있다. 경매의 특성상 당시 거래된 미술품들은 누구에게 팔렸는지 해외로 유출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아래 연객(烟客) 허필이 그린 '헐성루 망 만이천봉'만이 그가 당시 소장했던 그림으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연객 허필(1709~1761)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서 금강산도를 많이 그렸다. 표암 강세황과는 뜻이 통하는 지음지우(知音之友)였다고 알려 있다. 

     

     

    '헐성루 망 만이천봉' / 금강산 정양사 헐성루에서 바라본 금강산 봉우리들을 그린 그림이다.

     

    박창훈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치과대학, 경기중학 후원회장 등을 역임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부산으로 피난하던 중 사망하였다. 한때 대단한 수재요 엄청난 소장가였지만 지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간송 전형필 선생과는 감히 비교할 바ㄷ 못되겠지만 그저 지키기만 하였어도 그의 명성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간송이 1938년 건립한 유물전시관 보화각
    간송미술관 내의 전형필 기념비
    간송미술관 내의 전형필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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