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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반수 반수교에서 흥덕사 · 증주벽립까지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20. 23:07

     

    2020년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성균관과 반촌'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본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때는 빈촌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음에도 3d로 생동감 있게 재현된 반촌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고 감명 깊었다. 그래서 주체 측에 부탁해 아래의 전시 포스터를 한 장 얻어와 방에 붙여 놓고 오랫동안 음미하기도 했다.

     

    '성균관과 반촌' 전시회 포스터
    포스터의 도안이 된 반촌도 / 1747년  간행된 <태학계첩> 속에 '반궁도'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반촌은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지만 한자로 풀면 금방 이해가 간다. 여기서 반은 '학교 반(泮)' 자다. 즉 반촌은 요즘말로 대학촌이며 여기서 말하는 대학은 당연히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조선 건국 후 곧바로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아래 성균관대학교 탕평비각 앞 표석에는 1398년(태조 7)이라는 설립연도를 각자해 놓았다. 그리고 근자에는 설립 600주년 행사를 갖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실소할 일이다. 지금의 대학과 옛 성균관은 장소만 공유할 뿐 연속성이나 연관성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입구의 탕평비각
    탕평비각 안의 탕평비 / 영조 18년 3월 26일, 왕세자(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한 것을 기념해 왕명으로 세운 비석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성균관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일정한 자격을 갖춘 유생들이 모여 공자를 받들며 공부하던 곳으로, 쉽게 말하자면 국립 국가고시학원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식으로 문과에 합격하면 곧 고위공무원이 되었던 바, 준(準) 양반 대접받았으며 병역도 면제되었다. 탕평비각 앞의 하마비는 당대 성균관의 위상을 증언해 준다.

     

     

    성균관 하마비

     

    나라에서도 성균관을 국가 인재양성소로 여겨 성균관 유생들을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지금의 성균관대학 부근에 반촌을 만들어 성균관 유생들의 편의를 도왔는데, 반촌에는 성균관 노비로 알려진 반민(泮民)이 살며 유생들을 뒤치다꺼리했다. 오래전 KBS 2TV에서 방영된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성균관과 함께 반촌이 주요 무대로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성균관 스캔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을 남장여인 박민영을 중심으로 경쾌하게 그린 캠퍼스 드라마의 조선 버전으로, "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러나 제대로 아는 사람 또한 없는 그곳 성균관을 주목해 언제나 배경에만 머물렀던 그곳을 사상 최초로 전면에 내세워 조명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성균관 스캔들>의 주연들 / 오른쪽 송중기를 제외한 유아인·박유천·박민영이 모두 사고를 쳐 재탕하기 힘든 드라마가 됐다.

     

    하지만 그들 유생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반민의 이야기는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동서고금에 명·암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또한 그렇다고 반민들이 마냥 불행했던 것만도 아니니, 반대급부로서 조선팔도 유일의 도축허가권이 주어져 여타의 노비들과는 다른 경제적 여유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는 소가 귀한 세상이어서 소의 도축을 지시한 사람은 곤장 100대, 도축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렇듯 엄격한 제약 속에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반민들에게 주어진 도축허가권은 나름대로의 특권이 아닐 수 없었는데, 까닭에 성균관 반촌을 '조선시대의 게토(Ghetto)'라고 표현한 식자도 있다.    

     

     

    성균관 삼문
    유명한 서울문묘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59호로 1519년 식수됐다.
    명륜당 앞뜰 / 오른쪽으로 명자나무, 왼쪽으로 유생들의 숙소인 서재(西齋)가 보인다.
    성균관의 강학 공간 명륜당
    명륜당 중앙의 '어제태학은배시' /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글이다.
    그외 명륜당에는 40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비천당 / 성균관의 제2 학습장이다.
    진사식당 / 동재(東齋)의 진사들이 이용하던 식당이다.
    비오는 날 성균관 7길에서 본 성균관 풍경
    혜화동 전철역 앞 도로 / 왼쪽 횡단보도에 광례교, 오른쪽에 반민들이 운영하는 20여 개의 현방(懸房, 푸줏간)이 있었다.

     

    그 성균관의 입구에 반수교(泮水橋)가 있었다. 반수교는 앞서 말한 서반수와, 역시 응봉에서 발원한 동반수가 합쳐지는 곳에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서반수 물길 위에 놓인 다리였다. 이 다리가 있던 일대는 과거 한양의 이름난 명승지로서 경도십영(京都十詠, 한양의 명승 10곳)의 한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성균관 탕평비각 앞을 흘러 서반수와 합쳐지던 동반수는 앞서 사진으로 제시한 서반수 물길보다 폭이 넓었다. 그것은 옛 물길이 복개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성대 앞 버스정류장 올리브영 건물 오른쪽의 성균관대학 입구 길은 왼쪽 스타벅스 골목길보다 노폭이 훨씬 넓다. 반수교는 오른쪽 길 중간에 위치한 명륜중앙교회 입구쯤에 있었으며 연꽃을 비롯한 여러 가지 꽃이 피어 향교(香橋)라고도 불렸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반수교가 있던 곳 / 명륜교회 골목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다.
    탕평비각 앞에 옛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맨홀 뚜껑들을 연결하는 선이 동반수가 흐르던 곳이다.

     

    여기서 물길의 흔적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토교(土橋, 흙다리) 터이다. 하지만 어림잡은 곳으로 다들 우리은행 뒤편이 토교 터라 하니 나도 따라 믿을 수밖에 없다. 토교는 하천 양쪽 기슭에 걸친 나무 위에, 혹은 기둥 판목 위에 흙을 깔아 덮은 형식으로 지금도 시골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다리다. 조선시대에도 특별한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토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성균관 담벼락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식당교(食堂橋) 자리다.   

     

    토교의 이미지 사진
    경기도 여주 사곡리의 흙다리
    동반수 토교 터로 짐작되는 곳
    길가 왼쪽 담장 뒤로 보이는 성균관

     

    식당교는 말 그대로 식당 근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예전 성균관대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몇 번인가 먹었는데, 싸고 맛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일반인의 성균관 식당 이용이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니, 어림 없는 짓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이었던 만큼 성균관 내에서는 생원과 진사의 숙소도 유별했고(생원은 서재, 진사는 동재) 식당 또한 유별했다. 하물며 일반 평민들이야....

     

    식당교는 동재에 있는 진사식당 근방에 있었다. 생원식당과 진사식당은 오늘날의 사병식당과 장교식당 만큼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군대시절 사병식당에서 돼지껍데기국만을 먹다가 어쩌다 장교식당에서 비계가 붙은 돼지 살코기를 먹게 되었을 때, '아.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구나'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지금은 개선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위 <반궁도>에서는 식당교를 건너면 바로 하연대(下輦臺)가 나타나지만 진사식당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성균관 하연대 / 임금의 문묘 방문시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곳이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공자를 모신 사당 앞에서는 걸어야 했다.
    성균관 진사식당과 하연대의 위치
    문묘 내 이름 없는 이 건물도 식당이었을 것이다.

     

    식당교에서 조금 올라가면 숭보사(崇報祠)를 만난다. 숭보사의 역사는 이 땅에 성리학을 들여온 고려말의 안향(安珦, 1243~1306)까지 올라간다. 문성공 안향은 덕이 있는 인물로서 집안의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었다. 이에 면천된 노복들이 안향의 은덕에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기일에 성균관 동묘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전통이 반촌 노비들에게 이어졌다. 이후 1744년(영조 20)에는 따로 단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사우(祠宇)를 건립한 것이 지금의 숭보사다. 

     

     

    숭보사는 남쪽의 살림채와 북쪽에 사당채로 이루어진 건물로 비교적 옛 모습이 보존돼 있다고 하나 개인 소유이므로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숭보사 안내문 /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됐다.
    국보 제 111호 안향 영정 / 보기 드문 고려시대 초상화이다.

     

    숭보사로부터 조금 가팔라진 언덕을 올라가면 양현고(養賢庫) 터가 나온다. 양현고는 성균관 유생들을 위해 식품과 물품을 공급하고 성균관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 지내는 석전제(釋奠祭)의 비용을 조달하던 기관이다. 재원은 임금이 내린 성균관 학전(學田) 1000결(結)로부터의 수입, 노비 400명의 신공, 어세(魚稅), 현방으로부터의 헌금 등으로 마련했다.

     

    양현고는 국초에 성균관과 함께 설립되었으나 세조 때 철폐되어 풍저창(豊儲倉)에 귀속되었다가 1483년(성종 14) 유생들의 상소로 환원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철폐되었다.  

     

     

    양현고 터 표석
    양현고 터 주변 / 표석 위 도로 가운데 동반수의 맨홀 뚜껑이 보인다.

     

    아마도 여기가 동반수의 수원지일 것이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달리하면 옛 흥덕사 터에서 흥덕동천의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명륜동 1가 2번지에 위치한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앞으로 흘러 성균관 앞에서 반수(泮水)와 합류하고, 다시 혜화동 쪽 지류와 효제동 쪽 지류와 합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물줄기의 원류이다.

     

    물론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물줄기를 볼 수는 없다. 흥덕동천의 어원이 된  흥덕사는 태조 이성계가 교종의 종교소(宗敎所)로 삼아 토지 250결과 노비 50명을 하사한 대찰이지만 숭유억불책과 더불어 국초(國初)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흔적 또한 찾을 수 없다. 구한말, 망국에 지대한 역할을 한 무당 진령군이 호가호위했던 북묘(北廟) 역시 지금은 하마비만 남았다. 갑신정변 때 북묘로 도망친 고종을 호종했던 홍영식과 박영교(박영효의 형)가 청군(淸軍)에 살해된 장소도 이곳이다.

     

     

    관왕(관우)을 모셨던 북묘

     

    조선 오백년을 대표하는 당쟁의 아이콘이자 사대(事大)의 아이콘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문제적 인물 우암(尤菴) 송시열(1607~1689)이 살던 곳도 이곳이다. 흥덕골 기암괴석에 피는 꽃을 즐기는'흥덕상화'(興德賞花, 흥덕골 꽃구경) 역시 경도십영의 하나로 꼽혔다. 따로 '흥덕상련'(興德賞蓮, 흥덕골 연못의 연꽃구경 )이란 말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곳 흥덕동 숭교방(崇敎坊)에는 큰 연못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유서가 깊으며 산수가 아름다웠던 흥덕동이건만 지금은 그저 송시열의 '증주벽립(曾朱壁立)' 암각서만이 명륜동 주택가에 처량한데, 우암 송시열이 살던 곳이라고 새긴 '우암구기'(尤菴舊基) 비석은 주택 입구 한켠에서 누군가 버린 의자를 뒤집어 쓰고 있다. 흥덕사의 표석도 구색을 맞추려는 듯 주변에 폐상자가 잔뜩 쌓였는데, 후진 차량에 쓰러졌던 북묘 하마비는 다행히도 다시 세워졌다.

     

     

    우암구기 비석
    흥덕사 터 표석
    북묘 하마비
    증주벽립 각자 / 송시열이 중국의 증자와 주자의 뜻을 벽처럼 세워 그들처럼 살겠다는 각오를 집 뒤 바위에 새겼다.
    증주벽립 각자가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승용차가 지나고 있다.
    풍광 수려했던 과거 사진 / 각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가는 길에 인상적인 한옥 한 채를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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