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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전기 산업에 관한 복잡다난한 일들과 을지로 한국전력 서울본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30. 19:33
1882년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초대 미국 공사 부임에 대한 답방으로써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른바 보빙사로 불린 그들 사절단은 귀국 후 발달된 서구 문명을 고종에게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는데, 그중에서도 전기불이라는 게 있어 밤이 낮처럼 환하다는 내용은 듣는 이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고종은 밤새 놀다 새벽에 잠들어 낮 3시쯤에 일어나는 지독한 야행성 인간이었던 바, 밤이 낮처럼 환하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고종은 단박에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조정에서는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등 설치를 의뢰하였다. (지금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자신이 긴 수명의 백열전구를 발명한 1879년 11월로부터 불과 8년 후의 일로서, 편지를 받은 에디슨은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게 된다니 꿈만 같다"며 흥분했다.
1887년 3월 드디어 기술자 맥케이를 비롯한 에디슨 전기회사의 직원들이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동시에 밝힐 수 있는 대용량의 직류발전기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와 고종의 거처인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불을 밝혔다. 유감스럽게도 그 역사적인 날이 기록마다 달라 정확한 날자가 불분명하지만, 밤이 낮처럼 환해진 그날의 소동과 감격은 생생히 전한다.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2년 앞선 일이었다.
1899년 5월 17일에는 서울 경희궁 앞에서 전차의 첫 운행이 있었다. 경인철도 관계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인 콜브란(Collbran,H.)과 보스트윅(Bostwick,H.R.)이 정부로부터 한성 시내에서의 전기사업경영권을 얻어 전차를 부설한 것이다. 당시 청량리 홍릉에 있던 명성왕후 무덤에 고종이 자주 행차하는 것을 본 그들이 전차를 설치하면 편리하고 빠르게 다녀올 수 있다고 꼬신 것이 출발이었는데, 이에 팔랑귀 고종은 내탕금으로 전차 가설을 서둘렀다.
홍릉 왕림 시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이 따르게 되어 한 번 행차에 10만 원이라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된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에 서울은 1894년의 교토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전차가 다니는 도시가 되었는데, 75㎾ 600V의 직류 발전기 1대가 설치된 발전소가 흥인지문 근방에 세워졌고, 서울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왕래하는 전차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 신물문은 인기만점이었으니 남녀노소 누구나 타보고 싶어 난리가 났고, 전차를 개통시킨 콜브란의 한성전기회사는 대박을 쳤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대한제국 황실이 자본금을 증자하며 한미전기회사로 바뀌었고 콜브란측과 5:5로 지분을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어느 선에 오르자 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콜브란은 슬슬 발을 뺄 궁리를 했는데, 그것이 호시탐탐 한국 진출을 노리던 일본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 콜브란은 1909년 한미전기회사를 고종 몰래 일한와사(日韓瓦斯)에 170만 엔에 팔아넘겼다.
일한와사는 "우리는 정당한 대금을 주고 회사를 인수하였으며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종은 격노하여 펄펄 뛰었으나 콜브란은 이미 영국으로 튄 후였다. 새 주인인 일한와사는 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의 아들 소네 간지가 대한제국의 가스공급사업을 위해 1908년 도쿄에 설립한 가스판매 회사로서,('와사·瓦斯'는 '가스'로 읽힌다) 계약서 상으로도 힘으로도 상대가 안 됐던 황실은 결국 절반의 지분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서울의 전기 사업은 일한와사가 독점했고, 독점기업다운 횡포를 부렸던 바, 일본보다 전력 생산 단가가 저렴했음에도 일본보다 30~40%가 비싼 값에 전기를 팔았다.*전차 요금이 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기를 써야 했는데, 1915년 일한와사는 사명(社名)을 아예 경성전기로 바꾸었고, 운수사업에도 진출했다.
* 전국적으로 볼 때는 독점은 아니어서 인천전기 · 부산전등 · 평양 진남포전기 · 부산 한국와사전기 · 원산수력전기 · 대구전기 · 개성전기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소규모의 발전기를 갖춘 지역 전기 공급업체였다. 사주(社主)는 개성전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 무렵은 부영버스, 경인버스 등 경성에 버스가 도입되면서 경성의 대중교통사업이 잠시 경쟁시대로 들어선 때였다. 그러자 경성전기는 자금력을 총동원해 운수회사를 설립하였고, 총독부의 지원 하에 나머지 버스회사들을 모두 합병시켰다. 노선 버스가 전차 이용객을 잠식할까 선제적 조치에 나선 것으로서, 현대 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공격적 경영이었다.
경성전기는 1920년대 전차 노선을 대폭 증강시키며 노선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서 경복궁의 서십자각 및 한양도성을 파괴시켰다. 즈음하여 조선 사회에서는 전기 요금 인하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가장 격렬했던 소비자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경성전기는 한미전기 매수 후 사용해 온 500kW 마포발전소(후에 용산발전소)를 1925년까지 4차례에 걸쳐 12,100kW로 증설하고 1929년 6월 경성 서부 당인리에 당인리화력발전소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전기요금은 여전히 비쌌고, 그로 인해 해방 직전까지 개인 가구의 전기보급율은 채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돈을 긁어모은 경성전기는 1928년 남대문로 초입에 5층짜리 철근 콘크리트조의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시카고파의 블록 형식을 채용해 타일로 외관을 꾸민 모더니즘 근대 건축 양식이나, 기둥과 주두(柱頭), 처마 등은 여러 무늬를 혼합한 이른바 덴탈 오너먼트 공법의 고전적 르네상스풍으로 장식했고, 하단부는 돌을 거칠게 다듬는 러스티케이션 방식으로 마감 처리를 한 멋드러진 건물이었다.
사옥은 이 같은 특성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로 내진·내화 설계가 적용되었으며,(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전기회사답게 580개의 전등과 당시 흔하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를 좌우 2대나 설치했다. 경성전기는 이후 우리나라 유일한 발전회사인 조선전업 및 배전회사 남선전기와 통합하며 한국전력 주식회사가 되었는데,(1961.7.1) 이때 2층의 증축이 이루어지며 한국전력 남대문사옥이 되었다가 지금은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이 영욕의 건물은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유산 제1호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고종 갑오개혁 이후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교량, 물품, 시설, 기록, 장비 등의 보존을 위해 국가유산청장이 지정하는 문화재를 말하며, 2004년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시설물은 1000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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