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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3. 06:58

     

    반계 윤웅렬의 나머지 두 아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순서대로 둘째인 윤치왕(尹致旺)부터 말하자면 그는 1세대 해외유학파 의사로서 1919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의학부(Faculty of Medicine)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였다. 언뜻 보자면 요즘 어떤 의학도의 프로필인 듯하지만, 그가 유학을 갔다는 1919년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95년 전이다. 그가 유학했다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사진은 시대감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글래스고 대학교 전경
    대학교라고?
    해리포터 속 마법사 학교인줄?
    암튼 분위기 쩐다. / 역사가 장장 573년이다.
    글래스고 대학교 야경

     

    윤치왕은 돌아와 브란스 의전  교수(1927~1944년)와 제2대  세브란스 병원  원장(1938~ 1939년)을 역임했으며, 제1대·2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세브란스의 1대 원장은 올리버 어비슨이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어비슨 가의 3대에 걸친 봉사 - 1대 올리버 어비슨')

     

     

    당시의 남대문 세브란스 병원 (오른쪽 건물) / 명칭이 왜 세브란스인가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자금의 남대문 세브란스 병원

     

    하지만 본래 희망은 의사가 아니었으니 그의 고교시절 희망은 무장독립운동가가 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독립군으로서, 이렇게 마음먹은 이유는 105인 사건으로 제 형 윤치호와 수많은 조선인이 투옥된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12년 수원농고를 중퇴한 그는 신의주, 단동, 북경을 경유해 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애국지사들을 만나 중국 군관학교로의 진로를 모색하였으나, 그중의 한 사람인 신규식으로부터 군관학교에 들어갈 한국인은 많으니 보다 국민에 필요한 의학공부를 하는 편이 좋겠다는 권고를 받고 의학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말한 대로 윤치왕은 의대 졸업 후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일했다. 그러다 귀국 후 산부인과를 맡게 되자 1930년 다시 영국으로 가 명문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의과 대학(College of Medicine) 산부인과학교실의 존스톤 교수 밑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때 동양인인 까닭에 영국인 산모들로부터 수술을 거부당하거나 산파역을 거부당하는 모멸감을 겪기도 한다) 이후 다시 돌아온 후에는 브란스 의전 제2대 산부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교수 재직 중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딘버러 대학 전경
    에딘버러 대학 의학대학 (여긴 분위기가 더 쩐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교토제국대학 / 도쿄제국대학과 1, 2위를 다투는 학교였다.
    윤치왕(1895~1982)의 1929년 사진

     

    윤치왕은 의사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던 바, 1937년에는 (주)남포수산이라는 해산물 가공회사를 세우기도 했으며 부동산 투자와 광산업에도 관여하였다. 하지만 사업 쪽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재산을 전부 말아먹었다. 다만 깨달음은 얻었으니 이후로는 의학에만 매진하여 산부인과학과 마취학, 재활의학, 군(軍)의학 부분에서 업적을 쌓았고, 특히 미군의 선진 마취학을 널리 보급하여 한국전쟁 중 부상당한 UN군과 한국군 치료에 공헌하였던 바, 한국과 미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상이군인을 위한 의지제작창(義肢製作廠)을 건립해 운영하였으며, 1956년 육군중앙병리연구소 시설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관시키는 것을 지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개원에 일익하였다.(앞서 소동이 있었던 바로 그 병원이다) 전후로 육군병원기지사령부 사령관,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육군제2군관구 사령관 등의 고위 군직을 맡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에 공헌해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대한의학협회 회장, 대한결핵협회장, 대한의학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군의관 재직시  계급은 소장까지 올랐다. 

     

    1982년 말 여의도 수정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윤도선(서울대 산부인과의)의 집에서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는데,(향년 87세) 이후 그가 살던 가회동 1-10번지 집은 부근 가회동 1-6번지 윤치창의 집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매입되어 대사관 사택으로 이용되었다. 이 두 집은 1927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던 박인준의 작품이다.

     

    * 시카고학파는 1930년대 시카고를 비롯한 미동부의 고층빌딩 건축붐을 선도한 일단(一團)으로, 선두주자였던 루이스 설리번은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유명한 원칙으로써 기능주의 건축을 선도했다. 마천루와 그 마천루의 외관을 장식했던 커튼월은 시카고학파의 대표적 기능주의적 건축양식이다.

     

    하지만  박인준은 귀국 후 인맥 결핍으로 빌딩은커녕 이러다 할 건축물을 설계하지 못했으니, 윤치왕과 윤치창의 집을 건축한 것도 당시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나온 윤치창이 설계를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윤치호의 집도 1936년 박인준의 작품이었으나 윤치호·윤치창 집은 아쉽게도 남아 있는 사진조차 없는 듯하다. 

     

     

    박인준이 유럽풍으로 설계한 가회동 윤치왕 저택
    북촌로에서 본 윤치왕 저택 / 경쟁자였던 박길룡이 건축회사를 경영하며 다수의 건축물을 양산한 반면 박인준은 소수정예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작품성 있는 건축을 지향했다.

     

    동생인 윤치창(尹致昌, 1900~1973)은 1928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사업가로 성공하였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참여해 군정청 재무부 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전매청장, 중동파견특사, 초대 영국공사와 터키공사를 지낸 적도 있다. 그는 이렇듯 기업가, 정치가, 외교관 등을 두루 섭렵했는데 1962년 도미해서는 주미한인회 뉴욕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에 관해서는 혈연으로 맺은 화려한 인맥이 반드시 거론되는데,(친일이 강조되는, 잘 정리된 가계도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대충 훑자면, 형 윤치호와 윤치왕 외에 윤치영 서울시장,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 독립운동가 손정도, 해군제독 손원일, 쌍용자동차 손명원, 외무부장관 김동조, 현대가의 정주영과 정몽준, 중앙일보 사주 홍석현, 영화배우 남궁원과 그 아들 홍정욱까지 망라된다.  

     

     

    윤씨 가문의 사람들 / 가운데 윤보선 대통령 오른쪽 두 사람이 윤치왕과 윤치창이다.
    윤치창의 가회동 1ㅡ6번지 주택은 2013년 철거된 후 필지분할이 이루어진 듯한데,(화살표 주목)
    최근 이곳이 다시 헐리며 과거의 암문이 드러났다. 뭘까? 단순한 방공호일까?
    가회동의 진짜 옛 골목
    골목에서 만난 김형태 가옥 / 명성황후 생가라고 알려져 있는데,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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