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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계 윤웅렬과 그 아들 윤치호가 살던 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2. 06:15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은 1840년(헌종 6) 아산에서 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취동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웅렬은 후취에게서 난 서자이기는 하나 본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얻은 아들인지라 적자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윤취동의 나이 마흔에 얻은 자식인지라 더욱 애지중지했는데, 연이어 동생 영렬(英烈)이 태어났다 (먼저 말하자면 윤영렬의 손자가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이다)
     
    형제는 의가 좋았고, 또 힘이 좋아서 동네 어깨로 행세하였던 바, 내친김에 둘 다 무과를 보아 입격했다. 윤웅렬은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후 아버지 윤취동이 고종에게 뇌물을 주어 별기군 부교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으니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별기군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는 죽고 윤웅렬은 일본공사 하나부사를 따라 일본으로 피신했다 돌아오게 된다. 
     
     

    평창동 별기군 훈련소 터 표석
    윤웅렬(가운데)과 그의 손자들

     
    윤웅렬은 이와 같은 환경으로 인해 당시의 급변하는 세상에서 일찍 눈 뜬 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881년 어윤중이 파견한 국비유학생에 자신의 똑똑한 서자 윤치호를 끼워 넣어 이상재 · 유길준 · 유정수 등과 함께 도쿄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하게 만들었다. (1883년 4월까지 / 이로써 윤치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된다)
     
    아울러 자신 또한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파에 속해 활동하였으나 정작 1884년 갑신년의 정변에서는 발을 뺐다. 당시 윤웅렬은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함경도 북청군 500명을 이끌고 거사에 참가하기로 돼 있었으나 실패를 예감하고 합류하지 않았다. 약은 구석이 있다기보다는 기회주의자라는 평이 적절할 것 같다. (만일 북청군이 합류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어했던 계동 경우궁의 표석

     
    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처신은 아들 윤치호에게도 이어졌다. 윤치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니, 그는 도쿄 유학시절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의숙에 입학했다. 그리고 1882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교수의 부인인 밀레트(L. G. millett)와 동인사의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로부터 영어를 배워 와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써 귀국했다.
     
    아울러 갑신정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윤치호는 개화파로 분류되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앨런이 세운 상하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 1883년부터 1886년까지 3년 6개월을 수학했다. 이후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명문 사립대 에모리대학에 편입해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2년 간 수학했다. 이렇듯 그는 일·중·미에서 모두 수학한 최고 엘리트였음에도 당대의 조선을 위해 뚜렷한 무엇을 한 것이 없다. 
     
     

    윤치호 (尹致昊, 1865~1945)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에 참가하여(1897년 후반부터) 서재필 ·이상재 ·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었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를 주관하여 자주독립을 외쳤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길을 터준 셈이 되었고, 만민공동회의 성과로써 러시아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의 철수를 이끌어냈지만, 이 역시 일본에 유리한 결과만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그는 일본을 비판하였지만, 일본의 침략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반대의 몸짓을 보여주지 않았던 바, 적극적 친일은 안 했더라도 친일파로 분류됨에 무리가 없다. 까닭에 '애국가'의 작사가임에 분명함에도 쉬쉬 되어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한 구석은 있으니 1906년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세워 지역 교육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학교가 현 인천 신흥동에 있는 송도중학교의 모태로서 여기서 송도는 인천 송도(松島)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의 별칭인 송도(松都)를 지칭함이다. (그래서 교정에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졌다)
     
     

    조금은 신기했던 윤치호 동상

     
    해방 후 그는 친일·반(反)민족주의자로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勅選)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윤치호가 귀족원의원이 된 것은 일제로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 노력은 일체 무시되었던 바, 세상의 지탄에 괴로워하다가 1945년 12월 9일 개성의 자택에서 뇌일혈로 숨졌다.  
     
    기세 좋게 출발한 반민특위는 용두사미가 되었고, 이에 윤치호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1호로 체포됐던 기업가 박흥식과 함께 풀려났는데,(☞ '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 우연찮게도 가회동 주민으로 함께 거주했다. 윤치호와 박흥식의 가회동 집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으며, 이후 박흥식의 집은 현대산업개발 정주영 회장의 저택이 되었다가 다시 매물로 나왔고, 윤치호가 살던 감사원 아래의 전망 좋은 집은 현재 빌라가 들어서 있다. 

     

    가화동 177-1번지 박흥식 주택이 있던 곳
    마치 거대한 성채처럼 보인다.
    건축 당시의 박흥식 주택
    북촌로에서 바라본 윤치호의 집자리
    가회동 1-10의 이 자리에는 1936년 건립된 윤치호 저택이 있었다.
    현재는 가회동빌라가 들어섰다.
    가회동빌라에서 본 남산
    '청린동천'(靑麟洞天) 각자를 볼 수 있는 가회동빌라 맞은편의 옛 북촌마을
    가회동빌라 위쪽 취운정 터 표석 / 1879년대 중반 민대호가 세운 정자와 별서가 있던 곳으로, 1888년 이곳에 유폐된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썼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을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취운정은 본래 감사원 자리에 있었을 것이나 표석은 길가에 놓였다.
    감사원 자리에서 본 백악산

     
    윤치호의 유학기간 동안 아버지 윤웅렬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부대신이 되었다. 이어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이 되었으며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긴 말할 것도 없이 친일파였음이 분명한데, 그가 조성한 부암동 별장 유적이 아직 건재하다. 별장은 구한말 유행한 성홍열(scarletfever)이라는 열병을 피할 목적으로 당시 최고의 도성 밖 경승지로 꼽히던 부암동 깊은 골짜기 조성했다. 과거 안평대군의 별서인 무계정사에서도 한참 위쪽이다. 
     
     

    담장 너머로 본 부암동 반계 윤웅렬의 별서
    늘 꽁꽁 닫혀 있던 윤웅렬 별서의 대문은
    2014년 건축가 김봉렬 교수가 왔을 때 비로소 오픈됐다. / 이 한옥은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은 후 지어졌다.
    안에는 한/양 절충의 이런 집도 있다. / 위의 한옥에 앞서 1905년 6월~1906년 3월 사이 지어진 집이라 한다.
    윤웅렬 별서 앞에서 본 북한산

     
    ※ 윤치호 집 부근에는 윤웅렬의 또 다른 아들인 치왕과 치창의 저택도 있다. 찍어온 사진들을 그들의 일생과 함께 다음회에 포스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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