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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용 생가 터와 별장 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6. 23:40

     
    2년 전 대통령 선거 이후로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과 백현동은 전국민이 모두 다 아는 유명한 동네가 됐다. 작년 11월 말 그 백현동의 한 유치원 앞에 화강암 몸체에 까만 오석(烏石) 명판의 비석 하나가 세워졌다가 5일 만에 철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만고역적 이완용 생가 터에 세워졌던 기념 비석이었는데, 성남시가 백현동 아파트 공사로 생가를 철거한 후 뭔가 허전함에 비석 하나를 세웠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철회했던 것이다.
     
     

    철거되는 이완용 생가 터 비석 (연합뉴스 사진)

     
    성남문화원장 김대진의 이름으로 세워진 가로 75센티미터·세로 112.5센티미터 크기의 이 비석에는 이완용의 친일 행적 등이 425자로 담겨 있었다. 문화원 측은 이완용의 친일 행적을 알려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하고 경각심을 주자는 취지로서 세웠다고 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 해당 비석이 마치 기념비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일며 논란이 점화됐고, 이어 " 세금 들여 매국노 비석을 왜 세우나",(250만원이 소요됐다고 함), "교육으로 알려야지 비석으로 알리냐" 등의 주민 반발이 일자 서둘러 철거되었다.
     
     

    비문의 내용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이완용과 독립협회'에서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6-1에 있는 이 터의 처리를 놓고 성남시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후문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만 나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고언을 하자면 서울시가 사용하는 작은 표석 정도면 족할 듯하다. 비석의 내용은 절대 길 필요가 없다. 주민들의 의견 맞다나 친일의 죄상은 교육으로 알려져야지 표석에 열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차제에, 앞서 쓴 글 중 백현동과 관련된 내용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천하의 매국노로 알려져 있지만 태생으로 따지자면 사실 그는 매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처지였다. 그 태생이 워낙에 미천한 탓이었다. 경기도 광주(지금의 분당) 백현리에서 똥지게 지고 거름 주던 이완용은 나이 열 살 때 32촌 쯤되는 이조판서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호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부잣집이었다. 하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었던 바,(서자 이윤용이 있었으나 서출인 탓에 대를 잇지 못함) 조선의 상속법에 따라 적자 문중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호준의 일가는 대부분 양자로서 대가 이어졌으므로 주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자 계열을 찾다 보니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 6대조에서 갈려나온 32촌 되는 가난한 농부 이호석의 아들 완용에게 기회가 왔던 것이었다. 본시 머리가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줄줄이 누나인 말 많은 집안 분위기에 적응해야 되는 처지이기 때문이었을까. 어린놈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라 입양 후 특별히 일가 눈밖에 나는 법은 없었다.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내뱉던 그의 행동거지는 분명 이 같은 양갓집 분위기가 만든 습관일 것이었다. 
     
     

    철거되기 전 이완용의 생가 터 사진 (출처: 디지털성남문화대전)

     
    다시금 말하지만 이완용은 워낙에 문제적 인물이라 도드라지지 않는 편이 좋다. 엊그제 마지막 남은 시민아파트이자 최초의 시범아파트인 서울 중구 회현제2시민아파트를 다녀오며 만난 이완용의 별장 터 역시 그러하니, (나처럼) 굳이  찾겠다는 사람 외에는 그닥 알려질 필요가 없는 곳이다. 반면 알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는 바, 그들을 위해 몇 자 적고자 한다. 
     
    서울 중구 남창동(퇴계로 6길 36)에는 이완용의 별장이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 지어진 일신감리교회가 있다. 이완용 별장 자리는 본래 백사 이항복(1556~1618)의 별서가 있던 곳으로 그가 심은 두 그루 회나무에 의거해 훗날 쌍회정(雙檜亭)이 지어졌는데, 그 표석이 일신교회 입구 벽에 있다. 이후 쌍회정은 한성판윤 서염순이 단풍나무를 다량 식재하며 홍엽정(紅葉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구한말 이항복의 후손인 영의정 이유원이 사들이며 다시 이름을 쌍회정으로 되돌렸다. 

     

    1901년 한성부 지도 속의 쌍회정(●)

     
    주인도 이항복 → 서염순 → 이유원 → 이완용으로 바뀌었다가 이완용이 죽은 후에는 일본인 무역상 와다 쯔네이치의 소유가 되었다. 쌍회정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934년 발간된 <경성부사>에 아래 쌍회정 사진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존속했던 것 같다.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 따르면 총리대신 이완용은 1908년 3월  쌍회정을 13만 냥에 구입해 총리대신의 관저로 삼았다. 그리고 정부에 구입비용 15만원을 요구해 탁지부로부터 6만원을 받아냈는데, 당시 5냥이 1원이었으므로 최소 2배 이상의 폭리를 취한 셈이었다. 
     
    이완용은 한일합병 후 이 집을 조선상업은행 6대 주주이자 사업가였던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았는데, 와다는 조선의 고미술에 관심이 많은 자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경복궁으로 옮겨온 원공국사승묘탑 등을 제 집 마당에 가져다 놓았다. 그 무렵 홍엽정을 찍은 사진을 보면 원공국사승묘탑 외 여러 승탑과 석탑을 볼 수 있으나 모두 사라지고 원공국사승묘탑만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옮겨져 있다. 
     
    와다는 1928년 죽었지만 승탑은 해방 후까지 그곳에 놓였다가 대한민국 보물 상황을 점검하던 미군정 문화재처에 의해 1948년 서울 성북동 개인 집에서 발견되었다. 와다 가족으로부터 남창동 집을 구입했던 이모라는 한국인이 집을 다시 팔며 승탑을 성북동 제 집으로 옮겨 갔던 것인데, 이를 미군 공병대가 경복궁으로 되돌려 놓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거하며 따라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완용
    와다 쓰네이치
    경성부사에 실린 쌍회정
    홍엽정에 있을 때의 원공국사승묘탑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의 원공국사승묘탑

     
    앞서 말한 대로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 지어진 일신감리교회가 있다. 그리고 뒤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집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향수 비슷한 것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그 비탈의 어디쯤에 한말 이유원이 새겼다는 아래 한시가 적힌 바위가 있었을 것이다. 
     
    排舖小小摠依樣
    摘葉銘庵憶老坡
    從古名園無定主
    主人來少客來多
     
    대강 해석하자면, 
     
    (정원석과 나무를) 본래의 생김새를 따라 아기자기하게 배치해 놓으니 
    엽(葉) 자를 따 암자를 지었다는 소동파가 떠오른다. 
    예로부터 명원(名園)에는 정해진 주인 없다고 해서 인가, 
    주인은 오는 일 적고, 오히려 객(客)들이 많이 찾네.  
     
    쯤이 될 터이나, 이 시가 적힌 바위를 찾을 재간이 있을 턱이 없다. 이에 그저 동네만을 둘러보다 덤으로 중구 소공로 51에 있는 정광필 집터까지 찾아보았다. 정광필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서, 그가 살던 집은 그 후손까지 무려 12명의 정승을 낸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안동김문을 연 그 유명한 김상용·상헌 형제도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의 외손으로써 이곳에서 출생했다. 
     
     

    쌍회정터 표석
    고풍스런 일신감리교회
    표석의 위치
    이곳 쌍회정에 이회영 6형제가 모여 만주행을 결정했다.
    이렇게 뜻 깊은 곳이 이완용 별장이 됐다는 데 더욱 화가 난다. / 남산 이회영기념관 전시물
    또 다른 역사적인 장소 / 남산 이회영기념관 전시물
    위의 장소로 추정되는 곳
    마지막 남은 시민아파트인 회현제2시민아파트
    회현제2시민아파트의 그 유명한 구름다리
    디귿(ㄷ)자 형 구조 가운데의 중정(中庭)도 유명했다.
    주변에서 만난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남산 옛길의 오래된 축대
    축대에 칠을 한 후 남산 옛길 지도를 그려놨다.
    우리은행 건물 마당의 정광필 집터 표석
    우리은행 건물 마당의 500살 넘은 은행나무
    정광필 집 마당에 있었을 이 나무의 수령은 정확히 527살이다.
    명당을 따지자면 정광필 집터 이상은 없을 듯하다. (사진은 남산 한옥마을 에서 가져온 이미지임)

     

    ▼ 관련 글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과 이완용 집의 흔적

    친일파 윤덕영과 이완용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그저 아래 에서 빌려온 사진으로 대신하려 한다. 이 한 장의 사진은 그들이 일제에 얼마나 충성스러웠던 존재인가를 방증한다.

    kibae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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