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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리동(중림동)에 살던 사람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6. 21:42

     

    만리동이라는 명칭은 만리재(萬里재) 혹은 만리현(萬里峴)에서 유래되었다 둘 다 만리고개라는 의미이니 같은 소리인데, 조선 세종 때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최만리(崔萬里)가 이 고개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반대해 신하로써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올린 상소에는 반대의 이유가 분명하다. 대국 중국이 쓰는 문자인 한문을 버리고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은 여진이나 일본 같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니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는 중국에 대해 늘 "쎼쎼"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였던 같다. 이에 세종대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제 나라 문자를 가지면 오랑캐란 말이냐? 나는 백성들이 우리나라 말을 우리 식으로 편히 적게 하려는 것이거늘, 그것이 어찌 오랑캐의 짓이란 말이냐? 이 자를 당장 하옥시켜라!"

     

    하지만 본래 신료들을 아끼는 (나쁘게 말하면, 나쁜 것을 고쳐 등골 빠질 정도로 일을 시키는) 세종이었으므로 최만리를 다시 부제학으로 제수하며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을 해버렸다. 세종은  한동안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비워 두고 사람을 보내 최만리가 돌아오기를 청했으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뼛속까지 사대주의자였던 모양이다. 

     

     

    경복궁 수정전과 경회루 / 수정전이 세종 때의 집현전이다.
    지금의 만리재

     

    홍종우의 유택(幽宅)도 만리재에 있었다. 당시의 지명으로 말하자면 아현리 봉학산 묘지로, 일제강점기 봉학산은 전체가 공동묘지였으나 일제가 일대를 하층 노동자의 거주지로 지정한 후 묘지가 잠식되었는데, 1980년대까지도 이 일대에서는 건축 터파기를 하면 유골이 무더기도 나왔다. 지금의 환일중고등학교 근방에 있었다는 홍종우의 무덤은 만리배수지 자리로 추정되며, 이장공고를 내고도 찾는 이가 없어 훼철되었던 듯하다.

     

    홍종우는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이듬해 과거에서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는데, 황현의 <매천야록>에 당시 사람들이 홍종우를 뽑기 위해 보는 시험이라며 종우과(鍾宇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그는 이른바 왕당파로 활약하며 대한제국을 건립해 고종을 황제에 추대했고('광무'는 홍종우가 만든 연호다)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황권(皇權)을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특히 독립협회에 가혹했던 바, 이승만도 이와 관련돼 붙잡혀 왔다. 그리하여 국사범으로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재판장 홍종우가 태(笞) 100대와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태형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신문과정에서 보인  청년 이승만의 애국충정을 높이 샀던 것인데, 결국 러일전쟁 중 특사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해 1904년 말 태평양을 건넌 이승만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대한제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내친김에 눌러앉아 이듬해 조지 워싱턴 대학에 진학했다.

     

    반면 홍종우는 1903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으니 그해 제주목사로 좌천되었고 이후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고 1913년 음력 1월 2일 죽었다. 그는 일찍이 프랑스에 유학해 넓은 세계관을 지녔다. 그는 한반도를 동양의 발칸반도에 비유할 만큼의 식견을 가졌던 바, 이와 같은 표현을 쓴 자는 당대에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已, 1855~1935/주한 일본공사)와 홍종우 단 두 명뿐이었다. 그의 몰락은 당시의 세도가인 꼴통 민씨 일파와 대립한 결과로서, 결국은 파워게임에서 밀려 사라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만리 배수지에서 본 풍경
    만리 배수지에서 본 풍경
    환일중학교에서 내려본 골목 풍경 / 만만치 않은 높이임을 알 수 있다. 봉학산은 해발 110m이다.
    옛 봉학산 공동묘지의 위치

     

    만리동에는 양정고등보통학교(현 양정고등학교)에 다니던 손기정도 살았다. 1912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1932년 경성에서 열린 제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해 2위를 했다. 내내 1위로 달렸으나 그 바람에 삼각지 부근에서 잠시 길을 잃었고 겨우 경성역(서울역)을 목적지로 하여 다시 뛰어 남대문로를 통해 결승지점인 종로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기를 통해 마라톤 명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만리재 부근에서 하숙을 하며 운동에 전념한 손기정은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신궁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2시간 26분 42초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이 기록은 1947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비공인 기록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魔)의 2시간 30분 벽을 깬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그는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를 비롯한 13개의 대회에 출전해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마라톤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었다. 그에 앞선 선발전에서 손기정은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함께 1, 2위를 차지했다.(1위 남승룡, 2위 손기정, 3위  타마오 시와쿠) 이후 8월 9일 열린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영국의 하퍼가 2시간31분23초2로 은메달을, 남승룡이 2위와 19초 차이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남승룡은 막판 스퍼트로 무려 30명을 추월해 3위로 골인하는 괴력을 보여줬다. 함께 대표팀으로 출전한 일본인 선수 타마오 시와쿠는 완주에 실패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려는 홍보마당 같은 대회였는데, 목적은 차치하고서라도 세심한 운영으로 역대 최고로 성공적인 대회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지막 마라톤 대회의 시상식에는 총통 히틀러가 직접 참석해 시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기다리는 올림픽 스타디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선수는 게르만인도 유럽인도 아닌 동양인 손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야 했기에 3위를 한 남승룡과 함께 오히려 깊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스타디움 본부석의 아돌프 히틀러
    출발 후 올림픽 스타디움을 빠져나가는 모습
    선두를 다투는 손기정과 하퍼
    손기정이 선두로 올라서는 순간
    가장 먼저 스타디움으로 들어온 손기정 / 이 모습을 부감으로 찍은 당시의 동영상 필름을 보면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손기정의 마지막 역주 / 결승선까지의 막판 100m를 12초에 달렸다는 말도 있다.
    시상대의 두 선수 / 승자임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두 선수의 이 같은 슬픔을 당시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달래주었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 대한 보도를 하며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으로, 이것이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이 일과 무관했던 손기정 역시 붙잡혀 가 조사를 받았는데, 얼마나 혹독했던지 담대한 그도 이 일에 대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후 아예 선수 생활을 마감해 버렸다. (해방 후 코치로 변모해 서윤복 등의 선수를 힘들게 양성하는 과정이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보스톤 1947'에 잘 나타나 있다)

     

     

    가슴의 일장기가 지워진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손기정은 금의환향했으나
    곧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투구를 든 손기정 선수가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다. / 손기정 체육공원이 된 구 양정고등학교 내에 세워진 동상이다.
    손기정 기념관 / 구 양정고등학교 본관이 전용됐다. 입구에 커다란 청동두상이 세워졌다.
    손기정 문화도서관 / 구 양정고등학교 교사가 전용됐다.

     

    해방 이후에는 만리재에 정영국이 살았다. 1930년대 후반 경성부의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만리재에는 새로운 주거 단지가 개발되었는데, 이곳에 신흥자본가 정영국이 옮겨왔다. 정영국은 일제강점기 흥국생명을 설립하고, 동명고무(활표 고무신)와 삼정광업(三井鑛業) 등을 운영했다. 정영국은 만리동 고개의 가파른 언덕에 2m 이상의 단을 조성해 평지를 확보한 후 지하 1층(면적 13.22㎡) 지상 1층(면적 125.62㎡)의 남향 기와집을 건축했다.

     

    이후 1949년 건물 서쪽에 62.81㎡ 규모의 지상 2층 목조 함석지붕 건물을 증축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안채·사랑채·곁채·행랑채의 4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영국 가옥은 근자에 뒷길이 확장되며 안마당이 축소·변형되었으나 건축 당시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어 20세기 초기의 전통 건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은 박경재 셰프가 운영하는 '소수헌'이라는 쓰시야로 쓰이며 바로 옆에는 영원무역 빌딩이 우뚝하다.   

     

     

    만리재 언덕의 초기 가옥
    정영국 가옥의 입구 좌측면
    정영국 가옥의 우측면
    정영국 가옥의 내부

     

    21세기 영화 속에서는 피자집 포장 박스를 접던 가난한 가족이 살았다. 이미 만리동은 사라지고 옛 중림동, 만리 1·2동, 아현동 초입의 의주로 2가가 합쳐져 생긴 중림동이라는 동네의 좁은 언덕길, 반지하 집에서 살던 그 집 아들은 어느 날 유학을 앞둔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가야 하므로, 네가 나 대신 내가 가르치던 부잣집 딸네미 영어 과외를 맡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흡사 부적과 같은 돌(수석) 하나도 같이 맡아달라며 건넨다. 그런데 그 돌이 영험했을까?  가난했던 그 가족들에게 돈이 들어온다.  불행과 함께.

     

     

    영화 '기생충의 스틸컷'
    영화 '기생충' 속 그 골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그 아래 '손기정로 1길'에서부터 아현동 가구 거리가 시작된다.


    영화 '기생충'이 나온 지도 벌써 5년이 돼 간다. 그리고 주택지가 형성된 지는 50년도 넘었는데 이번에 비로소 그 일대 10만5천㎡에 대한 재개발이 이루어진다. 이제 위 사진 속의 '기생충 골목'은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소문만이 아니 듯 충정로 전철역 부근의 가로수에도 중림동 재개발조합에서 재개발 동의서를 접수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 안내문에 적힌 '직접설립 추진 준비 원원회'라는 주최는 이 동네의 재개발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거쳐갔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가로수에 붙은 안내문 / 건너편으로 구세군 빌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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