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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로에 남은 박길룡의 건축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7. 31. 06:30

     

    앞서 김동진이라는 건달이 같은 조직원인 이석재에 총을 맞은 종로 3가 단성사(團成社) 극장을 언급하며 당시의 사진을 실었다. 그러면서 "왠지 예술관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말했는데, (☞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진실 III - 동대문사단 이정재') 말이 나온 김에  단성사 극장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목적이 있었으니, 혹시 그 건물이 건축가 박길룡의 작품이 아닐까 해서였다. 어쩌면 박길룡의 작품을 하나 발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지만 기대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1907년 서울의 소상공인 지명근·주수영·박태일 등이 공동 출자하여 세운 상업 영화관 단성사 목조 2층 건물은 설계자가 명시될 정도의 건물이 아닌 듯했는데, 다만 무대 설치와 설비 등의 제작은 진고개 일본인 거류지역에 있던 일본인 전용극장 경성좌(京城座)의 무대디자이너가 맡았다. 첫 건물은 1934년 일본인 건축가 다마타 기쓰지(玉田橘治)가 3층으로 고쳐지었다. 

     

     

    옛 단성사 극장
    1990년 6월 9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장군의 아들' / 당일 오전 첫 상영부터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영화를 보기 위한 행렬이 극장으로부터 종묘까지 이어졌다.
    지금의 단성사 빌딩 /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극장은 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 이곳에서 개봉된 영화 <장군의 아들>을 잊지 못한다. 물론 영화 외적인 추억으로, 위 사진의 장사진 속에는 나와 나의 첫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의 대사 한 줄도 새삼 기억난다. 기억이 맞는다면 종로 오야붕 김기환이 김두한에게 "종로는 조선의 심장이자 조선인의 자존심이다"(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한다)라고 했는데, 왠지 감동스러웠다. 경성에서 태어난 <이조잔영(李朝殘影)>의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글은 이 같은 종로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투영한다. 

     

    경성에 살면서 가지(梶, 소설 속 등장인물)는 여간해서 종로 부근을 걷지 않았다. 그곳은 순수한 조선인 거리로, 혼자 걷고 있으면 왠지 아주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왠지 기분이 나빴다. 

     

    <경성의 건축가들>에서 저자 김소연이 윗글과 함께 소개한 일본인 작가 혼다 야스히루(本田靖春)의 글도 의미 깊다. (그는 경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좁은 구역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조선 아이들과 싸움이 벌어질까 두려워 항상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는 국가 차원의 일로 아이들 세계는 조선인의 천하였다. 우리는 늘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건축가 박길룡은 1898년, 훗날 단성사 극장이 자리하게 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상가·한옥 밀집 지역에서 출생했다. 그는 철저한 흙수저로 태어난 관계로 10살 때부터 일을 해야 했으며 학교도 고학으로 마쳐야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일찌감치 철이 들었고, 또한 명석하고 성실했으니 경성공전(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으로 조선총독부에 취직했다. 그리고 근무 12년 만에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최고기술자인 기사가 되었다.

     

     

    박길룡(朴吉龍, 1898 ~ 1943)
    1995년 8월 15일 철거된 조선총독부 / 철거시 중앙돔에서 상량문이 발견되며 박길용의 건축 참여가 확인됐다. 상량문 53인 가운데의 유일한 조선인이다.

     

    그 어려운 것을 이루었지만 그의 꿈은 안정된 직장인이 아니었다. 박길룡은 기사가 된 지 이틀 후 퇴직을 했다. 그리고 두 달 후 종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업했다. 이 또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사업은 번창했다. 그리하여 주택을 하루에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고, 종로의 앞길 뒷길 어디에서든지 그가 설계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도 했다.  

    그 많은 건물 중에서 대표작을 꼽는다면 단연 종각 사거리에 건립된 화신백화점이다. 본래 그 자리는 1890년대 말, 신태화의 화신상회가 있던 곳으로 그는 한말 원세개(위안스카이)의 비호 아래 세력을 넓힌 남대문의 중국 상인들이 종로까지 밀려들 때 전래의 육의전 상권을 방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화신상회는 1929년 제지상(종이장수) 박흥식에게 인수된 후 조선 최초의 백화점으로 크게 번창했으나 1935년 1월 27일 화재가 일어나 건물 두 동이 모두 전소되었다. (☞ '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

     

    박흥식은 대규모 신축을 결심하고 새로운 백화점의 설계와 건축을 박길룡에게 맡겼다. 이에 길룡은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을 걸고 백화점 신축에 매달렸는데, 1937년 11월, 드디어 지하 1층, 지상 6층, 총 건평 3011평의 새 백화점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내부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구비되었고 외관 꼭대기에는 19미터 길이의 전광판(일루미네이션)이 설치돼 준공되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완공된 화신백화점과 박흥식
    이 건물은 1980년대까지 존재했다.

     

    이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신백화점에 가 보았느냐"가 인사말이 되었고 수학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었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이 시간당 4000명씩 몰려들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아침에 가야 저녁에 탈 수 있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화강석으로 마감한 1층 쇼윈도 앞은 늘 구경꾼들로 북적댔고, 이 화려한 건물 안에는 대식당과 그랜드 홀, 상설화랑, 사진관과 미용실, 스포츠 시설이 있었다.

     

    이후 화신백화점은 혼마찌에 세워진 미츠코시, 하라타, 죠지야, 미나카이 등의 일본인 백화점과 싸우면 종로의 상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하지만 화신백화점은 해방 후 박흥식의 몰락과 더불어 쇠퇴했고, 1987년 철거되었다. 앞서 '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에서도 말한 대로 이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박길용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러 가지 상징성을 지닌다. 그래서 뭔가 역사성이 기록됐으면 했지만 결국은 아무 흔적도 남은 것이 없다. 대신 이 자리에는 1999년 '종로타워'라는 건축물이 들어섰다. 지하 6층, 지상 33층, 133미터인 건물의 외관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국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마디로 말해  흉물스럽다.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은 "이것은 고도(古都) 서울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개인적 생각을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낯설고, 오래된 길 종로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미적으로도 꼴사납다. 무엇보다 국초(國初)의 정도전이 설계한 직교상 거리의 질서를 파괴하는 삐딱한 형태로 앉아 있는 것이 거슬린다. 심하게 말하자면 조선 600년의 질서를 낯선 문외한 건축가가 한 방에 파괴시켜버린 것이다.  

     

     

    화신백화점과 종로타워를 오버랩시킨 사진 / 최소한 화신백화점 1층 입구와 화강암 로비라도 재현시켰으면 어땠을까...?
    종로타워는 7월 SK그룹이 인수하며 4번째 주인이 되었다. / 삼성그룹이 유통업 진출을 노려 지은 이 건물은 계혹이 무산되며 용도가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세청, 일반 오피스빌 등으로 임대되어 쓰이다 2016년 이지스자산운용의 부동산 펀드에 3840억원에 매각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2019년 KB자산운용에 이 건물을 4640억원에 되팔았다. 이번에 SK그룹이 매입한 금액은 약 6000억원 정도일 것이라 한다.

     

    길룡은 광복 전인 1943년,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타계했다.  그가 몸담았던 '조선건축회'는 건축전문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5월호에 박길룡 특집 기사를 냈는데, 한 일본인 건축가는 "반도 출신의 훌륭한 건축가로서 유일무이의 고봉(高峰)"이라고 상찬했다.

     

    (내가 아는 한) 종로통에는 그가 지은 건물이 2개 남아 있다.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지어져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쓰이다 지금은 '예술가의 집'이 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안의 건물이 그것이고, '민가다헌'이라는 식당으로 쓰였던 종로구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 그것이다. 1930년대에 박길룡이 설계한 대표적인 개량한옥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부분 서양주택의 요소가 눈에 띈다. 그 밖의 대표작은 아래와 같다. 

     

     

    '예술가의 집'
    지금도 용도가 감이 안 잡히는 건물이다.
    민병옥 가옥
    1930년 친일파 민영휘의 자식인 민대식이 두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지은 집 중의 한 채이다.
    이쪽이 뒷편으로 ㄷ자 형 건물이 아니라 H자 형 건물이다. 오른쪽의 큰 방을 응접실로 꾸몄고 현관 마루를 통해 건너방과 연결되는데, 실내에 둔 화장실 목욕탕 주방 역시 현관 마루를 통해 연결된다. 겉은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구식으로 설계한 것이다.
    민병옥 가옥 안내문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본래 친일파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훗날 박노수 화백의 화실이 되었다가 지금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되었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건물이다.
    월계동 각심재 / 민대식이 아들 민병완을 위해 지은 집으로, 원래는 경운동 민병옥 가옥 근방에 있었으나 1994년 도시계힉에 밀려 이곳으로 이축됐다.
    또 다른 대표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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