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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5. 04:31
위의 사진은 낯설 수도 낯익을 수도 있다. 정체부터 밝히자면 서울 종각 사거리로 정면에 있는 건물은 화신백화점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한옥건물은 보신각이다. 앞서 말한 대로 보신각은 1979년에 재건되었으므로 이 사진은 최소한 1979년 이후 1980년대의 사진이다. 놀랍게도 화신백화점 건물은 이후로도 근 10년을 건재하다 1987년 철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5년 전의 일로, 일제시대 세워진 이 건물은 의외로 오랫동안 존속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건 아마도 신신백화점에 교련복을 사러 갔을 때일 것이다. 그때는 고등학교에 교련이라는 군사 과목이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교련복이라고 하는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해야 했는데, 교련복에 관한 추억은 지금도 많은 분이 공유하고 있으리라 본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교복과 교련복, 교모, 체육복, 학교 배지 등을 신신백화점 '○○사'라는 곳에서 구입하라는 용지가 금액과 함께 배부되었기에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고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와 맞은편에 있는 화신백화점에 들렀었다.
그때 화신백화점에서 무언가를 샀을 것이다. 또 신신백화점에서도 교련복 외에 다른 옷도 구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 산 교련복만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1년 남짓한 시간에 옷의 얼룩무늬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빨래하면서 탈색되기도 하고 햇빛에 바랬기도 했겠는데, 아무튼 1년 만에 교련복인지 누런 마대로 만든 사복인지 (혹은 넝마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평화시장 등에서 구입한 일부 현명한 학생들의 교련복은 탈색이 미미하거나 전혀 없는 여전한 새 옷이었다. 이에 웬만한 사람은 다 학교 측과 '○○사'와의 야합을 눈치챘지만 그때는 이미 졸업을 하고 사회 물을 먹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화신백화점이 생각이 난 건 앞서 포스팅한 '한국의 종이와 조지서' 때문이다. 그 글에서 구한말의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관청)를 촬영한 하야시 부이치의 《조선국진경》(1892년) 사진과 함께, "조지서는 조선 정부의 국영 사업으로서 예로부터 제지업이 있었다고 한다. 종이 질이 질기고 아름다워 관민이 모두 사용한다"는 그의 설명을 함께 실었다. 그리고 또,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만을 좇고 이용후생의 산업을 천시한 결과 조선의 질 좋은 종이는 사라지고, 서적 제작용 종이는 값싼 양지(洋紙, 서양종이)와 왜지(倭紙, 일본종이)로 대체되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산업의 천시는 결국 망국에 이르는 길이 됐다고 했다. 한일합병 후에는 당연히 조선의 제지는 생산이 되지 않았고 일본의 화양지가 전부였는데, 평안도 용강에서 상경한 박흥식이라는 청년 사업가가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입구)에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를 차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고향인 용강에서 쌀장사로 돈을 벌은 그가 서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는데, 신용과 납기를 철저히 지키고 경품을 내거는 등의 마케팅을 통해 영역을 넓히는 듯하더니 이윽고 대규모 백양지를 필요로 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까지 거래선으로 삼았다.이렇게 되자 일본인 제지상인들이 긴장했다. 처음에는 좋아라 하던 오오지제지(王子製紙)를 비롯한 일본 공급처들도 더 이상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흥식은 세계 최고의 펄프 제조국인 스웨덴과 직접 접촉했다. 일본의 서전(瑞典, 스웨덴) 대사관 대사는 종이를 구매하고 싶다는 박흥식의 편지에 뛸 듯이 기뻐하며 유명 스웨덴 제지회사와의 접촉을 알선하였다. 이렇게 들여온 스웨덴 종이는 일본의 화양지보다 품질과 가격면에서 모두 월등했다. 이에 박흥식은 예전보다 더욱 싼값에 종이를 공급할 수 있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물론 일본의 여러 지방 신문사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1930년 초에 이르러 박흥식은 1,000여 곳의 거래처를 가진 동아시아 최고의 제지상이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7살이었다. 재력이 풍부해진 그는 조선 유통업계의 거상인 화신상회 신태화(申泰和)에 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신태화는 이후 다른 사업에 투자하였다가 실패하여 변제를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박흥식에게 화신상회의 매입을 권했다. 이에 빚 탕감과 함께 36만원을 지불하고 화신상회를 인수한 박흥식은 1931년 9월 15일 자본금 백만원 규모의 (주)화신상회를 세우며 유통업에 뛰어들게 된다.
신태화의 화신상회는 1890년대 말, 한양의 전통 상권인 운종가(雲從街, 종로) 선전(縇廛, 비단가게)자리에 설립한 상회로, 그는 한말 원세개(위안스카이)의 비호 아래 세력을 넓힌 남대문의 중국 상인들이 운종가까지 밀려올 때 민족 상권을 방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중국 상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선전을 인수해 비단과 함께 금·은·귀금속품을 취급하다 1922년 양복부를, 그다음 해에 일반잡화부를 증설해 조선 최초로 백화점의 형태를 갖추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의 여파에 휘청한 후 연이은 투자 실패로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매입한 후 1931년 3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하여 규모를 키웠다. 그는 본정통(혼마치) 일본인 가게들이 영업이 잘되는 이유를 살핀 후, 그것이 일본인들의 친절한 상술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라면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간이라도 내줄 듯 친절하게 굴었고, 그리하여 돈을 쓰게 만들었다. 반면 조선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어디든, 사려면 사고 안 사려면 말라는 식이었다.
박흥식은 이런 식의 장사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고 여겼던 바, 일본인의 영업방식을 배우기 위해 직접 동경에 가 머무르며 미츠코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백화점을 섭렵했다. 그는 귀국 후 직원들에게 지금까지의 전근대적인 판매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으며, 내부 기구도 서구식으로 변경해 영업과·서무과·사입과(仕入課) 등을 두고 혁신적인 판매 사업을 도모했다. 그는 이와 같은 운영이 효과를 보자 이듬해인 1932년 7월 16일 옆에 세워진 동아백화점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였다.
1934년 6월에는 연쇄점과를 신설하여 요즘의 편의점과 같은 사업을 펼쳤다. 즉 5개 대도시에 배급소를 설치하여 전국 350개소의 연쇄점을 모집·개점시켰고, 상품의 복잡한 유통과정을 단순화시켜 생산공장에서 대량구입하여 직접 소매상에 공급하는 방식으로써 운영해나갔다. 그는 화신상회의 운영과 가맹점에의 공급을 위해 대일본제당(大日本製糖) 후지야마 사장, 메이지제과 소마 사장, 아지노모토 스즈키 사장 등을 만나 직접 납품 계약을 맺었는데, 그때 나이 29살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1935년 1월 27일 화재가 일어나 화신백화점 건물 두 동을 모두 태우며 50만원의 손해가 발생했다. 장안이 온통 이 이야기로 떠들어 댄 대화재였다. 하지만 박흥식은 이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니 이튿날의 중역회의에서 초현대적인 백화점 신축을 결정하고, 한편으로는 명월관에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를 독대해 화재를 조기 진압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근의 옛 종로서 건물(경찰서 부속 시설이 있던)을 임대해 단 일주일 만에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고 총독부로부터는 백화점 신축자금까지 지원받았다.
1937년 11월, 드디어 지하 1층, 지상 6층, 총 건평 3011평의 새 백화점 건물이 준공되었다.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내부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구비되었고 외관 꼭대기에는 19m 길이의 전광판(일루미네이션)이 설치돼 준공되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이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신백화점에 가 보았느냐"가 인사말이 되었고 수학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었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이 시간당 4000명씩 몰려들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아침에 가야 저녁에 탈 수 있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성업 위에 박흥식은 더욱 사업을 확장시켜 1937년 12월 평양백화점을 인수하여 화신평양지점을 개점하였으며, 1938년에는 진남포지점을 개점하였다. 즈음하여 그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여 (주)경성방적, (주)북선제지화학 (주)조선석유 등의 이사가 되기도 했는데, 1944년 2월, 전투기 제조를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자금 지원 하에 건립한 (주)조선비행기공업은 한국의 미쯔비시 산업을 지향했으나 이듬해 해방이 되며 오히려 그를 옥죄는 형국이 됐다.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 1호로 체포되었다. 그가 친일행위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주)조선비행기공업을 세워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일이 문제시됐다. 이 일은 박흥식 인생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흐지부지 되는 통에 그는 다시 재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오히려 운신의 범위가 넓어졌으니 1950년 타결된 한일무역협정 사절단이 되기도 했고, 한국전쟁 후인 1955년 화신백화점 맞은편에 신신백화점을 신축하고, 1956년 화신백화점을 재개장하며 유통업 재개에 발동을 걸었다. 하지만 전후(戰後) 경기의 부진으로 고전했다. (이후 일반인에게 임대운영되다 1967년 결국 (주)신생에 인수됐다)
이에 그는 방향을 전환하여 1957년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려 했으나 시기상조로 무산됐고, 5.16 군사정부와는 남서울 개발계획안이라는 것을 가지고 작금의 강남개발에 앞서는 플랜을 설계했으나 그 역시 너무 앞서간 탓에 무산되었다. 그가 남서울 개발계획안과 함께 마련한 인천 송도 종합개발계획안이 지금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 그가 남다른 예지력을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1968년 외채를 끌어 설립한 흥한화섬(원진레이온), 화신레나운 같은 화학섬유공장이 60년대 한국산업을 선도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전기·전자사업의 발흥을 지향하여 건립한 화신산업(아남정밀)이 1980년 부도가 나며 박흥식의 사업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데, 게다가 1988년 파킨슨 병이 발병하였고, 1991년에는 알츠하이머성 치매까지 와 재기 불능에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결국 1994년 5월 10일 병이 깊어져 사망했는데, 이후 지금까지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논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노골적인 친일행위는 다 알려져 있음에도 민족자본의 형성과 전후 경제발전에 일익을 했다는 이유로 상쇄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의 친일의 죄는 그야말로 지대하여 공과상반될 수 없으나, 다만 아래의 점들은 인정해줄 만하다.
●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점.
● 도산 안창호가 일경에 체포, 구속되자 우가키 일본 총독에게 직소하여 병보석으로 석방시키고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한 점.
● 반민특위가 가장 앞세운 박흥식의 친일행위가 (주)조선비행기공업 설립 및 비행기 헌납이었으나, 이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 어쩔 수 없었고, 그러면서 비행기 공장에 한국인들을 취업시켜 징용 면제를 받게 해 주었으며, 자신의 계열사에 지식인들과 민족진영 인사들의 자식들을 다수 취직시켰다. (이는 강요나 청탁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는 경성제대를 나와도 취직이 힘들 만큼 경기가 나빴다)
여담을 하나 덧붙이자면 그는 화신산업의 부채 청산을 위해 57년간 살던 가회동 대저택을 팔아 화제가 되었는데, 그 집은 돌아 돌아 나중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저택이 됐고, 화신백화점 부지는 돌아 돌아 삼성그룹의 소유가 되어 1999년 종로타워가 완공되었다. 당시 유통업 진입을 노리던 이건희 회장이 역사성 깊은 이 장소를 매입한 것인데 정작 유통사업은 성사되지 못해 국세청에 장기 임대되었다가 지금은 삼성증권 및 서점, 기타 여러 성격의 회사가 들어선 평범한 오피스 빌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하 6층 지상 33층의 이 건물의 외관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국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가 설계한 이 건물은 조선시대부터 직교상 거리였던 운종가의 형태에 반(反)에 비딱하게 자리한 데다 유선형 건물 형태 및 UFO와도 흡사한 꼭대기의 탑 클라우드(Top Cloud) 스타일은 그 생뚱맞음에 오랫동안 구설에 시달렸다. 개인적 생각을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낯설고, 오래된 길 종로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미적으로도 꼴사납다.
안타까운 것은 일제시대 미츠코시, 하라타, 죠오지야, 미나카이 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과 싸우던 유일한 민족 백화점이었던 '화신'의 상징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니, 이제는 그것을 되살릴 방법도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화신백화점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박길용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러 가지 상징성을 지닌다. 그래서 뭔가 역사성이 기록됐으면 했지만 결국은 아무 흔적도 남은 것이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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