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황금정을 사른 서른다섯 불꽃의 삶 나석주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30. 22:38

     

    2019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두고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신용하와 경제사학자인 이영훈(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이 크게 충돌한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영훈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펴내면서, 그 내용 중에 신 교수를 거론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용훈은 당시 "신용하라는 학자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일선 군청이나 법원에 있는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를 열람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그 일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싸움의 불씨를 지폈다. 

     

     <반일 종족주의>는 2019년 7월 미래사에서 출판한 역사학 서적으로, 이영훈, 주익종, 김낙년 교수 공저로 집필한 책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책은 일본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이른바 반일 종족주의)에 저항하여 나름대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코자 쓴 것으로, 당시 한국사회에 등장한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확산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였다. 내용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설, 일본군 위안부, 한일 청구권 협정  등의 첨예한 내용에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른 주장을 담았다. 책은 10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반일 종족주의>는 2019년 11월에는 일본판이 출간되어 2주일 만에 30만 부를 인쇄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사진의 인물이 이영훈이다.

     

    * 이 책은 프롤로그부터 도발적으로, 그 제목은 '거짓말의 나라'이다. 저자는 거짓말하는 버릇을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종족적 특성'이라고 간주한다. 저자는 그 근거로서 한국인의 위증죄 통계, 무고 건수, 1인당 민사소송 건수 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정치, 학문, 사법 등에도 거짓말의 문화가 만연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의 저변에는 물질주의와 샤머니즘이 있는데, 이런 구조 하에서는 선(善)한 민족주의가 형성되기는 힘들고 단지 악(惡)한  종족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주장에 신용하 교수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는 본래부터 한 성깔했으니 과거 유수의 학술대회에서 일본학자들과 독도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하다 분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도 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참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 이영훈의 주장에 '민족에 대한 패륜적 행위'라는 발언까지 해가며 상대를 비난했다. 그리고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을 출간해 대응했다.

     

     

    위의 책에 맞불을 놓은 <일제 조선토지조사사업 수탈성의 진실>

     

    * 저자 신용하는 일부 정신 나간 학자들이 자신의 토지조사사업 연구를 폄훼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데 맞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이 책을 썼다고 했다. 2019년 10월 (주)나남에서 출간했다. 

     

    신 교수는 1918년 말을 기준으로 총독부가 농경지 27만 정보(町步), 임야 955만 정보, 기타 국유지 137만 정보 등 국토 총면적의 50.4%(1120만 정보)를 수탈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 국토의 50.4%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의 토지를 어떠한 대가 지불도 없이 식민지 통치 권력으로 약탈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 전 교수는 "(1960년대 교과서에 기술된 것처럼) 토지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는 학설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부 토지의 소유권 분쟁이 있었지만 전국 487만㏊ 가운데 12만㏊에 불과한 4%의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이었다"는 것이 이 전 교수의 입장이다.

     

    이 상반된 입장에서 나는 신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정확한 역사적 자료와 데이터에 의한 분석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신용하 교수의 역사 주장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까닭이며, 한편으로의 어느 정도의 근거도 가지고 있으니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도(牛島) 김진사'에서 말한 적도 있다.

     

    즉, '땅문서'와 '마지기'로 대변되던 조선의 토지 개념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등기부'와 '평(坪)'으로 바꾸었다. 이때 등기하는 법을 모르거나 (문맹 등으로 인해) 조상 대대로 농사져온 땅을 따로 등록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등기를 소홀히 한 사람, 기타 황무지 등을 개간해 원(原) 소유자에 대한 근거가 미약한 사람들은 모두 땅을 빼앗겼다. '평'은 이후 무려 100년간 사용되다 21세기 들어 ㎡로 바뀌었다. 

     

    * 모든 주장에는 타당한 근거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 근거에 있어 신용하 교수 쪽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앞서 말했듯 신용하 교수의 여러 주장에 대해 과거부터 믿음을 느껴온 이유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조국 전 교수가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정치의 도구로써 조장했던 '무조건 반일하자'는 식의 주장은 질색이다.

     

    한국의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배상 판결 결과에 일본이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를 무기로 응전에 나섰을 때, 사정이 이런 데 반일하지 않으면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글을 페이스 북에 올리며 연일 반일 감정을 조장하던, 그리하여 국민불매운동 같은 것을 이끌어내며  '죽창가', '이적', '친일파' 등을 외치던 조국 청와대 수석을 보며 참으로 한심스러웠던 때가 있다.

     

    내가  신용하 교수의 글을 지지하는 이유로써 또 한 가지 들고 싶은 것이 1926년 12월 26일에 일어난 나석주 의사의 황금정(黃金町) 의거이다. 황금정은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위치했던 일본인의 금융가로 '돈의 거리'라는 뜻의 고가네쬬(黄金町, こがねちょう)라 명명됐다. 이 금융가에 자본은 거의가 조선 토지 수탈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나석주 의사가 황금정의 식산은행(植産銀行)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총을 난사한 이유는 특히 그 두 곳이 조선 토지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중국에서 그 두 곳을 노리고 건너왔고, 목적을 실행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 투쟁사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봉관 교수(국문학)의 글을 근거로 재구성해 보았다.  

     

    나석주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으로, 그의 가족은 그곳에서 대를 이어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1908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 소유권이 동척(東拓, 동양척식주식회사)으로 넘어갔다. 나석주와 그의 가족은 무려 125년간이나 농사지었던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는데, 동척은 이듬해 소작료를 생산량의 50%로 대폭 인상했다.

     

    뿐만 아니라 동척의 소작 조건은 매우 가혹해서 흉년이라도 들면 소작료는 50%를 넘어 70~80%로 뛰기 일쑤였다. 또한 3년마다 소작권을 갱신토록 하였던 바, 소작료를 미루거나 다른 소작인에 비해 작황이 떨어지면 소작권마저 빼앗겼다. 그리고 그것은 기간 전이라도 가차 없이 집행되었다. 나석주는 재령군사무소에 가서 이를 강력히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격분한 나석주는 농부를 그만두고 해주에서 김덕영, 최호준 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들 조직원들을 이끌고 무장투쟁과 의적질(일본인 부호의 돈을 뺏아 해외독립단체에 전달)을 했는데, 그중에서는 황해도 평산의 경찰 주재소를 습격, 경찰관과 면장을 사살한 전과가 있었다.

     

    그리고 안악군의 친일파 부호를 살해하고 금품을 뺏은 뒤 도주한 일도 있는데, 1920년 이에 대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그는 북간도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무력으로 빼앗긴 조국을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것이 애오라지 그의 생각이었다. 

     

     

    나석주(羅錫疇, 1892~ 1926)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는 총독부 사진 / 1918년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추록>
    동양척식주식회사 /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아 갈 목적으로 설랍한 기관으로 조선 농토의 3분의 1 이상을 소유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자리했던 을지로 하나금융그룹 본사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요원들을 경호하던 그는 1926년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일제 토지수탈의 첨병 식산은행과 동척을 폭파하기 위해 의열단 간부 유자명(柳子明)을 통해 무기를 구입한 후, 마충더(馬中德)라는 이름의 중국인으로 변장해 산동반도 위해(威海)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잠입한다.

     

    그가 조선으로 온 데는, 일제의 수탈과 가뭄으로 인해 고향 재령에서 유혈 집단시위가 벌어졌다는소식을 듣게 된 점도 있었다. 이에 나석주는 기아에 시달린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건넬 요량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뵙자는 생각도 간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마침 그때 사망한 다이쇼 일왕으로 인해 경계가 삼엄하자 고향으로 갈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경성으로 와 12월 28일, 중국인이 운영하던 남대문 근방의 동춘잔(同春棧) 여관에 투숙한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 그는 다음날 여관을 나와 근방의 중국인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그리고는 곧장 황금정의 동척 사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중국인 복장으로 회사 관계자를 만나로 온 척 입장하려던 그는 수위에게 제지당하고 일단 그곳을 물러나야 했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목표인 남대문통 2정목의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다. 실내가 손님과 직원들로 붐비는 가운데, 폭탄은 철장 가림막을 넘어 대부계의 벽을 맞고 정확히 안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폭탄은 불발했다. (이에 직원들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가 나중에 폭탄임을 알고 경찰서에 알린다) 

     

     

    식산은행 / 조선식산은행은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을 비롯한 6개의 농공은행(農工銀行)을 통합하는 형태로 1918년 10월 1일 창립되었다.

     

    폭탄이 불발하자 그는 다시 동척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 그를 제지하던 일본인 수위는 그새 자리를 비워 보이지 않았고, 수위실 안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 기자 다카키(高木吉江)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낯선 중국인 복장의 사내를 훑었다. 그리고는 "뭐요, 당신?"이라는 짧은 질문을 채 맺기도 전,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다카키를 쏘고 현관 출입구를 열고 들어간 나석주는 곧장 2층으로 오르다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동척 직원 다케지(武智光)와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두 발의 총탄이 다케치의 가슴을 향했다. 다케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석주는 눈앞에 보이는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맞은편 책상 의자에 앉은 과장 아야타 유타카(綾田豊)의 가슴에도 두 발을 쏘아 명중시키고, 이어 과장 차석 오모리(大森太四郞)를 쏘았으나 총알이 그가 숨은 회의 탁자 다리를 맞추며 불발됐다. 두 번째 총알은 탄창이 비어 발사되지 못했다.

     

    그 틈을 이용해 오모리는 재빨리 달아났으나 곧 뒤에서 날아든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나석주는 그다음 사무실인 '토지개량부 기술과’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권총을 난사하고는 폭탄을 투척한 후 계단 아래로 튀었다. 앞선 총성에 직원들이 이미 책상 밑으로 숨은지라 죽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에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폭탄이 폭발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치 않으나 웨이하이웨이에서 배를 기다리며 지하실에서 머물 때 그곳의 습기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폭탄의 불발에 한없이 실망했을 나석주의 분풀이 상대가 된 사람은 동척 사옥 옆 조선철도주식회사의 수위 마쓰모토(松本筆一)와, 외상 대금을 받으러 왔던 시계포 점원 기무라(木村悅造)였다. 아울러 마침 외근을 나왔던 경기도 경찰부 소속 다바타(田畑唯次) 경부보(경위)가 미처 총을 뽑을 새도 없이 괴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이후 나석주가 전차길을 뛰어 건너려는 순간, 뒤쪽에서 총성과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제보를 받고 출동한 혼마찌(本町) 경찰서의 도시(士師), 요코타(構田), 노구치(野口), 아오키(靑木), 후루카와(古川), 박용하 순사가 출동했던 것이다. 그들은 총을 쏘아대며 나석주를 추격했고 그도 잠시 뒤를 돌아 응사하였는데, 빗발치는 총탄 속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황금정 2정목 삼성당 약국 앞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황금정에서는 곧바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는 동안 경찰 병력이 충원되었고 나석주는 포위당했다. 그러던 중 잠시 소강상태가 있었고, 그 틈에  경찰 중의 한 명이 포위된 사실을 외치며 투항을 종용했다. 그 순간 대답 대신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총알이 날아들었고, 다시 총격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전봇대에 기대 총을 쏘던 나석주가 검붉은 피를 쏟으며 모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경찰들이 달려드는 순간, 쓰러진 그가 다시 그들을 향해 2발의 총알을 쏘았다. 이에 경찰들이 놀라 엎드렸고, 쓰러졌던 나석주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짜내 외쳤다.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이렇게 외친 나석주는 이번에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세 방의 총을 쐈다. 약 40분에 걸친 거리의 총격전은 그렇게 끝이 났고, 경찰은 의식불명의, 그러나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피투성이의 그를 차에 실어 총독부병원으로 옮겼다. 나석주는 병원에서 의사의 켐퍼 주사를 맞고 잠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신분과 소속. 공범 여부를 묻는 경찰에게  "나는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이며, 공범은 없다"라고 답하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그로부터 약 4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서 온 부모에게 인계되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 봉분 없는 평장으로 묻혔다.

     

     

    나석주가 숨진 총독부병원

    나석주의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기사 / 「백주(白晝) 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동척(東拓)과 식은(殖銀)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여 일거에 7명 저격」, 「작년 12월 28일 오후 2시 황금정의 일대 참극」, 「탈출한 범인은 길 위에서 자살」 등의 기사 제목이 보이며 나석주의 얼굴 및 현장 사진, 그리고 현장을 그린 지도가 보인다. 내용을 보면 '피해자들 모두가 총알을 두 방 혹은 세 방씩 맞았는데, 가슴이나 머리에 모두 명중되었으므로 그는 사격의 명수임이 분명하다'며 정확한 사격술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의 동척 사진
    나석주가 총격전이 벌인 장소에는 시민 휴식 공간과 그의 동상이 마련됐다.
    그때의 모습 / 1927년 1월 14일 나석주가 총격전을 벌인 황금정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 웅성대고 있다.
    하나금융그룹 건물 부근의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
    의거의 목적과 개관을 새긴 동판
    의거 기념터 표석 곁에 위치한 나석주 동상 /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19년 공개된 나석주 의사의 친필 유묵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