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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산 남이장군 사당과 새남터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6. 25. 16:47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    훗날 그 누가 대장부라 칭하겠는가.

     

     ㅡ 남이(南怡) 장군의 북정가(北征歌) 

     

     

    앞서 가평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 무덤은 친일파 민영휘의 직계 후손이 장사속으로 조성한 가짜 무덤이고 진짜 무덤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 I ㅡ민영휘 저택') 부언하자면, 주변에 남생이가 많아 남(생)이 섬의 이름을 얻게 된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주인 모르는 돌무더기 묘가 하나 존재했는데, 그것이 남이섬의 이름과 합체되며 남이장군의 무덤이 된 것일 뿐, 실제 남이장군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야산의 진짜 남이장군 묘 / 부부 쌍분으로 부인 권씨는 유명한 권세가 권람의 딸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 경기문화재연구원 사진)

     

    그럼에도 가평 남이섬은 늘 북적이는 사람들로 인해 그곳의 가짜 무덤은 진짜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도 무리가 아닐 것이 주변에 유명한 남이장군의 윗 시를 새긴 커다란 돌이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신도비와 비슷한 모양새의 추모비도 있는 까닭인데, 봉분 주위로는 문인석 ·촛대석 · 혼유석을 일습으로 갖췄다. 이러니 누가 봐도 남이장군의 무덤이 아닐 수 없는데, 게다가 추모비의 글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것이요,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것이다. (이쯤되면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다)

     

     

    "남이장군의 묘는 '남이섬'에 없다" / 이 제목을 단 오마이뉴스 기사 속의 남이섬 남이장군 무덤 사진

     

    이곳의 가짜 남이장군 묘 만들기 사업(?)은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가 1965년부터 이룩해 온 업적으로, 나라 팔아먹은 민영휘의 손자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노력이 빛을 발해 드디어 사람들에게 그 가짜 무덤을 진짜라고 믿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짜 역사와  드라마 '겨울연가'의 인기에 편승한 남이섬은 이후 데이트족의 성지(聖地)가 되어 외국에서까지 관광객이 밀려오는 지경인데, 현재 민영휘의 직계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남이섬은 2019년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친일재산이 아니라는 최종판결까지 받아내는 겹경사를 맞기도 했다. 

     

    * 2005년 제정된 친일파재산환수법으로 민영휘가 남긴 재산 중 257억이 국가로 환수되자(2007년) 그의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1492(451)의 강남 세곡동 땅 반환 소송은 패했으나(2020년)  다른 후손이 제기한 남이섬 소송건에서는 승소했다.  

     

    이렇게 보자면 서울 용산구 용문동 고개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도 진실 여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당은 남이장군 사당 정거장에 내리면 곧 찾을 수 있다)  남이장군과 용문동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당시로는) 이 궁벽한 곳에 그의 사당을 지은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 것이니, 이것은 용산구에 산재한 많은 신당(神堂)과 맞물리며 의심을 증폭시킨다. 이것도 역사성 없는 그저 무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용산구 내 부군당(신당) 분포현황 / 용산역사박물관 전시자료
    이태원 부군당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문헌의 증빙은 없지만, 용산의 남이장군 사당은 그가 신원된 1818년* 이전부터 원효 2가 거제산에 용문사(龍門祠)라는 이름으로 위치했으며, 이후 약 300년 간 존속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그 일대가 1904년 철도부설 등으로 시끄러워지자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민간에서 제사를 올려왔다고 한다.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지내 지던 당굿은 1972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1982년 경희대 김태곤 교수의 조사보고에 의해 복원작업이 착수되어 1983년부터 남이장군 당제 행사가 음력 10월 1일에 거행되고 있다.

     

    * 남이는 죽은 뒤 약 400년이 지난 순조 18년,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역모의 혐의로써 같이 참형에 처해진 강순(康純)과 함께 신원되었다. 

     

     

    충무사(忠武祠) 현판이 걸린 남이장군 사당의 문
    문 틈으로 본 남이장군 사당
    사당 입구의 남이장군 추모비
    남이장군 당제 행사 모습 / 용산구청 제공사진
    남이장군(1443~1468) / 사당에 모셔진 영정으로 1935년 제작되었다.

     

    남이장군 사당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니, 그가  처형당한 곳이 한강변 새남터이기 때문이다. 상기하자면, 남이장군은 조선조 세조 때의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의령남씨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1457년(세조 3) 약관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일어난 함경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고, 세종 때 설치한 국경 진지 4군의 입지를 공고히 다짐과 함께 압록강 너머의 건주여진을 공격, 여진족 추장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였다. 아울러 두만강  6진의 입지 또한 다졌으니, 위의 유명한 북정가는 아마도 그때 읊은 것이리라.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 ) / 17~18세기에 만들어진 남이장군의 척경도(拓境圖)이다.

     

    이후 그의  직책은 날로 높아져 1468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총관(현 삼군참모총장)을 겸하고, 27세가 되던 1461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자 신진관료의 약진을 두려워 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견제를 받게 되었으니, 그를 총애하던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위치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종 즉위 후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급전직하된 남이는 좌천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간신 유자광은 급기야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참소를 올려 그를 죽음으로 내모니, 증거로써 이용된 것이 당대 변고의 징조로써 인식되던 혜성의 출현과 위의 북정가였다. 이때 유자광이 '男兒二十未平國(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을 '男兒二十未得國(남아 이십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제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남이는 정강이 뼈가 부러지는 고문 끝에 결국 없는 죄를 인정하게 되었고, 유약했던 예종이 이를 추인함으로써 1468년(예종1) 10월 용산강(한강) 새남터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이 시행되었고 목은 저잣거리에 7일 동안 효수되었다. 아울러 그의 일족 또한 역모 가담과 간통 등의 혐의로 처형되었다. (유약한 왕 예종은 재위 1년 6개월 만에 병사했다)

     

    그가 처형당한 용산강 새남터는 조선 후기까지 국사범의 형장으로 쓰였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새남터 자체가 특정 장소가 아닌 사남기(沙南基)라 불려지던 용산강 변의 넓은 모래밭의 한글 음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지 않으나, 한국 천주교 측에서  1801년 주문모, 1846년 김대건 신부 외에 11명의 대표적 목자가 순교한 곳이라는 명목으로 장소를 독점하여 1987년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을 준공시킴으로써 형장 새남터는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1840년 경에 제작된 〈수선전도〉 속의 사남기
    새남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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