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청와대 터에 얽힌 여러 헛소리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5. 25. 00:35

     

    남들이 간다 하기에 나 또한 가서 주인 없는 청와대를 구경했다. 하지만 평소 관심 가는 곳이 없지 않았으니 첫째는 청와대 터가 일제강점기 총독관저로 쓰일 때 옮겨졌다는 일명 '미남 부처'로 불리는 통일신라 석불이고, 둘째는 1990년 청와대를 신축할 때 관저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암각 각자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찾아도 그 각자 바위는 찾을 수 없었고, '청와대, 국민 품으로'라는 제목의 안내 브로셔에도 없었으며, 안내를 맡은 직원들조차 몰랐다. (심지어 엉뚱한 곳을 가르쳐주기까지)

     

    그래서 언뜻 음모론까지 떠오름에(^^) 첫 번째 관심사였던 '미남 부처'에 대한 비화(秘話)는 뒤로 미루고 '천하제일복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요점을 말하자면 그 '천하제일복지'가 지금은 왜 천덕꾸러기가 되었는가에 대한 썰이다.

     

     

    청와대 석불
    석불이 바라보는 곳
    경무대 터 표석에 옮겨 새겨진 '천하제일복지' 각자
    '천하제일복지' 각자 바위 / <아시아경제> 사진

     

    전제할 것은 지금부터의 썰에는 일체의 정치적 담론이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굳이 이와 같은 전제를 다는 것은 우선은 건진법사인가 뭔가 하는 양반 때문이다. 이번에 청와대에 주인이 사라진 것은 윤석렬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한 공약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대통령 선거 운동 시절, 무속 논란과 함께 건진법사라는 이름이 종종 거론되며 시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요지인즉  그 건진법사라는 사람이 '자신은 '국사(國師)'가 될 사람'이라고 떠벌리며 후보 캠프에 합류하여 이것저것 무속적인 코치를 했으며, 윤석열 후보 부부가 그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손바닥의 王자 논란 같은) 하지만 앞서 '무속이 무교나 도교로 승화되지 못한 이유'에서 말했듯 이것은 시빗거리가 못 된다. 후보가 특정 종교를 믿든, 무속을 믿든 자유라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자유가 특별히 헌법에 명시돼 있기도 하다.

     

    또, 이번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청와대 터는 예로부터 악령이 많은 곳이니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건진법사의 주장에 따라 옮겨졌다는 말도 심심찮게 떠도는데, 이런 건 그냥 ㅋㅋ 거리다 잊어버리면 될 것 같다. (다만 예전 이명박 서울시장처럼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다"와 같은 헛소리는 곤란하다. 서울시가 서울시장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이번에 청와대 관람 신청을 하고 나서 우연찮게 건진법사와 비슷한 류(類)의 사람으로 보이는 천공스님이라는 자의 유튜브 방송 같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 양반은 다음과 같은 얼척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와대를 개방해도) 한 1년쯤 안 가는 게 좋습니다. 그 안에 (권력에 억울하게 당한) 귀신들이 많습니다. 잘못 갔다가 귀신을 달고 오면 큰일납니다."

     

    이렇게 생겼음!

     

    언뜻 그럴듯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한 마디로 개소리다. 청와대에 그동안 근무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공무 등의 업무로써 출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딴 소리를 하는지..... 그렇다면 그간 가장 끗발 있던 곳에서 근무했던 고위 공직자들은 물론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 같은 사람들이 먼저 귀신에 씌었어야지..... ㅎㅎ 귀신도 권력자들에게는 꼼짝 못 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만 들러붙는 건가....? 

     

    농담에 박자 맞추는 식으로 한마디 달자면, 예전에 알던 이모라는 신문기자의 일화는 과거의 청와대가 어떤 곳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대학졸업 후 삼성비서실에서 근무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중앙일보 기자로 발령이 나 국회출입기자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생신에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마을 입구에 「경축! 청와대 출입기자 이○○ 모친 김△△여사 생신」의 플래카드가 걸렸으며, 웬만한 지역 기관장들이 다 모였다나 어쨌다나..... 국회출입기자가 청와대출입기자로 오도되어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청와대 터는 풍수지리가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다. 자칭 타칭 대한민국 최고의 풍수전문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청와대 터는 살아있는 사람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라 주장한 적이 있는데, 딴은 그 말도 옳다. 아래 <한양도성도>를 보면 청와대 자리에는 육상궁, 회맹단, 제성단(祭星壇)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여기서 육상궁은 청와대에 연접한 칠궁(七宮)을 이르는 것으로 그 일대는 조선시대 따로 모실 사람이 없는 궁녀들의 무덤으로도 쓰였다. 제성단은 문자 그대로 별, 즉 일월성신에 제사 지내던 곳으로, 삼청성신(三淸星辰) 전각인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장소도 이 근방이다.

     

     

    <한양도성도>에서의 청와대 자리
    칠궁 내삼문
    칠궁 내의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

     

    이 <한양도성도>는 조선 정조 때인 1770년대에 제작된 지도로서, 이걸 보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신무문 밖에 위치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공간이다. 그러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시(1865~1868) 신무문 밖에 후원을 설치하면서 경복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오운각, 융문당, 융무당, 수궁, 경농재 등이 세워졌는데, 문·무과 과거시험이 치러지던 융문당과 융무당 일대의 너른 마당 일대를 통칭하여 '경무대'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훗날 청와대에 앞선 대통령 관저 이름이 된다)

     

     

    일제시대 찍은 경무대 전경 / 왼쪽 건물이 융문당(隆文堂)이고 오른쪽이 융무당(隆武堂)이다.
    경농재 자리에 지어진 청와대 영빈관
    청와대 신축 때 뒤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오운각
    경복궁 후원 전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침류각

     

    이것은 경복궁 뒤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침전인 건청궁이 건립되며 왕궁의 후원으로서의 역할이 커졌다. 하지만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고 이후 덕수궁으로 이거함으로써 후원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버려지게 되었는데, 1926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자리에 새로 지어지고 후원이던 곳에 일본 총독의 관저가 들어섬으로써 다시 정치의 중심부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곳에 있던 고종 시대의 전각들은 헐리거나 일본 불교 사찰의 당우로 쓰였으니, 조선총독부는 1928년 융문당과 융무당을 일본 불교 진언종에 무상대여했다. 이에 두 건물은 경성부 한강대로 40가길 24(한강로 2가 55번지)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高野山=용산) 용광사(龍光寺)의 본당과 객전(客殿)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 귀속재산(Vested Property)으로 분류돼 원불교 측에 그 권리가 넘어갔다. (이후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 용산재개발 때 전북 영광으로 옮겨져 각각 '원불교창립관'과 '우리문화옥당박물관'이란 이름의 전각으로 복원돼 쓰이고 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실린 해체 당시의 융문당과 융무당
    1929년 고야산 용광사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 / 이곳에서는 일본수상 하마구치 오사치, 중일전쟁 당시 숨진 '전몰황군장병'의 위령제가 치러지기도 했다.
    '우리문화옥당박물관'이 된 융무당 / 남도일보 사진
    원불교창립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융문당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에서는 이 두 건물이 청와대 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청와대 터가 흉지라거나, 터가 나쁘거나 하는 말의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 터가 조선 총독의 관저가 있던 곳이라 재수 없다는 말도 심정적으로는 동조되지만, 보다시피 그 전에는 이미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미 반도 삼천리 화려강산을 다 빼앗겼던 마당에 그런 말은 오히려 우스우니, 이는 한반도가 일본놈에게 지배당했던 땅이니 이 땅에 살면 안 된다는 소리와도 진배없다.   

     

    내가 청와대 터가 나쁘다는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때는 2019년 새해 벽두로서, 문화재청장을 지내다 '대통령 광화문 시대 자문위원회' 위원인가를 하던 유홍준 선생으로부터였다. 속은 모르니,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을 엄호하기 위한 발언이 아닐까 여겨졌으나,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니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인 광화문 집무실 이전이 무산됨에 따른 아쉬움을 피력한 말이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후보 시절인 2012년부터,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자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며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라며 대통령 집무실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아울러 "대통령이 되면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이전해 청와대 대통령 시대를 끝내고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

     

     

    스타 집필가 유홍준

     

    2019년 1월 3일 유홍준 '대통령 광화문 시대 자문위원'은 청와대 춘추관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장기적 과제로 남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관저는 반드시 이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며 그 이유를 "풍수상 불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모 신문기자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수많은 풍수상의 근거"라고 답하며 "풍수상 근거가 있다면 있는 거지요"라고 덧붙였다.

     

    ~ 이는 자신도 자신 없는 말을 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풍수상에 수많은 근거가 있다고 했지만, 이후로 그가 그 수많은 근거 중에서 자신 있게 꺼내놓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이번에 윤석렬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며 다시 들먹여졌지만, -그래서 그가 자칫 난처해질 뻔했지만- 이전의 근거로서 유리하게 쓰이지는 못했다. 워낙에 근거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에 실린 글들에 혹간 독자들이 사실 여부를 되묻고 그리하여 여러 구설이 오르내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 때문이 아닐런가 한다. 아무튼 그는 이후 청와대 터에 대해서만큼은 침묵하고 있다.  

     

    ~ 귀신 많다는 -그러나 관람객의 수가 상주하는 귀신보다 훨씬 많았을 듯 보이는- 청와대에 다녀온 날, 그 답사기를 최대한 짧게 써 보았다. 나머지는 아래 사진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경봉궁의 북문 신무문 / 이 문 밖이 청와대다.
    경복궁 안에서 본 신무문 밖
    활짝 열린 청와대 대문과 복작대는 인파
    청와대 본관
    청와대에서 본 인왕산
    옛 경무대 터 / 1993년 흙으로 경무대 이전의 언덕을 복원시켰다.
    청와대 사랑채 외관
    관람객들로 붐비는 대통령 관저
    관저의 별채 청안당
    오색 구름 정자라는 뜻의 오운정
    경주 이거사에서 옮겨온 미남 부처
    흐르는 물을 배게 삼는다는 뜻의 침류각
    침류각 후원
    침류각 옆 초당
    상춘재 길
    상춘재 길 옆 계곡
    의전 행사 등이 행해지던 상춘재
    상춘재는 1983년 옛 융문당 자리에 지어졌다.
    청와대 내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녹지원 / 뒤쪽으로 상춘재가 보이므로 녹지원은 고종 시대의 오리지널 경무대 터임을 알 수 있다.
    프레스센터 춘추관
    국빈을 맞던 영빈관 / 안을 보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영빈관 옆 칠궁 재실
    칠궁 가는 길
    청와대 분수 옆 4.19 최초 발포 현장 표지 동판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