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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신에 홀린 듯 사라진 율곡 이이의 서울 집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5. 11. 23:39

     

    유명한 율곡 선생의 '십만양병설'이 구라라는 사실을 앞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파주 화석정'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곡 선생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은 아니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은 실로 빼어나다. 그래서 5천원 권 화폐 인물로도 채택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 5천원 권 화폐에 그려진 율곡 이이의 탄생지 오죽헌에 대해서는 앞서 '영실오름 까마귀에 대한 오해'에서 일차로 썰을 풀었는데, 조금 미진한 듯해 서울에 와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이 또한 오해가 있을 듯해서이니 율곡 선생의 고향은 강릉이라기보다는 경기도 파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앞서 말했듯 오죽헌은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외할아버지 이사온(李思溫)의 집 별당으로, 당시 사임당 신씨의 홀로 된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즉 사임당 신씨는 친정엄마가 사는 이곳에 와 해산을 하고 산후조리도 한 후, 어린 이이가 어느 정도 걷게 되었을 때 시댁으로 돌아간 것인데, 그 시댁이 있는 곳이 경기도 파주였다. 그곳에 율곡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고, 모자(母子)의 동상이 있고, 화석정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모자의 무덤도 그곳에 있다.

     

     

    임진강변의 화석정(花石亭)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표준영정

     

    이이는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수석 합격했다. 그리고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읜다. 이후 3년간의 시묘(侍墓)살이를 하는데, 그때 인생무상을 느꼈는지 금강산에 들어가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한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살 때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는데,(1564년)  앞서 말한 명종 3년의 초시를 필두로 별시 문과, 기타 승진까지 합쳐 9번의 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전무후무한 명성을 얻게 된다. 

     

    이이의 학문적 업적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은 기대승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의 성리학을 발전시켜 주기론(主氣論)을 확립한 점이다. 

     

    * 기대승의 기발일도설을 짧게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 나름대로 설명하자면 기발일도설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기호발설은 이(理)와 기(氣)의 운동성을 모두 인정한 반면 기발일도설은 기(氣)의 운동성과 에너지만을 인정한다. 이로 인해 기발일도설에서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배제되고 객관적 법질서에 의한 합리적 세계를 지향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사고는 이기호발설의 주리론(主理論: 이는 기의 활동의 근본이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라고 주장하는 이론)과 대척하며, 영남(주리론)에 대항하는 기호 당파(黨派)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다만 이것은 학문적인 것이고, 더 큰 업적은 민생에서 찾아야 한다. 즉 이이의 가장 큰 업적은 선조 1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펴내고 국정을 개혁한 일을 으뜸으로 쳐야 마땅할 터, 그가 제시하고 노력한 방안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 과다한 세금 징수와 족징(族徵)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 과중한 세금에 도망간 사람의 것까지 가족과 친족에, 나아가 주민들에게까지 부과되니 아예 마을이 사라져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족징의 폐해를 막아야 되지만 그전에 그 원인이 되는 과다한 세금을 막아야 된다. 세금은 무릇 낼 수 있는 만큼만 부과되어야 한다.

     

    둘째, 진상품(進上品)의 종류와 개수를 줄여야 한다.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진상품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삶이 날로 피폐해진다. 궁중에서 필요치 않는 진상품은 상납을 제한하여 불요불급한 특산품만을 계절에 맞게 거두어들임이 옳다. 

     

    셋째, 방납(防納)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 관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지역 특산물을 요구하므로 백성들은 특산물을 대신 내주는 방납을 이용한다. 이에 지방 관리나 상인들은 서로 도와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로 백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짜내어 받아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넷째, 부역과 군역의 폐단을 없애야 한다. 양반들은 군역과 부역을 빽과 돈을 써서 면제받으니 그 역할을 모두 일반 백성들이 짊어지고 있다. 백성들은 군인으로 복무도 하고 국방 세금인 군포(軍布)도 내야 하는 바, 이런 불합리가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아울러 그는 당시 발흥하던 붕당정치를 온 힘을 다하여 여러 방도로써 막았으니 <선조수정실록> 10권, 선조 9년 2월 1일 을축 2번째 기사는 이에 대한 그의 노력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어떤이(아마도 송강 정철)가 이이에게 말하기를,

    "천하에는 둘 다 옳고 그른 적이 없는 법인데, 공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둘 다 온전하게 하려고 힘쓰니 인심이 불만스럽게 여긴다."

     

    하니, 이이가 응답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도 있으니, 백이·숙제가 서로 나라를 사양한 것과, 무왕(武王)과 백이·숙제가 서로 뜻이 합하지 않은 것은 둘 다 옳은 것이고, 춘추·전국시대의 의(義)로운 전쟁이 없었던 것은 둘 다 그른 것이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 아닌데도 서로 불화하여 알력을 빚음으로써 조정이 평온하지 못하게까지 되었으니, 이는 둘 다 그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그르지만 본시 사류들이니 당연히 화해하고 융합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반드시 저쪽은 그르고 이쪽은 옳다고 하면 자꾸만 생겨나는 말과 서로 알력을 빚는 정상이 어느 때에 그치겠는가."

     

    그 명재상이 살던 곳이 서울 종로구 홍파동 1번지에 1960년대 중반까지 존속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현재 구세군 영천교회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에는 이이의 집터가 있었고, 1959 6 22일 이율곡의 사당인 문성사(文成祠)가 건립되어 신주가 모셔졌다. 본래 황해도 해주 해전서원(海前書院)에 있었던 것을 1947년 율곡 선생의 후손이 월남하며 모셔온 신주였다. 그 사실이 1959년 6월 28일 제작된 상영시간 21초 분량의 대한뉴스에 짧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율곡 선생 사당 낙성식 및 신주 봉안식 / 대한뉴스 제220호

    문성사와 강학공간을 재현한 홍파강당(紅把講堂)

     

    전하는 증언에 따르면 그 자리에는 율곡 선생의 집터 초석과, '성동인우 애지산학'(性同鱗羽 愛止山壑)이라는 8글자가 새겨 있는 암각바위와, 바위 아래 굴과 샘이 있었다고 한다.(덕수이씨대종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이상의 것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각자 바위 명문만이 오석에 따로 새겨져 간신히 과거의 흔적을 붙잡고 있다. (그나마 이에 대한 설명도 없어 사전 지식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친다)

     

     

    구세군 영천교회 주차장의 각자명문 오석

    과거에 있었던 율곡 선생 각자
    1988년 구세군 영천교회에서 세운 각자명문 오석

     

    위 바위 각자 '성동인우 애지산학'(性同鱗羽 愛止山壑)의 뜻은 『인간의 성품이란 본시 깊은 물속의 물고기, 높은 하늘의 새에 이르기까지 만물이 모두 같으니(性同鱗羽), 우리의 사랑은 산과 골짜기의 세상 끝까지 속속들이 미친다(愛止山壑)』는 의미로서 율곡 이이의 애민사상과 물아일체의 박애정신을 증언한다. 그러나 말한 대로 원문 각자는 없어졌고, 그 탁본만이 강릉 오죽헌 박물관에 전한다.

     

    현재 구세군 영천교회 주차장 담벼락에 남아 있는 각자명문 오석에는 이곳에 있던 율곡 선생의 마애각자가 풍화작용으로 마멸되었기에 탁본을 복원해놓았다고 쓰여 있다. 설명 대로라면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성사 자리에 지어진 구세군 영천교회 건물을 보면 옹색한 감을 지울 수 없다. 이 교회건물이 1960년 초까지 존속했던 이이의 집터와 그의 사당을 밀어내고 들어선 건물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백주대낮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법적으로 보자면 구세군 영천교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초지종을 살피자면, 이율곡선생기념사업회의 회장 이주영이라는 자가 자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던 집터와 건물을 저당 잡히고 은행대출을 받았는데, 그것이 은행으로 넘어갔고 구세군 영천교회가 그 토지를 매입했던 것이다. (건물철거는 원 소유주가 했다고 한다)

     

    유홍준 선생은 교회측에서 글자가 새겨 있는 암각바위를 없애고 그 자리에 화장실을 지었다고 저서에 썼는데, 사실 여부야 어쨌든 지금의 모습은 몹시 흉하고 을씨년스러울 뿐이며, 그저 귀신에 홀린 듯하다. 그 주차장 바로 위에는 홍난파 주택이 있으며 베델이 살던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근방에는 권율 장군 집터와 그의 집에 있었다는 은행나무와 딜쿠샤가 있다. 만일 율곡 선생 집터와 문성사가 존속했다면 그야말로 빼어난 문화벨트가 되었을 법하다.

     

     

    음악가 홍난파의 집
    푸른 눈의 애국지사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집터
    미국인 엘버트 부부가 살던 '기쁨의 궁전' 딜쿠샤
    딜쿠샤 앞 권율 장군 집터의 보호수 은행나무
    율곡 선생 관훈동 집터 / 율곡 선생은 45세 쯤 병을 얻자 출퇴근이 편한 대사동(大寺洞, 인사동&관훈동)으로 옮겨와 남의 집 살이를 하다 1584년(선조17) 1월 16일 48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관훈동 197번지 백상빌딩 앞이 그가 임종을 맞은 집으로 추정된다.
    그 집 자리에는 2014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회화나무와 안내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나무도 표석도 없고 다만 흡연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판만이 붙어 있다.
    회사 흡연구역이 율곡 이이 집터라고? (2014.01.14/ 헤럴드경제 기사 제목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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