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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순과 이완용,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인가? (I)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9. 27. 00:40

     
    지난 2006년, 서울시 중구 예장동 옛 안기부 부지 내에서 지금은 잊힌 인물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판석(版石)이 발견되었다. 언뜻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일본인의 동상은 꽤 많을 듯싶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하야시 곤스케라는 인물의 동상이 남산 초입에 우뚝했던 것이니 어떤 놈인지 잘은 모르지만 조선의 멸망에 대단한 공을 세운 자임은 분명할 것이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0년 주한 일본공사로 조선에 와 이후 7년간을 머물며 1904년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이듬해에 제2차 한일협약을 성사시킨 자이다. 이 제2차 한일협약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사실상 식물국가로 전락시킨 그 유명한 을사늑약으로, 이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는 1906년 남작의 작위를 내렸고, 1936년에는 희수(喜壽, 77살)를 기념해 남산 통감부 관저 앞,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동상을 세워 주었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

     
    발견된 동상의 판석은 그때까지 분명치 않았던 옛 조선통감부 및 총독부(1910년 합병 뒤 조선총독부로 바뀜)의 자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처치 곤란의 조금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서울시는 이 판석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간과해 보존에 소홀하다가 일부가 훼손된 후 여러 역사단체가 소리치자 비로소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후 서울시는 서둘러 부근의 동상 잔해를 수습하였고, 2015년 뒤늦게나마 굴욕진 역사의 반면교사를 삼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 잔해를 옛 통감부 관저 앞에 보존케 되었는데, 그대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판석을 거꾸로 세우기로 했고 지금도 거꾸로 박혀 있다. 서울시는 당시 "한일합방의 3대 영웅으로 불렸던 자의 동상을 가장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복원시켰다"고 말했다.  
     
     

    2006년 발견된 하야시 동상의 기단 판석 /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여 있다.
    옛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에 수록된 1936년 12월 2일의 하야시 동상 제막식 광경과 판석의 위치
    기단 판석이 통감관저 터 옆에 거꾸로 세워졌다.
    판석에 부착된 '거꾸로 세운 동상' 안내문

     
    아울러 곤스케의 동상 기단 판석은 옛 통감 관저 터 및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관저 앞 은행나무의 존재도 확인시켜 주었다. 1926년 발간된 후지이 가메와카 저(著) <경성의 광화(京城の光華)>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은행나무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녹천정(綠泉亭, 남산에 있던 옛 정자)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名木)인 대공손수(大公孫樹)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은 이 나무는 둘레가 네 발(양팔 길이)로도 모자라며, 높이는 관저의 옥상에 닿아 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는데, 이 정정한 고목은 문록의 역(文祿の役,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전한다."  

     
    또 아래의 남산총독관저를 집어넣은 엽서에는 이 나무에 대해, "풍공(豊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征韓, 임진왜란) 때 청정공(淸正公, 가토 기요마사)이 말을 매어 둔 은행나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이상 가토 기요마사의 이야기는 그저 개소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아무튼 이 나무는 곤스케 동상 기단 판석과 더불어 옛 통감관저의 위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엽서 속의 남산총독관저 / 사진 가운데 왜장 가등청정이 말을 맸다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
    총독관저가 있던 중구 예장동 2-1의 현재 모습
    이 은행나무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서울시 보호수 (고유번호 : 서2-7)로 지정되어 있다.
    관저 오른쪽의 나무도 그대로 있다.

     
    이곳 통감관저 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공포된, 이른바 경술국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은 덕수궁 중명전이며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진 장소, 이른바 경술국치의 현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곳이 바로 남산 조선통감부 통감관저로서 2006년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판석이 발견되며 비로소 현장이 확인되었다. 
     
     

    엽서 속의 남산총독관저 / 나무 뒤가 관저이며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와 사진을 넣었다. 하지만 한일합방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에 의해 이루어졌다.
    '거꾸로 동상' 옆의 통감관저 터 표석 / 글씨는 신영복 체로 썼다.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하다 복역한 공산주의자요 자생간첩인 신영복의 글씨인 것이 쌩뚱맞다.

     
    역사를 돌이켜보자면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와 회동하여 상의 협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은 짐이 뜻을 세운 바를 체득하여 봉행토록 하라.
     
     

    합병조약 전권 위임장 / 어보 위에 순종의 사인인 척(坧: 순종의 이름)자가 보인다. 위조된 사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도장을 찍은 것은 사실 아닌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창덕궁 흥복헌 / 왼쪽 건물이 왕비의 침실인 대조전으로 순종이 1926년 여기서 죽었다. 흥복헌은 어전회의 뒤로부터 1917년까지 궁중 이발소로 사용됐다.

     
    이완용은 위 위임장을 들고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통감 관저로 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합병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이날의 합병과정이 매우 순조로웠으며 조약체결 후 위임장을 궁내부에 반환했다고 담담히 술회했다. 서로 부딪힐 게 없으니 당연히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돌이켜보자면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조약은 순조롭지 않았다. 제2차 한일협약은 창덕궁 중명전에서 11월 17일 밤 8시에 열려 이틑날 새벽 1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 문서에 서명 날인을 마치며 겨우 끝이 났는데, 회의가 밤 8시에 열린 이유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간의 협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뜻밖에도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 체결에 완강히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여기서 역사를 다시 1년 더 거슬러 올라가 돌이켜보자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의 조약인 제1차 한일협약은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 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되었다. 책임을 지기 싫었던 외부대신 이하영이 때맞춰 일부러 병가를 냈기 때문에 윤치호가 대신 나간 것인데, 이미 고종이 독단적으로 외부대신의 전결을 승인했던 까닭에 별 무리 없이 조인되었다.
     
    일본측에서는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길 희망했고, 아울러 무난한 성사를 의심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황제 고종에게는 거금의 뇌물까지 건네진 마당이었다. 하지만 외부대신 박제순은 조약 체결을 한사코 반대하고 나섰던 바, 이 소식을 들은 일본국 전권특사 이토 히로부미는 16일 오후 4시 참정대신 한규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법부대신 이하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탁지부대신 민영기, 원로대신 심상훈을 자기 숙소인 손탁 호텔로 불러 조약체결에 협조할 것을 강요했다.
     
    다음날 17일 재개된 재개된 협상에서도 외부대신 박제순은 반대 의사를 견지했고, 이에 화가 난 하야시는 이미 뇌물을 먹은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고종과의 면담을 약속하고 오후 3시 경운궁(덕수궁)으로 들어갔다. 처먹은 마당에 왜 약속이 틀리냐고 따져 물으려는 생각이었지만 고종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하고 여러 대신들과 협의해 처리하라며 뒤로 빠졌다. 역시 화가 난 이토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로 하여금 협상 장소인 중명전을 대병력으로 포위하게 하고 다시 위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대신들은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에 위축된 모양새로 중명전을 들어섰다. 하지만 외부대신 박제순은 흔들림이 없었으니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국충정을 북돋웠다. 이에 대해 정리한 나무위키(☞ 박제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과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 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外論)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또한 찬성과 반대의 가·부(可·否)를 묻는 이토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토는 각 대신 앞에 종이와 연필을 각각 놓고 가·부를 쓰게 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II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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