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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의 건원릉과 소전대(燒錢臺)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2. 20. 07:36

     

    건원릉(健元陵)은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묘다. 건원릉 주변에는 아래와 같이 멋드러진 소나무들이 식재돼  있는데,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식재의 연유와 과정을 올려본다.

     

    건원릉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동반(東班) 9품 이상과 서반(西班) 4품 이상에게 각각 품종(品從)을 내게 하고, 또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연호군(煙戶軍)과 각사(各司)에 속한 제색(諸色) 장인(匠人)을 차발하여 부역(赴役)하게 하고,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 9년 1월 18일 기사

     

     

    건원릉

     

    엊그제, 서울시와 경기도 내의 유골을 파내 화장하면 서울시가 최고 50만원을 지원해준다는 기사를 보았다. 과포화 상태가 된 공원묘지 및 비혼 인구, 1인 가구의 확장에 따라 함께 늘어가는 무연고 묘지에 대한 사전 대책으로 취해진 조치이다. 이걸 보며 세상의 변화를 느낀다. 묘제(墓制)는 가장 늦게 변하는 가장 보수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니, 조선시대에 부모의 시신을 파내 화장을 했다고 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망자는 매장을하고, 망자를 대신한 신주는 사당을 지어 정성스레 모시는 것. 이것이 조선시대 가진 자의 장법(葬法)이었고, 없는 자도 최소한 매장은 했다.

     

    조선시대의 매장은 극성스러운 면도 없잖았으니 가진 자는 금수저를 지키기 위한 명당을 찾았는데, 그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지관(地官)이었다. 벼슬 관 자가 붙었지만 관리는 물론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름 난 지관들은 벼슬아치 이상의 행세를 하고 또 그만한 대접을 받았던 바, 유명한 자의 이름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해방 후의 우리가 아는 유명 지관들이 그러했듯, 그들 역시 뻔한 풍수지리에 화려한 입심을 얹은 사기꾼이었을 것임은 굳이 만나보지 않았어도 알 일이다. 대체 그 무덤 자리와 후손의 발복(發福)·출세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좌청룡 우백호면 후손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입신양명하는가? 그 같은 명당의 후손들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을 터, 앞서 '박영효와 홍영식'에서 말했던 박영효의 묘가 그 일례일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외 전직 대통령 일가의  묫자리를  잡아주었다 해서 유명해진 육관대사 손석우의 경우, 그가 스스로 자리를 잡아 묻힌 충남 가야산 무덤 자리는 훗날 다른 풍수쟁이로부터 형편없는 음택 자리로 매도당하는 것 또한 그 일례일 것이다.

     

    ~ 손석우가 살아생전 자리를 잡아주었다고 주장한 히로히토, 장개석, 등소평 등의 무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히로히토와 등소평은 전통 장법과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고, 장개석은 유언으로 본토 매장을 원했기에 아직 그 유해가 보존 중이다. 그가 레전드 사기꾼으로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다.

     

     

    사기꾼 지관 손석우 / 1997년 3월 11일에 방영된 MBC PD 수첩에서는 그의 풍수설에 수많은 허위·위조가 포함돼 있는 점, 손씨가 풍수를 구실로 13억의 토지를 3억5천만 원으로 사기 갈취한 혐의가 있다는 점, 비슷한 식의 피해자가 많이 있다는 점 등이 보도되었다. 당시 손씨는 여러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대에도 이러니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극성이었겠는가? 이에 명당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서민들은 남의 묘에  몰래 매장하는 이른바 투장(偸葬)도 이루어졌는데, 사실 발각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이에 대한 여러 사건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미신이 지배한 사회였기에 통할 수 있었던 풍속이었다.

     

    하지만 미신이든 과학이든 그 시대의 지관은 나름대로 전문직 대접을 받았으니 관서대란(關西大亂,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와 우군칙의 직업이 지관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은 그와 같은 직업으로 다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풍수·도참설 등을 이용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직업이 본래부터 풍수쟁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명당에 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임금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는 망우리 고개의 경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구리시에 자신의 음택이 될 건원릉 자리를 정하고 이 고개에서 잠시 쉬며 "이제야 근심[憂]을 잊었다 [望]"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그는 애당초부터 건원릉에 묻힐 생각이 없었고 또 그곳을 자신의 묫자리로 봐 둔 적도 없다.

     

    그는 애오라지 자신의 유해가 먼저 죽은 왕비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부인 강씨의 무덤을 도성 안에 조성해 정릉(貞陵)이라고 했고(지금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 자신의 무덤 수릉(壽陵)은 그 옆에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그 수릉에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다른 묫자리를 보러 다녔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아들인 태종이 문제였다. 그는 죽은 양어머니 강씨와는 철천지 원수였던 바, 아버지 이성계의 무덤을 그곳에 쓰지 않았을뿐더러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아예 도성 밖 후미진 골짜기로 이전시켜버렸다.(지금의 성북구 정릉동) 아버지 이성계의 무덤은 양주 검암촌에 따로 마련했으니 이것이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이다. 또 한가지 사실과 다른 것은, 이때 이방원이 무덤에 고향 함흥의 억새풀을 심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능상(陵上, 봉분)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건원릉 봉분에는 억새가 무성한 까닭에 이 역시 정설처럼 들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이성계는 왕세자였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이 이방원에게 살해되고(1차 왕자의 난) 정릉이 훼손되는 것을 보자 유언을 바꾼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방원이 자신을 강씨의 무덤 곁 수릉에 장사 지낼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유해를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함흥에서 억지로 데려온 마당인 데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만은 받들어줄 줄 알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태조를 멀리 함흥에 묻을 경우 제사를 지내기 어려운지라 제멋대로 건원릉에 묻는데, 다만 유언을 받들었다는 생색은 내야 할 터, 신하들과 궁리 끝에 나름대로의 묘안을 창출해내었다.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만들어 최소한의 흉내만 내자는 것이었다.

     

    지금의 억새 무성한 건원릉은 그 같은 꼼수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봉분의 억새풀을 벌초하지 않고 두는 연유를 흔히 이성계의 뜻처럼 말하기도 하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서는 이것이 선대(先代)의 꼼수임을 밝히고 있다.(인조 7년 3월 19일 기사)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 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였다.

     

     

     

    건원릉 봉분의 억새는 '청완 예초의'라는 이름으로써 문화재청에서 한식날 딱 한 번 벌초한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의 능침이 만족스러웠는지 이것을 중국 사신 기보(祁保) 등에게도 구경시켜주었고, 기보는 그 능세(陵勢)를 찬미해 마지않는다.

     

    기보등이 회암사(檜巖寺)로부터 오다가 역로에서 건원릉(健元陵)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세자가 동교(東郊)에 나아가 영접하였다. 기보 등이 능침(陵寢)의 산세(山勢)를 보고 탄미(歎美)하였다.

     

     

    "어찌 이와 같은 천작(天作)의 땅이 있는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조선 왕의 능침 중에서 이렇듯 천작의 땅이 아니고 명당이 아닌 곳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듯 하늘이 지은 땅도 임진왜란 때는 사정없이 파헤쳐져 그 시신마저 훼손돼 버리니 명당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다.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梓宮)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을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안내판
    서울 도심에 24만 5천㎡의 녹지를 제공하는 고마운 이 장소는 조선 9대왕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의 유택(선릉), 그리고 11대 임금인 중종의 유택(정릉)이 있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이 유택들은 임진왜란 때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 의해 파헤쳐진 전력이 있다.

     

    그 천작의 땅에 마련된 소전대(燒錢臺)라는 물건이 있다. 문자대로라면 '돈을 태우는 대'라는 뜻이지만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왕릉에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건원릉과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 태종의 무덤인 헌릉에만 있다. 우선 건원릉 소전대의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건원릉의 소전대

     

    이 소전대가 조선왕릉에, 특히 초기 무덤 3곳에만 있는 것은 세상이 바뀐 데 대한 증거품이다. 즉 화장을 하는 불교사회에서 매장을 하는 유교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유물인 것이니, 이성계는 화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식으로 축문(祝文)이나 저화(楮貨, 고려 시대의 종이 화폐)를 태워 극락왕생을 빌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아마도 축문보다는 지전을 태웠을 것 같은즉, '소전대'라는 물건의 제목이 그 용도를 말해주고 있다.

     

    이 소전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자료는 전무(全無)해 이렇게 추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다만 조선초 문인 매월당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서 소전대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이튿날 양생(梁生)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개녕동 옛 자취를 찾으니 과연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양생은 제단을 차린 후, 슬피 울며 지전(紙錢)을 태워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나서 조문(弔文)을 지어 읊었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말하자면 소전(燒錢)의 행위는 망자의 노잣돈을 마련해주는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화장을 한 망자가 가져가기에 어울리는 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장자의 입 안에 쌀이나 구슬 등을 넣어주는 반함(飯含)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랄까..... 소전대는 아니지만 조선초의 문신 황희 정승의 묘소에는 축문을 태우는 망료위(望燎位)가 있는데, 무언가를 태우는 대(臺)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왕릉의 예감(瘞坎)과 같은 것이다.

     

     

    경기도 파주 황희 정승 묘소의 망료위 (출처: 티스토리 겨울섬님의 블로그)

     

    하지만 국초에는 소전대와 예감의 역할이 달랐으니, 소전대는 돈을 태우는 곳이고 예감은 축문을 태우는 곳이었다. 까닭에 소전대는 건원릉과 정릉과 헌릉에만 있는 것이니 이후 저화가 사라지며 소전대도 설치되지 않게 되었다. 원래 서대문 근방(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이성계의 부인)의 무덤에는 건원릉과 마찬가지로 소전대와 예감이 모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의 자리(정릉동)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예감은 사라진 듯하다.  

     

     

    건원릉의 예감(瘞坎)
    목릉(선조의 릉)의 예감 / 제사가 끝난 뒤 축문을 태워 묻는 곳이다.
    정릉(신덕왕후 릉)의 소전대
    정릉의 소전대 / 안내문에는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돼 있지만 정확히는 돈을 태운 곳이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쓴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세상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막말로 사람 살 곳도 좁은 마당인지라..... 그런데 단 한 가지 역변(逆變)이 있다. 다름 아닌 납골당 문화인데, 이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라지는 묘지를 대신해 전원(田園)과 야산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생겨난 납골당, 그 안(內)도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밖은 더욱 흉물스럽다. 더욱이 납골당 안장은 전통에도 예법에도 모두 없던 일이었다. 그 또한 아파트와 같은 공간집약적의 경제성과 편리성 때문이런가.....

     

    망자를 납골당에 모시려면 차라리 매장을 하는 게 낫다. 매장은 망자와 그 흔적 모두를 언젠가는 흙으로 돌려놓지만 납골당은 영원히 흉물로 남을 것이다. 대안으로 화장재를 수목장(樹木葬)하거나 산천에 뿌리는 것을 추천한다. 인간이 인간이 왔던 본래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망자의 유해가 뿌려지는 지리산. 유명한 '모래시계'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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