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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한 폐렴 찜쪄먹을 역대급 전염병(III) - 콜레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2. 4. 00:31


    콜레라를 얘기하면 '옛날 옛적', 'long long ago'로 시작되는 옛날 얘기를 떠올리거나 혹은 추억의 예방접종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콜레라는 그만큼 우리에게 먼 일이 되었으니 몇 해 전 콜레라가 유행한다는 보도가 있었을 때 주위의 반응은 놀랍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뭐, 콜레라? 그거 옛날에 멸종되지 않았어?"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 콜레라가 유행했던 때는 2016년 8, 9월로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다. 그리고 15년 만의 유행이었다.(어쩌면 콜레라라는 놈은 징그럽게도 잊혀지지 않는 첫사랑과도 같은 놈인지 모른다)


    콜레라에 관한 자료가 발생한 1831년 이후의 기록을 봐도 콜레라는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831년부터 1912년까지 콜레라는 적어도 40회가 발생했으니 평균적으로 2년에 1번꼴로 유행했던 셈이다. '다음백과'에는 콜레라를 '독소형 콜레라균(V. cholerae O 1 또는 V. cholerae O 139) 감염에 의한 급성 설사 질환'이라 정의하고, '감염되면 대개 24시간 이내 발현되어 심한 설사와 구토가 동반되나 복통과 발열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간단히 치료된다'는 설명을 달았다. 아울러 적절히 치료하면 사망률은 1% 미만이라고 첨언했던 바, 언뜻 감기보다도 가벼운 질병처럼 여겨진다.



    웬지 눈에 익숙한 콜레라균

    그러고보니 예전 생물 교과서에서 본 거 같음. 아무튼 이쁜 사진을 골랐음.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병리학자나 세균학자가 아니니 콜레라균의 성격이나 발병 후의 증상 등에 대해서는 타인의 지식에 의존해야 되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전염병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히스토리아문디 04, 이산, 2005)에서의 콜레라는 세상 어떤 악마보다도 무섭다. 그 책과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나타난 콜레라의 위력과 전파 과정을 눈에 띄는대로 옮겨 쓰자면 다음과 같다.


     

    혹시....?

    콜레라균 감염 환자는 쌀 뜬 물과 같은 설사를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해댄다 함. 그러니 피골이 상접할 수밖에.....



    이 질병은 원래 인도 벵골 지방의 오래된 풍토병이었는데, 가끔 인도 내 다른 지역이나 이웃 나라에 번져 전염병으로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콜레라는 물 속에서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병원균 때문에 발병한다. 일단 입을 통해 들어온 콜레라균이 위산에 의해 죽지 않으면 소화기 내에서 급속하게 증식해 설사, 구토, 고열 등 심한 증상을 일으키며 발병한 지 몇 시간만에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 콜레라가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간다는 점은 특히 위협적이었다. 이 전염병이 돌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돌연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콜레라의 증상은 아주 끔찍했다. 탈수가 심하게 진행되면 환자는 몇 시간만에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고,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피부색도 검푸르게 변했다. 이런 모습은 죽음을 독특하게 연출하는 효과가 있었다. 마치 저속으로 촬영한 영화처럼 육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생생히 드러내는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콜레라는 때때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1831년에 콜레라가 처음 발생했던 카이로에서는 총인구의 13%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인명피해가 그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콜레라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인 충격은 컸다. 콜레라는 검역조치를 비롯한 모든 인위적인 장벽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콜레라는 모든 계층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지만, 주로 유럽 도시의 하층민을 희생시켰다. 요컨대 콜레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근래에 유럽인이 경험해보지 못한 특이한 질병이었다. 사람들은 광란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고 그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이 질병이 처음 유럽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817년 캘커타의 배후지에서 상당히 심각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였다. 거기서 콜레라는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얼마되지 않아 인도 대륙과 인근에 한정되었던 이전의 경계에서 벗어났다. 다시 말해 잘 확립된 경로를 따라 인도 대륙 곳곳에 퍼지던 콜레라의 기존 패턴이 영국의 주도하에 조성된 각종 교역로나 군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전파되는 새로운 패턴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지역에는 콜레라에 대한 저항력인 관습적인 대응책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하면 콜레라에 즉방으로 감염됩니다."

    콜레라에 걸리는 방법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설명했다.



    콜레라는 두 경로를 따라 확산되었다. 하나는 육상을 통한 전파로, 그 범위는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1816~1818년에 인도의 북부 국경지대에서 일련의 전투를 벌였던 영국 군대는 자신들의 본부가 있는 벵골에서 콜레라를 옮겨와 적군인 네팔 및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퍼뜨렸다. 해상을 통한 콜레라 전파는 이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콜레라는 1820~1822년 배편을 통해 실론,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대륙부, 중국, 일본에 확산되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을 침범했고, 북쪽으로 올라가 시리아, 아나톨리아, 카스피해 연안을 차례로 공격했다. 그리고 다른 한 파는 아프리카 동부해안을 타고 남쪽으로 퍼져 나가 유행됐다.



    1822년까지의 전파 범위



    그러나 이 유행은 1830년대에 범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된 콜레라 대유행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새롭게 유행한 콜레라는 1826년에 벵골 지방에 나타나 새로운 전파경로를 타고 신속하게 러시아 남부로 침투했다. 러시아는 1826~1828년에 페르시아와, 1828~1829년에 터키와 전쟁을 치렀고, 1830~1831년에는 폴란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런 군사행동을 통해 1831년 콜레라는 발트해까지 도달했고, 거기서 배편으로 영국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일랜드에 칩입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따라 캐나다에 상륙한 이 질병은 남하를 시작해 1832년에는 미국으로, 1833년에는 멕시코로 퍼져나갔다.


    콜레라가 처음으로 유럽의 심장부까지 칩입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1831년 이슬람 교도의 순례 때 이 병이 메카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번에는 유행의 지리적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으니 서쪽으로는 모로코, 동쪽으로는 민다나오 섬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후 메카와 메디나에서 콜레라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1912년까지 이 무서운 전염병은 으레 이슬람 교도의 순례를 따라다녔다.


    흰두교도의 순례에 이어 이슬람교도의 순례가 콜레라의 확산경로에 추가됨으로써, 인도 이외의 지역도 이 새로운 질병에 감염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또한 19세가 중반부터 기선과 철도의 이송속도가 빨라지면서 콜레라가 세계 주요 도시로부터 전세계에 확산되는 과정도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세기에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콜레라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이 질병은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전염병으로 페스트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인도에서 콜레라는 너무 흔한 질병이었던 탓에 특별한 충격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도의 경계를 벗어나면 사정은 달랐다. 이슬람 교도들은 오랫동안 페스트를 신의 섭리라고 여기고 체념해왔으며, 유럽의 격리검역 조치를 흥미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콜레라가 연출하는 끔직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처음 목격한 이집트와 그밖의 이슬람 세계 주민들은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슬람의 의학적 종교적 전통은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콜레라가 야기한 대중의 공포감은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인 지도력과 권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결국 유럽 의학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듯 1821년(순조 21년) 곧바로 평안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의주와 평양 등에서 '설사와 구토를 하다 말라죽는 돌림병'에 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어 콜레라는 조선팔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순식간에 퍼졌던 바, 한양에서는 15만이 죽었고 각 도에서도 10만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에 임금 순조에게는 각지의 상소가 쇄도하였고, 이에 순조는 감옥에 있는 죄인 중 설사가 심한 자를 석방하고, 청나라 사신에게도 소홀한 접대에 대한 양해를 구한 후 백성들을 진무하는 광경이 <순조실록>에 등장하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怪疾)이 유행하여 토사(吐瀉)와 관격(關格)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일 동안에 자그마치 1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확산될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 사망자의 숫자와 돌림병의 상황은 앞으로 잇달아 아뢸 생각입니다."(평안 감사 김이교의 상소)


    "3개월 동안 장마가 계속되어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또 갑자기 이름도 모를 돌림병이 서울과 지방에 만연하였으므로 경각간의 창황(蒼黃)이 수화(水火)보다 더 위급하였으며, 도처에 참혹한 광경은 병란(兵亂)보다 더 심하였으니, 이는 지난 역사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그들이 이토록 시달리고 있으니, 그 억울한 기운이 족히 화기를 침범하여 재앙을 부를 만합니다....."(부교리 김난순의 상소)


    "한밤중에 천둥과 번개가 갑자기 양기(陽氣)가 수장(收藏)하는 달에 발생하였습니다..... 비록 목전의 일로 말하더라도 지금 돌림병이 번지어 팔도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살아 있는 사람도 난리를 치를 것 같아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신들처럼 불초(不肖)한 사람을 속히 파직시키고, 다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구하소서."(좌의정 남공철과 우의정 임한호의 연명 상소)


    "지금 양(陽)이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에 이처럼 우레가 친 재앙이 있는 것은 어찌 초래할 만한 까닭이 없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돌림병이 몇 해를 끌어 사망자가 팔도에 널렸고 극심한 가뭄이 몇 해 동안 들어 곳곳의 농사가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상으로 하여금 외롭게 하고 당금의 걱정이 끝이 없는 것은 첫째도 신 등의 죄이고 둘째도 신 등의 죄입니다. 신 등을 면직하고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다시 가리라고 명하소서."(삼사 대신들의 연명 상소)


    임금이 하교하기를,


    "돌림병이 매우 괴이하니 체류된 죄수들이 민망스럽다.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도록 하라."


    임금이 또 이르기를, ‘여러 대인들이 영광스럽게 해외(海外)에 왕림하신 것이 오로지 소방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고 보면, 접대에 더욱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다만 이때 국상(國喪)을 당하여 물력(物力)이 쪼달리고 또 돌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므로 연로(沿路)에서 접대하는 것이 반드시 형편이 없었을 터이니, 주인된 입장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재앙을 만났으니 참으로 참담한데, 길에서 살펴볼 때 모든 것이 매우 타당하였으니 천만 감사합니다.’ 하였다


    경신년(1822)에 하교하기를,


    "지금 제주 목사의 장계를 보건대, 돌림병이 치성하여 조그만 섬에서 수천 명이 넘게 인명이 손실되었다고 하니, 놀랍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묘당으로 하여금 위유 어사(慰諭御史)를 파견하여 제주 목사와 함께 위안제(慰安祭)를 설행하여 생사(生死)에서 헤매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울러 민간의 고통도 살피고 오게 하라."


    두 해 동안 전국에 만연했던 콜레라는 그 이듬해인 1822년 10월 다행히 진정국면을 맞는다. 이에 순조는 활인서와 혜민서에 환자들을 구료(救療)해줄 것을 명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고 내탕금(內帑金)을 내어 백성들을 위무하였는데, 1821(~1822)년 중국 헤베이와 산둥에서 발생한 콜레라가(위 책의 부록) 그해 바로 조선에 퍼진 것은 매우 빠른 일이다. 아마도 홍경래의 난 이후 척박해진 평안도 땅에 홍수와 흉년까지 겹쳐 인적·물적 환경이 모두 열악해진 탓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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