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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스트에 내몰린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 (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2. 25. 19:42

     

    나폴레옹의 이집트 · 시리아 원정길에 창궐했던 페스트는 흔히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을 만든 전염병'으로 불린다.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젊은 나폴레옹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1798년, 29살의 군사령관 나폴레옹이 3만 5천 명의 육군과 1만 5천 명의 수군으로 동방 원정에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나폴레옹의 동방 원정은 대불대동맹(對佛大同盟)[각주:1]의 주축국인 영국을 견제함과 동시에 인도와 이집트로 이어지는 영국의 해외 보급로를 마비시켜 실질적인 데미지를 입히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원정은 나폴레옹의 계획이 아니라 시민혁명의 지도자들이 내몬 것이었으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789년의 프랑스 시민 혁명은 유럽 주변 나라의 왕들을 하루아침에 바늘방석 위에 올려놓았다. 만일 다른 나라의 백성들도 이 짓을 따라 하면 자신들도 언제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은 대불대동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결성, 프랑스 시민 혁명을 와해시키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가히 난세의 영웅이랄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젊은 포병 장교가 툴롱 항(港)의 포격을 기점으로 이와 같은 대불대동맹을 모두 무너뜨렸던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대불대동맹의 주축국인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원정해 전리품을 거둬오는 경이로움을 선사하기도 했다.(두 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롬바르디아 평원과 벨기에를 할양받는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27살 사령관의 모습을 최대한 폼나게 표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시민 혁명 지도부의 목이 걱정되어졌다. 이제는 나폴레옹이라는 자가 주변 나라의 왕들보다도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으니 어느덧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려던 것이었다. 아예 숙청을 시켜 싹을 잘라버리고도 싶지만 명분이 마땅찮을 뿐더러 다른 유럽 국가, 특히 영국의 군사적 위협이 걱정되었다. 지금 당장 그들 국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줄 사람은 나폴레옹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걱정은 나폴레옹이 딴 마음을 먹는다는 전제 하의 일이었던 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이에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다. 가서 죽어주면 가장 좋겠지만 최소한 군사력은 잃고 돌아오게 될 터, 일단은 그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숙청의 명분이 될 만한 잘못을 하고 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폴레옹은 5만 병력을 이끌고 그 옛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원정하듯 기쁜 마음으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1789년 7월 3일, 이집트 서쪽 항구 아부킬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다음날 곧장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다. 이어 수도 카이로를 점령하기 위해 최단거리인 사막을 횡단한 그는 피라미드 근방의 마을 암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마멜룩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7월 21일)


    이때 나폴레옹이 끌고간 병력은 보병 2만이었고 마멜룩의 군대는 기병 6천, 보병 3만 4천 명으로, 은폐와 엄폐를 할 수 없는 사막 전투에서는 누가 봐도 승패가 미리 보이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각 모서리에 포를 배치한 방진(方陣)의 대형을 갖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 않은 채 몰려드는 이집트 기병대를 향해 사격을 가하도록 했다. 



    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로(1798-1799)


    F. L. 조셉 와테우가 그린 '피라미드 전투' 



    결과는 뜻밖에도 프랑스 군의 대승이었다. 나폴레옹은 수적 열세인 그 싸움에서, 우선은 상대에 비해 우수한 프랑스 군의 화기를 믿었고,(샤를르 머스켓 소총) 다음은 프랑스 군의 용기를 믿었다. 프랑스 군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저들의 기마병 앞에서도 쫄지 않고 전열의 붕괴 없이 침착하게 적을 쏘아 넘어뜨렸고, 적들이 바로 코 앞에 와서 머스켓 소총의 발화장치에 적의 옷에 불이 붙을 지경이 되었어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총을 쏘았다.


    이에 갈수록 이집트 군의 사상자는 늘어갔고 결국 마멜룩은 군대를 거둬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까지도 대형을 유지했던 프랑스 군의 사상자는 2백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이집트 군의 전사자는 3천 명이 넘었다. 마멜룩은 군대는 나머지 병사들을 수습해 나일강 상류 쪽으로 달아났다. 나폴레옹은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에 눈을 두었을 뿐 굳이 도망가는 자들을 쫓지 않았다.(이 전투가 피라미드 일대에서 벌어졌다 해서 '피라미드 전투'라 불린다) 


    암바베는 카이로와 불과 6Km 떨어진 마을이었던 바, 프랑스 군은 다음날 카이로에 무혈입성했다. 이집트에 도착한 지 3주만에 수도에 입성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동반한 167명의 학자들과 유적을 돌아보고 사흘 뒤인 7월 25일 카이로에 들어왔다. 이후 학자들은 프랑스 군대의 비호 아래 이집트의 지형, 식생, 환경, 유적을 조사하고 고대 이집트의 여러 유물들과 자료들을 수집하였는데, 유명한 로제타 스톤도 바로 이때 발견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미인이었나?')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

    장 레옹 제롬이 1867-68년 이집트를 찾아가 그렸다. 요즘으로 보면 '합성' 같은 이미지이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림이다. 61.6x101.9cm, 캘리포니아 센시메온 하스트 캐슬 소장


    제타 스톤

    높이 114.4cm, 너비 72.3cm, 두께 27.9cm의 화강섬록암으로 브리시티 박물관의 중요 소장품이다. 1799년 알렉산드리아 동쪽 로제타 마을에서 이집트 원정대의 초급장교가 발견했으나 이집트 전투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패하며 전리품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그리 순탄치 않았으니, 이집트에의 영향력을 크게 잃었다 해도 어찌됐든 이집트를 상실한 꼴이 된 오스만 제국은 곧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허레이쇼 넬슨의 영국 함대는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침시켜 보급로를 끊었으며, 카이로에서는 프랑스 군에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 군인 300명이 죽었다. 또한 나일강 상류로 도망간 마멜룩도 전열을 정비해 공격을 개시했다.


    나폴레옹은 일단 카이로의 폭동을 진압한 후 남부 이집트로 별동대를 보내 마멜룩의 진격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은 1799년 2월 11일, 참전한 오스만 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팔레스티나의 야파(욥바)로 진격했다. 3월 7일 야파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3월 14일 아코(아크레)를 향해 나아갔다.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총독 아미드 파샤 알 자자르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 알 자자르는 빈민 출신으로 시리아 총독의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매우 흉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단지 기분 전환용으로써 사람의 눈을 파내고 코와 귀를 자르고 혀를 뽑는 자였다. 여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음에 안 듣다는 이유 하나로 생가죽을 벗겨냈다. 알 자자르의 이와 같은 악행은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에까지 알려졌던 바, 나폴레옹은 그와의 싸움을 당연히 쉽게 생각했다. 그의 악평과 아코 성의 편향적 방위 체계가 싸움을 쉽게 이끌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바다 쪽은 난공불락이나 육지 쪽은 공격이 쉬웠다) 그렇지만 생각과 달리 아코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니, 두 달 후인 5월 17일에 이르러 결국 군사를 물러 후퇴하게 되었다.



    아코 성 전경
    1191년 7월 사자왕 리차드와 존엄왕 필립이 분전한 3차 십자군이 이 성을 회복해 아코를 수도로 하는 신생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다.


    아코 성 전경
    이후 아코와 그 일대는 1세기 가량 번영하였으나 1291년 이집트 마멜룩 왕조의 투르크 군에 함락되며 십자군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역전(歷戰)의 나폴레옹이 아코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당시 창궐한 페스트로 인해 전력이 상실된 탓이었다. 나폴레옹이 철군을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 아래 <야파의 페스트 환자를 돌보는 보나파르트>라는 그림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나폴레옹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페스트 환자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버리고 철수해야 했던 바, 종군 화가였던 앙투앙 장 그로로 하여금 이 대작 그림을 그리게 한다.(523x715cm) 자신이 병사들을 얼마나 아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광고판과 같은 그림이었다.


    ~ 그림 속에서 나폴레옹이 페스트에 걸려 부은 병사의 겨드랑이 임파선을 만져주려 하자 그 옆의 군의관이 황급히 만류하고 있다. 나폴레옹 뒤에 선 장교는 상황의 비참함을 견디기 어려운 듯 수건을 입에 굳게 물었다.



    앙투앙 장 그로가 그린 <야파의 페스트 환자를 돌보는 보나파르트> 1799년, 루브르 박물관


     그림의 세부



    나폴레옹은 결국 이들에게 아편을 나눠주고 안락사를 유도한 후 카이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 본국 프랑스에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바, 결국 몇몇의 측근과 함께 이집트를 빠져 나와 파리로 돌아간다.(이후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제 1공화국 총재 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에 취임한다)


    이집트에는 최소한 3만 명 이상의 프랑스 군이 단절된 보급 속에서, 그리고 이집트 각지로 퍼진 페스트 속에서 이슬람 군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이들은 그 2년 후인 1801년, 영국군과 오스만 제국에 항복을 한 후 프랑스로 귀국하였고, 나폴레옹은 제 욕심으로 인해 부하들을 사지(死地)에 방치했다는 오명을 두고두고 간직하게 된다.

     

    1.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시대까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1792~1813년 사이에 다섯 번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 맺어진 동맹을 통틀어 이르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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