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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일본부의 정체(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3. 22. 02:08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서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게 되면 거대한 고분들이 쉽게 눈에 잡힌다. 고분들은 어림잡아 백여 기로, 그것들이 너른 들판 가운데 위치하기도 했지만 군집을 이루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 무덤군은 크게 반남면 무덤군과 다시면 무덤군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반남면 무덤군의 신촌리 9호분이라 명명된 무덤에서 지난 1917년,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형태의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역시 이제껏 한번도 본적이 없는 독특하고 거대한 옹관 속에서였다.

    사람들은 그 금동관으로부터, 또한 같이 묻혀 있던 둥근 머리 큰 칼(환두대도)과 그것들이 발견된 거대한 옹관으로부터, 무덤의 주인공이 일대를 다스리던 지배자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곳 영산강 일대에 저 너른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하는 풍요로운 고대왕국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만 거기까지였다. 이 거대한 옹관 무덤들을 축조했던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들은 매우 짧은 시간, 이 영산강 일대에 독특한 저들만의 문화를 창출하고 사라진 것이었다.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


    반남면 덕산리 고분군


    반남면 고분군

    그림에서 보여지듯 원형의 무덤과  방형의 무덤이 산재한다.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


    금동관의 세부(국보 295호/국립광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의 옹관

     

    국립중앙박물관의 나주 복암리 옹관



    옹관의 용례

    이렇게 암수가 짝지어진 옹관 안에 시신을 단구로, 혹은 여럿을 함께 안치한다.



    그 사람들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한 시도가 1917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고적도보연구회에서 있었다. 원래 책임자는 우리의 귀에 익은 도쿄제국 대학 세키노 다다시 교수였으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고 조사원 야스이 세이이쯔(谷井濟一)가 책임자가 되었다. 야스이 세이이쯔는 당시의 발굴 조사에서 위의 신촌리 9호분을 첫 발굴지로 지목했다. 그 무덤이 이 선정된 것은 규모가 장대해서였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자주 보이지 않는 (하지만 일본 고대무덤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주구묘(周溝墓, 무덤 둘레에 도랑을 두른 무덤)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곳에서는 위의 금동관을 비롯한 지배자급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어 기대에 부응했다.(1917년 12월 23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지금은 원형으로 복원되었으나 처음의 모양은 아래 사진처럼 방형(方形)에 가까웠다.


    신촌리 9호분 발굴 때의 사진

    총독부 소속 사진기사이자 화가인 오바 스네게치가 찍었다. 봉분 주변의 주구(도랑)가 확연하다.qhdq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대형 옹관과 토기


    금동관과 환두대도 등이 나온 신촌리 9호분 을관(乙棺)



    야스이 세이이쯔는 쏟아지는 유물에 고무되어 발굴이 지속되기를 원했지만 예산부족으로 부득이 철수하고, 그 이듬해인 1918년10월 다시 나주에 와 2차 발굴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야스이는 훗날 임나일본부 설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획기적인 유물을 발견하게 되는 바, 다름아닌 고분의 정상부 가장자리에 둥그렇게 묻힌 기다란 형태의 토기들이었다.


    이 토기들은 일본에서 '하니와(埴輪)'라고 부르는 것으로, 4~7세기 일본 고분 시대의 대형 무덤 가장자리에서 발견되는 그것들과 형태와 형식이 매우 흡사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써 총독부에 올리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고분들은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倭人)의 무덤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란 제목의 특별보고서로 제출하겠다."

     

    야스이가 말한 보고서는 그가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결국 제출되지 못했다. 그리고 반남면 고분을 비롯한 나주의 고분들은 전국의 도굴꾼만을 불러들인 채 황폐화되었다. 이후 일본인의 관심은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화려한 신라 금관이 발굴되며 그쪽으로 집중되었고 나주 고분은 차츰 잊혀져갔다. 하지만 '아마도 왜인의 무덤일 것'이라는 야스이 세이이쯔의 한마디는 잊혀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일본서기>의 내용, 즉 진구황후가 삼한을 정벌해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로 적극 활용되어졌다. 정말로 무서운 말 한마디였다.'


     

    「潘南古墳 埴輪」の画像検索結果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된 반남 고분군 출토 토기(하니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한반도의 남부는 고대부터 일본령이었다'(일본서기)


    "알고 았습니까? 한국에서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 역사, 임나일본부"

    임나일본부는 실제적으로 일본 학계에서 폐기된 학설이다. 하지만 지금도 극우단체를 비롯한 일부 단체에서는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주의 무덤들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 문화재청의 발굴조사와 정비로 그 외형이 드러난 광주와 전라남도 일원의 고대 무덤들 때문이었다. 그 무덤들은 주구묘, 그중에서도 앞은 네모지고 뒷부분은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형식을 하고 있었다. 이 무덤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흥분했다. 그들은 전방후원분이 일본 고유의 주구묘 양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므로 한반도에서 출현한 전방후원분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일은 한동안 침잠했던 임나일본부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중 요미우리 신문의 내용을 보자.

     


    광주직할시 월계동 전방후원분


    (크기를 가늠하고자 넣은 사진)


    월계동 장고형 고분군


    광주직할시 명화동 전방후원분


    「光州 前方後圓墳」の画像検索結果

    명화동 장고분 안내문


    * 전남 함평의 장고형 고분을 다룬 경향신문 기사


    * 전남 해남의 장고형 고분을 다룬 경향신문 기사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을 다룬 요미우리 신문 기사

    기사의 요지는 일본의 고대 전방후원분의 축조시기가 한반도의 축조시기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사진과 함께) 광주시 월계동의 축조시기는 이 주변이 마한(馬韓)이라고 불리던 때로서, 백제와 왜(일본)가 지배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과거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일시 '일본 전방후원분의 뿌리가 아닐까'하는 설이 부상했지만 축조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다.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의 축조가 시작된 3세기보다 후반의 일로 판명되었던 바, 관심은 축조 이유와 피장자에게로 옮겨갔다.....


    이 기사는 우익 신문인 요리우리의 기사답게 매우 교묘하다. 전방후원분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는 척, 내용을 흘리다가 그것이 오히려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최종점은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가 될 것이다.(일본 학계에서 말하는 그 무덤들의 축조 이유와 피장자,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축조 이유와 피장자에 관해서는 3편에서 따로 다룰 생각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 정권의 상징과도 같다. 즉 일본의 지방 호족들이 야마토 정권에 정권에 복속하여 야마토 문화를 숭요한 증거로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였다는 것이 일본 사학계의 정설인 바, 그와 동일한 묘제(墓制)가 한반도에서 출현했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축약될 수밖에 없다. 그 첫번 째는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며, 두번 째는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이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에 말빨에서 뒤진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시기적으로 일본에 뒤쳐지는 바, 결국 야마토 왜의 세력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짜증나게.....) 사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그 본류의 나라답게 크고 웅장하니 그중 오사카부(府) 사카이시(市)에 있는 다이센(大仙) 고분은 모든 묘제를 망라한 세계의 무덤 가운데서 가장 크다.



    다이센 고분

    전체 길이 486m, 봉분 길이 305m, 후원(後圓)의 지름 249m, 높이 34m의 세계 최대 무덤이다. 닌코구천황(257-399)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으나 5세기경 축조된 고분으로 실제 주인공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일본 학계의 전방후원분 축조 학설에서 한가지 말미를 찾을 수 있다. 전방후원분은 야요이시대 후반(3세기 후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해 일본 고유의 묘제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 후쿠오카현 마에바라시(前原市) 히라바루(平原) 유적에서 보이는 방형주구묘의 흔적이 바로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는 것이다.(그밖에서 규슈에서 관동지방에 이르기까지 방형주구묘는 일본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할 말이 있다. 일본의 방형주구묘에 앞서는 한국의 3세기 고분에서도 방형주구묘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까닭이니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1993년 발견된 충남 공주군 장기면 하봉리에서 발견된 주구묘와, 1996년 충남 보령군 주교면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이다. 특히 관창리 것이 발견되었을 때 일본 NHK에서 특파원을 파견해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유는 그 무덤이 히라바루 유적의 주구묘보다 최소한 100년 이상 앞섰기 때문이었다.




     

    히라바루 주구묘 유적과 안내문


     

     공주 하봉리 주구묘 유적



    충청도의 방형 주구묘는 서해안을 따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다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전남 나주시 노안면 안산리 등에 유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남쪽으로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남 함평군 월아면 예덕리, 월야리의 다양한 형태의 주구묘, 4세기 나주 반남면의 옹관묘 유적으로 남기도 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가 규슈 지방에 유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히 묘제만을 전파한 것은 아닐지니 1999년 히라바루 주구 유적에서 발견된 구리거울은 일본열도를 가히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본 최대의 구리 거울이 발견된 히라바루 무덤 주구


    히라바루 무덤 동경



    과거 가나안 땅에 상륙한 블레셋인들이 어디에서 온지 알 수 없 듯 나주지방 옹관묘 사람들도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사실 역사에는 이런 미스터리가 흔하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해류를 따라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의 서해안(지금의 충남 서해안)에 상륙하였고 점점 남하하여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 곡창지대에 밀집해 살게 된다. 또 그들의 일부는 그곳에서 다시 해류를 따라 바다를 건너가게 되는데, 그들이 도착해 살던 곳이 바로 후쿠오카현 마에바라시(市)이다. 히라바루 유적이 발견된 바로 그곳이다.


    그들의 왕래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2007년 2월 나주 영산강 중류 영동리 옛 무덤군에서 발견된 온전한 형태의 인골 2기이다. 그 인골은 한국인보다 규슈 지방의 고대 인본인 인골과 가까웠다. 영산강 유역 사람들은 그때부터 일본열도를 왕래했던 것이다. 1986년 사가현에서 발견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 영산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

     

    요시노가리 유적의 위치



    해류에 쓸려 온 규슈 사가현 가라스(唐津) 해안의 한국 쓰레기


    같은 형태의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한반도 남부지역과 사가현 지역


    영산강 입구의 등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이 등대는 내륙 수로로 쓰인 영산강의 산 증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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