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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 이집과 둔촌동에 얽힌 여러 이야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6. 19. 21:21
앞서 '백제 사찰 암사(岩寺)가 있던 암사동'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집(李集, 1327~1387)의 호 둔촌(遁村)에서부터 비롯됐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둔촌은 '시골로 피해 숨다'는 뜻이지만 실은 이집의 강골 성향을 반영한 아호이니, 그는 공민왕 17년(1368년)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다가 박해를 받고 멀리 남경의 촌구석까지 달아났다.
이후 남경 부근의 일자산(一字山) 토굴에 숨어 생활하다 신돈이 실각한 후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집은 이때 은거 당시의 고난을 잊지 않고 새기려 호를 둔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실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둔촌동 보훈병원 뒤의 일자산 둔굴은 그가 은거했던 곳이라 전하며, 조선 현종 10년(1669) 둔굴과 가까운 암사동 옛 암사 자리에는 이집을 주벽(主壁)으로 하는 구암서원이 세워졌다.
현대에는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둔촌동에 숨어 살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자로 유명한 안두희(1917~1996)였다. 육사 8기 졸업 후 육군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자유당 졸개 포병사령관 장은산 등의 사주를 받아 1949년 6월 26일 서대문구 경교장에서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이후 그는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곧 15년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군인으로 원대복귀하였다.
종전 후 완전 복권된 그는 이후 군에 콩나물과 부두 납품을 하며 군납업자로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테러를 당했고, 그 와중에 가족들은 이민을 떠났는데, 그 역시 이때 이민을 시도했으나 출국금지자로 지정된 탓에 공항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이후 그는 둔촌주공아파트 126동에 입주해 죽은 듯 숨어 살다 1996년 10월 23일 택시기사 일을 하던 박기서에 의해 살해되었다.
안두희는 테러 전인 1992년 2월 효창공원 내에 있는 백범 김구의 묘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백범 암살의 배후를 말하지 않아 그 내막은 결국 추론의 몫이 되고 말았는데, 앞서 소개한 바 있는 경무대 배후설을 주장한 홍종만의 증언이 거의 팩트에 가까울 듯싶다. (☞ '광주 정율성 거리와 인천 백범김구 거리')
둔촌동하면 1979년 지어진 둔촌주공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59만4000㎡ 대지 위에 5930가구가 건설된 둔촌단지는 이 단지 하나가 둔촌1동을 형성했는데, 서울시가 강동구과 하남시의 접경 벌판지대를 택해 잠실주공아파트 다음으로 건설한 대규모 아파트단지였다. 까닭에 모든 근린생활 시설이 망라돼 있었고, 학교도 차례차례 옮겨오거나 새로 개교했다. 둔촌주공아파트는 한마디로 웬만한 군(郡)과 맞먹는 규모였다.
학교는 장충동에 있던 동북중학교와 동북고등학교가 이전을 해왔고 서울둔촌초등학교와 서울위례초등학교도 개교했는데, 1989년 서울올림픽 이듬해에 한국에 들어온 나는 동북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개포동 인근의 시골 음식점(당시는 시골이었다)에서 구운 고기 몇 점을 곁들인 된장찌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분을 만난 것은 당시 막 시작한 사업의 투자자 유치를 위해서였지만,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정말로 뛰어났던 된장찌개 맛과 그분의 전교조에 대한 장탄식이다.
당시 나는 사업설명회에 미처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개별적으로 찾아 사업설명을 해드렸고, 당시 정년을 앞두었던 그 교장선생님과도 그렇게 만난 경우였다. 그때 그분은 전교조의 발호와 당국으로부터의 압력에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던 중이었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말을 하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격자의 풍모가 담뿍 묻어나는 어른으로써 함께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장의 어려움이 아니라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배운 우리 학생들이 펼칠 미래 때문이다.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전교조 교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가 의식화학습과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의 좌경화된 언어는 어쩌면 학생들의 평생을 좌우할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 학생들이 어른이 되는 날, 우리 사회는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비정상적인 구도가 될는지 모른다. 물론 그때 나는 살아 있지도 않겠지만."
그 선생님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생존은 해 계실까? 아무튼 예언(?)은 신통하게 들어맞았으니, 최근의 선거 결과에서도 그분의 걱정은 여과 없이 투영되었다. 내가 아는 한, 둔촌주공아파트는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입주한 대표적인 아파트였다. 그래서 그 자식들도 중산층이 될 확률이 높은 세대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예전과는 다르게, 그리고 세계적 추세와도 다르게 중산층이 좌경화되는 특별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둔촌주공은 용적률 90%로 밀도가 낮았음에도 녹지공간이 풍부했다. 그래서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서울의 많지 않은 아파트단지였다. 따라서 쾌적할 수밖에 없었으니, 둔촌주공에 살다가 구리시 최초의 고층아파트인 동구릉 건영아파트단지로 이사 왔던 한 친구는 술만 먹으면, "둔촌동은 이러지 않았는데.... 둔촌동은 참 좋았어"를 주사처럼 되뇌곤 했다.
둔촌주공아파트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작가 이인규는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고향 둔촌주공아파트는(그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5930세대의 단지 안에 초등학교 2곳, 어린이 놀이터 12곳, 테니스장 5곳, 휴게공간 26곳, 3개의 큰 상가, 기타 점포 상가가 배치되어 생활 대부분을 단지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였다. (2021년 석사학위 논문도 '둔촌 주공아파트 단지 생애사 연구'였다. 그는 둔촌주공 아파트를 더 연구하고 싶어 대학원은 건축학과를 다녔다고 했다)
그는 "둔촌주공을 떠나는 것이 슬펐다. 모든 게 사라지는 과정에서 허무함을 느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는 출간의 변(辯)을 적었다. 2017년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는 철거됐다. 이후 재건축정비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으로 관심을 모은 가운데, 시공사업단과 재건축조합 간의 갈등 및 금리인상에 따른 부동산경기 위축 등의 위기를 넘기며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세월은 또 변해, 대박의 예상과 달리 간신히 분양 미달을 모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아무튼 올 11월이면 재건축사업이 완료되어 옛 둔촌주공 자리에는 지하 3층~지상 35층 85개동 규모, 1만2032가구의 '올림픽파크 포레온'이 들어서게 된다. 옛 둔촌주공의 거주자로서 입주를 기다리고 계신 티스토리 블로그 운영자께서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데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 글을 올리신 적이 있는데, 십분 공감하는 바이다. 요즘처럼 길고 휘황한 아파트 이름 대신 둔촌△△아파트로 했다면 훨씬 임팩트 있고 오히려 고급지게 느껴졌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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