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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찰 암사(岩寺)가 있던 암사동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6. 8. 13:22
지난 주말 강동구 풍납동 '바람드리길'을 걸었다. 바람드리길은 풍납동, 풍납토성 등에 사용되는 한자어 '풍납'(風納)을 순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다. 바람 풍(風) 자에 드릴 납(納) 자를 쓰니 '바람드리'가 된 것인데, 좀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귀염성이 느껴지는 단어이다. '바람드리길'은 풍납토성을 빙 도는 2.1 킬로미터의 전체 산책로를 이르는 말이다.
바람드리길에 지번이 붙는 도로명 주소가 따로 정해져 있음에도 풍납토성 산책로가 '바람드리길'이라고 명명된 이유는 아마도 풍납토성의 존재를 강조하고자 함일 게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풍납토성은 백제가 무려 500년간(정확히는 BC 17년부터 AD 476년까지의 493년간)이나 도성(都城)으로 삼았던 곳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공주(웅진)성과 부여(사비)성은 합쳐봐야 185년에 불과하다.(웅진 시기: 476~538, 사비 시기: 538~660)
다시 말하지만 백제는 이렇듯 장시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존재했음에도 우리가 백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공주나 부여로 가야 한다. 서울이나 그 인근에서는 백제의 흔적이 사라졌거나, 혹은 있더라도 잊혔기 때문이니 풍납토성 안에 사는 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백제의 도성에 거주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분은 드물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니 아래의 경당지구 음수전(음수대)은 백제의 토기가 다량 출토된 경당지구 우물로서, 옛 백제 왕성의 한가운데 자리한 우물이었음에도 지금은 그저 이러할 뿐이다. (게다가 수도꼭지가 작동을 하지 않아 음수전 구실도 못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에게 백제 왕성지로 익숙한 경당지구의 '경당'은 백제 때의 건물과는 무관한, 발굴되기 전 이곳에 자리했던 연립주택의 이름이다.
우리가 잊고 있거니 잊힌 것은 이뿐만이 아니니,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가 하남 위례성(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백제수도)에 정도(定都)하기 전 잠시 수도로 삼았다는 이른바 하북 위례성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남하한 온조는 한산에 이른 뒤 정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보이는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가 띠처럼 둘러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야가 바라보이고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도읍으로써 적격이라며 천도를 단행했다.
여기서 부아악은 북한산으로 비정되며 특별히 문제거리가 없어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하북 위례성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십인십색이라 내가 따로 지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온조와 유민들이 도강한 곳은 필시 지금의 워커힐 호텔 아래쪽의 강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별다른 자취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부아악에서 본 남쪽의 땅, 즉 지금의 암사·풍납·송파동 벌판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표 삼아 도강했을 것으로 보이는 암사동 큰 절벽 아래에는 앞서 말한 하남 사천왕사(☞ '백제 첫 사찰은 하남 천왕사?')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백제 사찰이 건립되었지만 이 또한 잊혔다. 이 절은 흔히 백중사(伯仲寺)라 이르는데 백제시대 때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절이라는 의미로서 백중사라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혹자는 이 절을 한성백제 최초의 절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절터는 1987년 4월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동국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한 발굴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습한 유구와 유물은 대부분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이었고 백제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에 역사적 근거가 희박해졌음에도 한성백제박물관의 이장웅 학예사를 비롯한 연구가들은 발굴 후 관련된 자료가 충분히 보고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여전히 백제사찰 쪽에 무게를 두고 있고, 암사동 동네 어르신들도 백제 절 백중사, 혹은 암사(岩寺)가 있던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암사는 강동구 암사동이 비롯된 동명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렇게 불려졌을 수도 있지만 암사는 '바위절'이라는 뜻이다. 발굴조사 때 확인된 막새기와와 석탑옥개석 등을 근거로 암사취수장 입구에는 '바위절터'라는 표석이 세워졌는데, 굳이 표석이 아니더라도 부근의 거대한 절벽과 절경은 누구에게라도 옛 절이 자리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선사한다. 바위절터에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유구도 확인되었는데, 옛 절의 주춧돌을 활용한 조선시대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기 문인인 서거정은 이곳을 두고 시를 지었으니 '푸른 절벽에 걸쳐 있는 옛 절에서 고승(高僧)과 대화를 나누니 마음속 티끌이 사라졌다'고 읊었다. 이것을 보면 암사는 적어도 조선초기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둔촌 이집(李集, 1327~1387)을 배향한 서원으로 바뀌었다. 이집은 고려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서 지금의 강촌구 둔촌동은 그의 호 둔촌으로부터 비롯됐다. 그가 과거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던 둔촌동에 은거한 까닭이다.
위에서 말한 암사 터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바로 구암서원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 서원이 세워진 후 숙종 때 사액되었다. 서원에는 둔촌 이집을 주벽(主壁)으로 6현(六賢)이 배향되었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건물지 앞에는 이집의 후손 광주이씨대종회가 세운 '둔촌 이선생 휘집 조두 구기(遁村李先生諱集俎豆舊基)'의 비석이 서 있어 '둔촌 이집 선생의 제사를 모시던 서원 자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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