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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승려 지공의 승탑이 회암사에 있는 까닭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1. 21:44
인도의 지공스님(指空, śūnyā-diśya, 1300~1363)은 1326년 3월 고려를 국빈 방문했다. 인도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원나라 연경에 머물던 시절에 방문한 것인데 어찌 됐든 먼 길을 온 것만은 분명하다. 인도 마가다국 국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그는 여덟 살 때 라즈기르시(市) 북쪽에 있는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출가해 율현(律賢, vinaya-bhadra)에게 계를 받았으며, 이후 명문 불교대학인 나란타사 부설 나란다(Nālandā) 대학에 들어가 불법을 더 깊이 공부했다.
나란다 대학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학교로서, 과거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이곳을 방문해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한 것을 계기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굽타 왕조(Gupta Empire, 320~550) 시대에는 불교를 배우는 세계적인 장소가 되었던 바, 동진의 구법승(求法僧) 법현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사원대학으로서의 규모가 갖춰진 듯했다.(405년 / <불국기>)
굽타 왕조의 4대 왕 쿠마라굽타 1세(414~455)는 나란다 사원을 불교학, 베다학, 의학, 야금학, 수학, 음악학 등 12개 학부를 둔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7세기 이곳을 방문했던 당나라 현장법사(602?~664)는 그 성세(盛勢)에 크게 놀랐으며, 자신의 저서 <대당서역기>에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이요,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지공은 나란다 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으니, 12세기 말 서쪽에서 들어온 이슬람 세력이 델리-술탄국이 세우며 비크라마실라 사원을 비롯한 불교사원과 대학들을 파괴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나란다 대학은 문을 닫게 되었지만, 졸업생들은 각각의 장소로 퍼져 배운 바를 실천했을 터인데 지공은 중국으로 가 불법을 펼쳤다. 일찍이 인도의 달마가 중국에 선종을 가져왔을 때 실체가 없었듯 지공이 가져온 불법도 눈에 보이는 무엇이 없었지만, 필시 당대 중국에서 유행했던 간화선(看話禪)을 더욱 깊이 있는 참선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지공스님의 사리탑과 탑비가 고려 말에 세워진 양주 회암사에 있어 신기하게 여겨진다. 회암사는 본시 그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1328년 이곳을 방문했던 지공에 의해 중창불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우선 그 앞뒤 상황을 피력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나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있는 점을 볼 때 12세기에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증국사는 보우스님(1301~1382)을 말한다.
지공이 연경 법원사에 머물 무렵, 이미 나옹을 비롯한 고려 유학생들에게 불법을 가르친 바 있었다. 까닭에 고려에 오기 전부터 팬덤이 형성돼 있었고 그로 인해 가는 데마다 인파가 몰렸으니 고려에 머문 2년 7개월 동안(1328년 9월까지) 전국 사찰을 방문해 법회를 열고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법회를 연 곳은 수도 개성의 감로사, 숭수사, 헌화사를 비롯해 아래 지방의 양산 통도사까지 전국의 유명 사찰들은 모두 찾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양주의 작은 절 회암사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지공이 문득 놀라 제자 나옹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곳의 산세가 내가 수학했던 나란타사의 지형과 매우 흡사하도다.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있는 이 절을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로다."
그가 말한 삼산은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요, 양수는 임진강과 한강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불사는 없었고 훗날 나옹선사가 공민왕의 지원하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3년 공사(1374~76년) 끝에 대가람을 완성시켰다. 공민왕은 안타깝게도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불사 첫 해인 1374년에 훙(薨)하였으나 나옹은 끝까지 이를 밀어붙여 완성하였으니 중창 1년 뒤인 1377년(우왕 3), 목은 이색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에 이렇게 썰을 풀었다.
"회암사는 굉장하고 미려해서 동국(東國)에서 첫째이다. 강호를 유람 편력한 자들이 모두 일컫기를 이와 같은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보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과연 과언이 아니로다."
회암사 당대의 규모는 총 262칸의 당우에, 15척짜리 불상이 7구에 달했고 10척의 관음상도 봉안되었다고 하니 전에 없던 대가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당우의 전체 흔적을 찾기 힘든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이곳은 주초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어 옛 가람의 형태를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회암사의 전체 면적은 323,117㎡로 광활함이 느껴지는데, 항간에 말이 나오고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후보로서도 충분한 자격이 느껴진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방자치단체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 중에는 가당찮은 것도 허다하나 회암사지는 그 가치가 충분하다.
궁금한 것은 고려 방문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열반한 지공의 사리탑이 어떻게 회암사에 조성되었을까 하는 것인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지공의 입적 소식을 들은 공민왕이 나옹선사로 하여금 연경에 가 지공의 골사리 중의 일부를 가져와 회암사에 모셨다고 한다. 이후 회암사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번창하였다.
지공선사 승탑에 대한 궁금증은 이렇게 풀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지공이 했다는 예언은 맞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조선 중기를 넘지 못하고 폐사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공의 예언은 엉터리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는 회암사 고찰과 함께 깊이 있게 짚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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