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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학대사와 회암사 3대 화상(和尙)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3. 09:25

     

    II편에서 말했듯 나옹선사는 회암사의 중창불사와 함께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실과(實菓)의 단맛을 누린 자는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옹의 제자 자초(自超, 1327~1405)였다. 흔히 아호를 좇아 무학대사로 불리는 사람이다. 자초는 조선왕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명된 왕사(王師)인 바, 국사(國師)라 불려도 이상하지는 않다.

     

    또 당대에는 아호를 법명으로도 불렀으니 무학대사라 불러도 별 탈은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시종일관 자초로 (간혹 자초 무학대사로) 기록되어 있다. 예문을 하나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에게 물으니, 자초가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태조 2년 2월 11일 기사) 

     

    자초와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는 야사는 물론이요 실록에서도 차고 넘친다.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로, 특히 한양 정도(定都)에 적극 관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정하고 빌려온 위 <태조실록>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풍수지리에 관해 전혀 문외한이다. 아울러 우리의 생각과 달리 학식도 깊지 않은 듯 보인다. 

     

    이날 시좌궁(時坐宮)으로 돌아와 중 2백 명을 궁중에서 공양하고, 왕사 자초를 를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게 하였는데, 현비(顯妃, 신덕왕후 강씨)가 뒤에서 발을 드리우고 이를 들었다. 자초가 능히 종지(宗旨)를 해설하지 못하니,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태조 2년 3월 28일 기사)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이성계는 그와 함께 하기를 즐겼으니 실록에 기록된 대강은 이러하다. 

     

    회암사를 지나면서 왕사 자초를 청하여 같이 갔다. 

     

    내시 별감 정상(鄭尙)을 보내어 왕사 자초를 회암사에서 불러냈다.

     

    왕사 자초를 대궐 안에서 접대하고 채색 비단을 내려 주었다.

     

    내시 별감 한계보를 왕사 자초에게 보내 서울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이미 왕사가 되었으니 깊은 산림 속에 있어서는 안 되니 속히 서울에 가시오."

     

    아울러 이성계는 아직 생존해 있는 무학대사임에도 그의 승탑을 제작하게 만드는 특혜를 베풀었다. 

     

    경기도 백성을 징발하여 미리 왕사 자초의 부도를 회암사 북쪽에 만들게 하였다.

     

    미려한 모양새의 이 부도는 폐허가 된 회암사와 달리 지금도 짱짱하니 이른바 삼대화상(三大和尙, 지공·나옹·무학)의 승탑과 비(碑)가 회암사 북쪽에 함께 존재한다. 

     

     

    회암사 당간지주
    사문(沙門) 터에서 바라본 회암사지
    설법전지에서 내려본 회암사지
    사찰의 최고 승려가 기거하던 수좌료지(首座寮址)
    수좌료지/ 무학대사는 필시 이곳에 기거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청지(正廳址) / 이성계가 행차했을 때 머물던 곳이다.
    회암사 출토 용봉(龍鳳) 기와 / 왕실사찰로의 격을 말해준다.
    보물 제2130호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제388호 무학대사탑
    무학대사탑비
    무학대사탑과 석등 / 뒤로 지공선사탑이 보인다.
    보물 제389호 쌍사자석등

     

    이처럼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아낀 것은 여러 사실로서 드러나나 실록에서는 그가 한양 정도에 관여한 사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러 사서와 지리지에는 무학대사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기록돼 있으니,

     

    <택리지>에는 신라말의 승려 도선이 이미 무학대사의 출현을 예견했고, 무학은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지세를 살핀 후 도읍할 땅을 정했으며,

     

    <연려실기술>에는 무학대사가 지금의 왕십리에서 10리를 더 가 평평한 땅을 발견한 후 도읍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적혀 있고,   

     

    1605년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또한 유명한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과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의 대립이 기록돼 있다. 국초(國初)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백악산을 주산으로 인왕산과 타락산(낙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정도전의 주장이 대립했는데, 중국의 모든 궁궐들이 남향(南向)이듯 조선의 정궁도 남면(南面)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그것을 개탄하여 왕사의 직을 사직하고 떠나며 "나의 말을 좇지 않았으니 200년 후 큰 난리가 일어나리라" 예언했다는 것인데, <오산설림>이 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책이라 이야기에 더욱 힘이 실린 듯하다.

     

    물론 이상의 이야기는 모두가 근거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풍수지리와 같은 술수를 경계하라고 신신당부하였던 바,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최선을 다했는지 생각해 보시고, 최선을 다한 후에 이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태조 3년 8월 12일 기사) 

     

    라고 하였는데, 다만 한양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정도(定都)에 찬성한 후,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은 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그밖의 형편에 맞춰 종묘·사직·시장터를 정했다. (<태조실록> 태조 3년 9월 9일 기사)

     

     

    한양도성도(1760년) / 서울대 규장각

     

    이상 I, II, III편에 실은 3대 화상(和尙)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지금의 회암사지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했던 지공의 예언이나, 이를 믿은 나옹이나, 시중에 떠도는 무학대사의 한양 조성 이야기는 모두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했던 지공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조선은 숭유억불책을 택해 불교를 멸절시켰고, 지공의 말을 믿어 회암사를 크게 중창시킨 나옹은 도리어 그로 인해 유배를 가다 죽었으며, 무학은 그저 이성계의 왕사였을 뿐 한양 정도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무릇 종교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그 신앙의 합리성이 아니니, 오히려 종교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신의 신통력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종교는 오직 권력을 등에 업으면 흥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쇠하는 것이니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세상의 모든 종교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I, II, III편에서 언급된 동국제일 가람 회암사의 예 또한 예외가 아니다. 

     

     

    눈비 내리는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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