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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의 고려궁지 황성 옛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5. 00:06

     

    고려가 황제국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앞서 '고려가 황제국임을 말해주는 하남 선법사 마애불'에 실은 여러 글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엄연한 황제국이었고 임금에 대해서는 너나 나나 모두 황제로 불렀다. 하지만 조선은 건국 때부터 사대의 예를 갖춰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는 고려가 황제를 칭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나쁘고 역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말한 바대로 국초(國初)의 정도전은 이를 '참의자사'(僭擬之事)라고 했다. 분수 넘치게 황제를 참칭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이것이 공통된 사고였을 터이지만, 혹간 백호 임제와 같은 이단아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풍류남아 임제는 39세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었는데, 임종에 앞서 가족들이 슬피 울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 울지 마라. 육조오계(六朝五季: 역대의 모든 왕조)가 다 황(皇)을 칭하고 구이팔만(九夷八蠻: 세상의 모든 오랑캐)이 모두 제(帝)를 칭하였던바 그것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는 알 수 없으되, 홀로 우리나라만이 그렇지 못하고 타국의 피폐를 일삼을 뿐이요 한번 자립하여 중국에 입주해보지 못했으니 어찌 가련타 하지 않으리오. 이런 나라에 태어난 몸이 죽지 않으면 무엇하겠느냐?” 

     

     

    나주 화진리의 물곡사비(勿哭辭碑) / 임제의 위 유언이 새겨져 있다. '물곡사'는 '울지 말라고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임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거의가 사대를 일삼았으니 우암 송시열 같은 놈은 사대주의의 절정을 달렸다. 괴산 화양동 계곡 화양서원(華陽書院,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임) 인근의 만동묘(萬東廟)는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그의 손자이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배향한 사당으로 송시열의 유훈으로 세워졌다.

     

    이곳 회양서원의 유생임을 증명하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고을 사또 이상의 신분을 보증했던 바, 이 패찰을 지닌 유생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백성들을 끌고 와 볼기를 쳤고 고을 사또를 겁박했다. 만동묘의 위세는 더 말할 것도 없었으니 당대의 민요 '승경가'에는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가 있다'고 풍자됐다.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권세를 지녔던 바, 한말의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 이곳의 하마비(下馬碑)를 지나쳤다가 만동묘지기에 의해 말에서 끌어내려져 발길질을 당했다. 

     

    그 만동묘 앞에는 건립 내력을 적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겉으로는 멀쩡한 듯 보이나 빼곡히 적힌 글자 중 읽을 수 있는 것은 한 자도 없다. 1908년 통감부에서 새겨진 글자들을 모두 정으로 쪼아 지웠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니 지독한 중화 흠모의 글이 새겨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아가 일제는 만동묘를 철폐하고 건물을 헐어 괴산경찰서 청천면주재소를 짓는 자재로 썼다. 현재의 건물들은 지난 20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만동묘 묘정비 / 글자가 모두 쪼아진 채 땅에 묻혔던 것을 1983년 괴산군에서 찾아내 다시 세웠다.

     

    그런데 그 엄혹한 시절에도 고려궁의 옛 터인 이른바 만월대는 황성(皇城)이라고 불렸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당시 만들어진 '황성 옛터'라는 가요이다. 이 곡은 한국인이 최초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로 알려져 있는데, 1928년 한 조선극단이 개성 공연을 하던 중 탄생되었다. 그 일행 중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전수린(1907~1984)과 만담가이자 악극단 배우였던 왕평(본명 이응호, 1908~1940)이 함께 만월대에 올랐다가 달빛 아래 비치는 황량한 폐허에 절로 노래가 작곡 작사되었다. 

     

     

    개성 송악산 아래의 황성 옛터

     

    전수린은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막간 공연의 반주자였는데, 고향이 개성이었으므로 필시 그가 친구인 왕평을 데리고 만월대에 올랐을 성싶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왕평은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를 1기로 들어갔는데, 연극·영화배우이기도 했지만 '조선연극사' 전속 작가로서 극본을 쓰기도 했다. 그는 달빛 아래 구슬픈 벌레 소리만이 들리는 옛 고려궁궐지의 쓸쓸함을 시로 읊었고, 전수린이 이것을  오선지에 옮겼다. 

     

     

    전수린 (全壽麟, 1907~1984)
    왕평(王平, 1908~1940)

     

    전수린은 이 곡을 단성사 막간 가수였던 18살 이애리수가 주어 부르게 하였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이 노래는 단박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으니, 애절한 노랫가락과 망국의 슬픔을 담은 애뜻한 노랫말에 객석의 관객들이 하나 둘 흐느끼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노래를 부르던 이애리수도 함께 설움이 북받쳐 3절을 부르지 못했다. 잠시의 진정을 거쳐 노래는 처음부터 다시 불리고 관객들은 재차 통곡했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이애리수는 곧 빅터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고 1932년에 정식 발매된 '황성 옛터'는 이후 무려 5만 장이 팔렸다. 당시의 5만 장이라 하는 것은 지금의 500만 장에 버금가는 볼륨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뒤늦게 이 노래를 금지하였고, 작사가 왕평은 항일적인 내용으로 국민을 선동하였다는 죄로 대구경찰서에 투옥되었다. 이후 풀려난 왕평은 악극단 운영자로서 순회공연을 펼치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강계 무대공연 중 사망했다.

     

     

    이애리수(李愛利秀,1911 ~ 2009)

    황성옛터 듣기 /  배아현 버전

     

    강계에서 화장된 왕평의 유해는 극단 배우이자 연인이던 나품심(羅品心)이 품에 품고 왕평의 부친이 사는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로 가져갔다. 하지만 일본경찰이 묘지 매장허가를 내주지 않아 몰래 평장(平葬)으로 묻었던 것을 2000년대 초 영남대  이동순 교수가 어렵사리 찾아내 봉분을 만들고 묘표를 세웠다. 오래 전부터 영천에서는 왕평을 기리는 '왕평가요제’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전국구 가요제로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왕평의 묘 / 33살의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이동순 사진)


    황성 옛터는 말로만 황성이 아니라 정문에서 정전까지 5개의 문을 거치는 5문3조(五門三朝)의 황궁이었다. (반면 경복궁 등의 조선궁궐은 3개의 문을 거치는 3문3조 형식이다)  송나라 사신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5문은 외문(外門, 주작문) · 승평문 · 신봉문 · 창합문 · 전문(殿門, 회경문)으로 이중 신봉문이 가장 장대하다고 기록했다. 이 문들은 물론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 옛 모습을 알 길 없지만 거의 훼손되지 않는 형태로서 남아 있는 만월대 회경전 계단으로부터 회경전 앞 회경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웅장한 계단 위에 회경문과 회경전이 서 있었을 터, 상상만으로도 그 위용이 짐작 간다. 

             

    자금성 / 정문인 천안문에서부터 정전 태화전까지 5문을 거친다. 3조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삼대전(三大殿)을 말한다.
    잊혀진 고려의 정궁 만월대 / 정문인 주작문에서부터 본전인 회경전에 이르는 문이 모두 5개로, 고려가 황제국의 지위를 가진 자주국이었음을 증언한다.
    개성 고려박물관의 만월대 모형
    회경문과 회경전 / 나무위키
    회경문 계단
    회경문 계단 위로 보이는 만월대 터
    서긍의 기록으로 복원한 만월대 전각과 문 /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기록관의 그림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 광경
    발굴 중인 개성 만월대 / 남북공동발굴팀은 2007년부터 2018년까지 12년간 만월대 서부건축군 19,770㎡를 조사해 궁궐 건물지 40여 동을 확인하고 금속활자, 청자, 장식기와 등 유물 17,900여 점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만월대에서 출토된 전(嫥) 자 고려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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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