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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촌(東村)에 살던 사람들 II - 세기의 이혼 소송을 벌인 이인용과 조중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1. 28. 00:10

     

    서울 낙산 아래의 이른바 동촌(東村)을 걷다 보면 과거와 근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동촌에 투어리스트가 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나, 지금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해 예전에는 환대했던 동촌 주민들도 더 이상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 북촌(北村)과 서촌(西村) 주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탐승객을 위한 배려였던 이화동 골목의 그림도 이제는 지워졌다.

     

     

    과거 이화동 골목 계단에 있던 벽화
    2020년 메트로신문 사진
    2023년 2월 찍은 사진

     

    위의 잉어 노는 물길 계단, 해바라기 꽃길 계단 등은 2006년경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지역 환경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68명의 화가들을 초빙해 그린 그림이었다. 이때 마을 곳곳에 벽화 70여 점이 그려졌고 유명한 '이화동 벽화 골목'이 되었다. 이후 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것을 계기로 끊임없이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더불어 골목에는 쓰레기와 소음이 넘쳐나는 참극(?)이 발생했다. 당시 측정한 소음은 80 데시벨로 지하철역에 열차가 들어올 때의 수준이라고 했다.
     
    아울러 관광객 중의 일부는 화가를 자처하였던 바, 낙서 수준의 그림들이 첨가됐다. 참을 수 없던 일부 주민들이 어느 날 옥석의 가림 없이 그림을 지우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지워진 그림이 위의 해바라기 꽃길 계단과 잉어 노는 물길 계단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탈이 났으니 애써 그림을 지운 몇몇 주민은 재물손괴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해바라기 계단과 잉어 계단은 제작에 5천만 원이 들어간 공공재산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그만한 돈이 들어갔나 할지 모르겠지만 계단의 해바라기는 단순한 페인팅이 아니라 타일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거대한 벽화였다. 재물손괴 혐의로 조사받은 주민들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한 것은 투어리스트는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니 구청에서 다시 손을 봐 밋밋해진 계단임에도 주말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화동에는 분명 또 다른 매력이 있음이다.
     
     

    2023년 2월 찍은 사진

     

    그것은 필시 이색적이라 것일 터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 계단 좌우 축대는 이제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드니 과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비탈에 축대를 쌓아 집을 지은 흔적이다. 그렇게 지어진 이른바 적산가옥들을 이곳 이화동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적산가옥은 가옥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敵)의 재산이었던 가옥'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그들 일본인들이 살다 간 적산가옥을 개량하거나 해방 직후 지어진 집들이 여전히 밀집해 있는데, 그 또한 현대인의 눈에는 볼거리다.

     

    이곳에 적산가옥이 몰린 이유는 1930년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택부족현상이 심각해진 까닭으로, 이에 도심과 가까운 이화동, 효제동, 충신동 일대의 빈 땅에 조선인의 한옥과 일본인의 개량 서양주택(문화주택)이 대거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화장 위 낙산길 좌우의 적산가옥
    성벽 밑 장수마을도 서울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아무튼 조용하던 이화동은 그렇게 시끄러워졌으니, 아마도 1932년 이후 90년만의 소란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해  5월 9일은 이화동에 살던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이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소장을 제출한 날이다. 이인용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따라서 부인인 조중인은 더욱 알길 없겠으나, 그의 시아버지인 이재극(李載克)은 제법 알려져 있다. 2003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파재산환수법)'이 발효되었을 때 서울고검과 수원지검이 이완용·민영휘와 함께 가장 먼저 이재극의 후손에게 부동산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검찰의 행위는 물론 이재극의 후손으로부터 소유 부동산을 환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재극은 이완용·민영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지라 오히려 이목이 쏠렸는데, 이때 이재극과 더불어 주목받은 인물이 그의 아들 이인용과 며느리 조중인이었다. 그들이 이재극의 유산 100만 원을 놓고 벌인 5년간의 소송전 때문이었다.  100만 원은 요즘 돈으로 200억을 상회하는 거금이다. 
     
    이재극은 앞서 I편에서 말한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따라서 인조 임금의 9대손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종 임금과도 8촌간이 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재극은 1864년(고종 1년) 한성부에서 이조 참판을 지낸 이연응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93년 문과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법부대신·학부대신·내부대신을 거쳐 1905년 궁내부 대신이 됐는데, 이때부터 친일로 기울어졌던 바, 1905년 11월 3일 이재극이 주한일본공사관에서 열린 메이지 일왕 생일파티에서 "일본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일은 유명하다.
     
    소식을 들은 고종이 격노해, "일국의 신하로써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대한국의 신하는 대한국의 임금에게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법도 아니냐" 며 꾸짖자, 그가 했던 "신은 반자이(만세의 일본어)라 했을 뿐, 만세라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 크게 회자되었던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2주 후에 체결된 을사늑약에도 앞장섰으니, 조약문을 고종에게 갖고 가 결재를 강요하는 등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이재극 (李載克, 1864~1931)

     
    민영휘처럼 이재에 밝았던 이재극은 일본 고베에서 직물기계를 들여와 서울에 직포공장을 차렸다. 이렇게 재물을 모은 그는 교육사업(휘문의숙)으로 세간의 화살을 비껴간 민영휘를 흉내내 1908년 동덕여자의숙을 세웠다. 그리고 한일병탄과 더불어 일본이 만든 귀족 계급인 남작의 작위를 받고, 현 시세로 수억 원에 해당하는 2만5000엔의 은사금을 받았다. (이렇게 불린 이재극 재산에 대한 후손들의 환수소송이 최근까지 이어졌다)
     
    1931년 이재극이 죽자 남작의 지위와 100억 8천만 원의 재산이 아들 이인용에게 돌아갔다. 옛 인평대군의 집 석양루를 포함한 이화동 22번지의 대저택까지 물려받은 이인용은 굳이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버는 쪽 대신 쓰는 쪽을 선택한 그는  화류계에 드나들며 돈을 물 쓰듯 썼다. 자연히 그의 주위에는 이 호구를 이용해 팔자를 고치려는 무뢰배들이 몰려들었고 그중에는 장안에서 이름난 미색의 기생도 있었다.
     
    그 기생과 이인용의 사주를 받은 무뢰배 5~6명이 어느 날 이화동 이인용의 집 담을 넘어 아내 조중인의 침실에 침입했다. 그리고는 남작의 명령이라며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했는데, 그것이 다음 날 밤에도 이어졌으며, 그다음 날에는 조중인을 아예 완력으로 끌어내 잡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중인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주목사 조윤희의 둘째딸로 이인용과 결혼해 1남1녀를 둔 상태였는데, 연약한 생김새와 달리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그는 무뢰배의 요구와는 반대로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폭력 취체령 위반 및 협박·공갈 혐의로 수사를 요청했고, 1932년 5월 19일 남편을 상대로 1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남편과 같이 살게 해 달라는 요구였으니, 이는 최근 모그룹 회장 부인의 첫 요구와도 같았다.
     
    이후도 그처럼 되었으니 곧 100억 8천만원의 재산에 대한 분할 청구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인용도 가만있지 않았던 바, 2주 후 음탕·방종한 아내와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유인즉 아내가 집안 머슴 및 운전기사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추문은 오래된 소문이기도 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스미코미(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부리는 객식구의 일본어)로 푼돈의 월급을 받던 머슴 이철돌이 늘 말쑥한 양복을 입어 겉차림은 이인용 남작보다 낫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던 중 이철돌이 가지고 다니던 금시계가 이인용의 친척에게 발각됐으며, 이후로 이인용은 아내 조중인이 낳은 1남1녀마저 제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인용이 소장을 제출한 간통사건에 대해서는 피고 조중인이 이철돌 외에도 이팔용, 민성기 등의 객식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법원은 조중인의 간통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인용이 제기한 이혼청구소송은 기각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중인이 남편에 대해 준금치산자선고 신청을 제기했다. 사건이 얼마나 커졌던지 손이 부족했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개성지법에 요청해 검사를 지원받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 같은 공방이 5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 떡고물을 노린 중추원 부의장 박영효 후작이 이인용 집안의 재산관리자로 들어앉게 되었다. 박영효가 조직한 재정정리위원회는 이인용 집안의 재정 일체를 인수하고, 법적 조치를 마련해 위원장의 결재 없이는 한 푼도 지출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뒤로는 이인용의 재산을 담보로 박영효 친척에게 수십만원 대의 대출이 이루어지는 부정이 행해졌다. 알고도 당하는 이인용만 병신이었다. 

     

    오히려 난리를 친 것은 조중인 쪽이었으니 상고심 법정에서는 수백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인용 남작을 젖혀두고 조중인측과 재정정리위원회측이 서로 폭력을 행사해 법정이 아수라장이 된 일도 있었다. (이들은 함께 퇴정됐으며 법정 밖에서 본격적인 격전이 벌어졌다) 아무튼 그 긴 재판 기간 동안  이인용측과 조충인측의 시비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여기에 재정정리위원회측도 가세해 매번 새로운 사건이 추가되곤 했다.  

     

    이와 같은 이전투구 속에 재판은 더욱 복잡해지며 장기화되었는데, 결론인즉 이인용의 재산은 분할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공중분해되었고, 결국은 일본인 변호사들의 배만 불린 꼴이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이인용의 이화동 집은 6만 원에 팔렸고, 직물회사 주식과 안성·포천 등지에 있는 부동산은 10만2000원에 처분됐는데, 이중 4만5000여 원이 재판 비용으로 탕진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처였던 이화장
    이곳 이화장 및
    후원 등의 땅도 이인용 집의 일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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