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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동 쌍계사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21. 00:31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장터는 영호남 화합의 상징으로서, 전통 장터나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에 이 같은 장소가 또 있을까 여겨질 정도로.... 이곳이 2020년 8월 초, 긴 장마와 7일간 지속된 폭우로 인해 완전히 침수된 적이 있다. 폭우에 섬진강 둑이 유실된 탓으로, 완전 침수는 1988년 이후 32년 만이라고 한다. 뉴스를 보며 정말로 걱정했었는데, 이후로 방제에 만전을 기했다 하니 앞으로는 이런 물난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시의 물난리 사진 / 연합뉴스
    화개장터 위치

     
    이 물난리 속에 화개장터 부근 화개면 탑리 옛 화개우체국 자리에 세워졌던 6.06m의 삼층석탑은 무사했다. 탑리라는 지명은 필시 이로부터 유래되었음직하지만, 물난리에 탈이 났어도 별로 관심거리가 안 되지 않았을까 여겨질 정도로 방치돼 있는 느낌을 주는 탑이다. 
     
    지금은 카페 골목 사이 후미진 곳에 있는 이 탑은 원래 화개우체국 남쪽 봉상사(奉常寺)지에 무너져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68년 화개우체국 공터로 옮겨와 세웠는데, 길어진 1층 탑신의 형태가 통일신라말~고려시대 초의 건립시기를 추정케 할 뿐, 봉상사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봉상사가 범람한 섬진강의 거대한 물줄기에 쓸려 폐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은 가능하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0호 하동 탑리 삼충석탑 / 해걸음에 찍어 사진이 흐리다.

     
    대개 물은 불보다 무섭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화마가 쓸고 간 곳은 남는 것이 있지만 물이 쓸고 간 곳은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하동의 경우는 그 반대로 여겨지니, 수재(水災)가 났던 화개장터는 거의가 복구되었지만, 과거 전쟁의 화마가 쓸고 간 쌍계사(雙溪寺)는 다수의 유적이 사라졌다. 한국전쟁 및 빨치산과의 전투를 말함인데, 그나마 쌍계사가 폐허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당시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의 덕분이다.
     
    차일혁은 그 무렵 지리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는 화엄사·천은사·쌍계사 등에 대한 소각명령을 받았지만 과감히 거부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이것이 지금도 회자되는 그의 명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화엄사 각황전 문짝을 떼 태우라는 지시를 내리는 일로 상부의 명령을 갈음했다. "문짝을 태운 것도 태운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천년고찰 화엄사는 살아 남았다.
     
     

    화엄사 각황전 앞에서 부하들과. (가장 왼쪽)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토벌군과 빨치산 사이 벌어진 교전 횟수는 무려 1만717회이며 전사한 군경은 6333명에 이른다.  빨치산 측 사망자는  대략 1만 수천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차일혁 부대가 1953년 9월 화개동천 빗점골에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함으로써 토벌의 8부능선을 넘었고, 1963년 11월 12일 산청군 내원리에서 최후의 빨치산 이홍희를 사살하고 정순덕을 생포함으로써 대단원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북 시, 만수당 의사당을 안내한 이상진이 이현상의 막내딸이다) 
     
     

    대규모 토벌전이 벌어졌던 화개동천 대성골
    이현상이 죽은 빗점골
    하동군에서 세운 이현상 최후격전지 팻말
    이상은 2016년 '울산저널'에 게재된 사진으로 그때도 방치된 팻말을 세워 찍었다 했으니 지금은 필시 사라졌을 것이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1920~1958)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5~1953) /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이다.


    지리산지구가 포함된 하동 일대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까지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1950년 전쟁 초기에는 채병덕 사령관이 이끄는 영남지구 사령부 소속의 국군이 미군 제24사단의 일부 병력과 합세하여 하동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싸운 7일간의 '하동전투'가 있었고,(7월 25일~7월 31일) 이에 앞서서는 하동 화개장터 건너편 야산 진지에서 섬진강 도강을 시도하는 북한군 6사단 선봉대와 국군15연대에 자원입대한 학도의용군 간의 '화개 전투'가 벌어졌다. 학도의용군은 북한군의 도강을 12시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군과 미군이 하동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한 까닭에 하동 쌍계사는 차일혁 대장의 수호 의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적이 파손되어 사라졌다. 쌍계사는 이름 그대로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위치로 인해 피아간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래서 쌍계사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적도 있는데, 당시의 총탄자국이 저 유명한 진감선사탑비(국보 47호)에도 남았다. 신라 최치원(崔致遠, 857~?)이 헌강왕의 명으로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인 이 비문은 최치원이 직접 글과 글씨를 쓴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 우리나라 산사(山寺) 금석문의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비문이기도 하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정식 명칭은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령탑비'로, 비신의 재질은 흑대리석이다.
    최치원 글씨 위의 총탄자국들
    탑비의 이수 / '해동고 진감선사비'라는 전서체 글씨를 양각으로 새겼다.마찬가지로 역시 최치원이 썼다.
    안내문
    쌍계사에서의 차일혁 대장(비석을 짚고 있는 분) /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한 이 사진 속의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못 찾은 것인지....

     
    쌍계사 유구 중 그밖에는 사실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으니, 아래의 유구들은 거의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역시 전란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안 알려진,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종은 오히려 주목할 만하다. 1641년에 조성된 이 동종은 전체높이 94cm, 입지름 62cm 크기로 조선후기 제작된 동종 가운데 비교적 대형에 속하며, 또한 미려해 우리나라 종의 전통을 계승한 동종으로 평가받는다. 쌍계사에 가면 잊지 말고 보아야 할 보물인데, 생각해보면 이 안복(眼福) 또한 차일혁 총경의 덕이다. 
     
     

    쌍계사 일주문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본떠 1990년에 세운 쌍계사탑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탑 주변의 석등
    경주박물관의 봉덕사 종을 모사한 쌍계사 범종각의 종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사한 쌍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 뒤의 마애삼존불 역시 근자에 조성된 것이나
    대웅전 앞 마애불은 깊은 연륜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일지도 모르겠다.
    쌍계사 동종 / 보물 제1701호
    쌍계사 동종의 용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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