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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명필의 글씨를 모두 볼 수 없는 행주대첩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26. 20:39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은 명나라 원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함으로부터 비롯됐다. 1593년 음력 1월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깬 이여송은 파죽지세로 고양시 벽제관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여석령(礪石嶺=숫돌고개)에 매복해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 부대에 박살이 났다. 이여송은 코가 빠져 혜음령 너머 멀리 개성까지 후퇴했다.(☞ '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 

     

     

    평양성 전투도 / 평양성을 점령한 왜군을 골격하는 조명연합군을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이다.(8폭 병풍의 부분)
    고양시 벽제관 유적지 .

     

    그런 줄도 모르고 평양성 전투 승리에 고무된 조선군은 한양을 탈환하고자 북상하였다. 이제 명나라 군대가 왔으니 전세가 뒤바뀔 것이라는 다소 급한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북상한 조선군은 양천에 있던 전라도소모사 변이중, 금천에 있던 전라병사 선거이, 양주에 있던 경기방어사 고언백, 파주에 있던 부총병 사대수와 순변사 이빈, 그리고 통진에 있던 충청감사 허욱 등의 부대였는데, 이들은 이치(梨峙)전투에서 왜군을 깨고 먼저 북상해 행주산성에 진을 친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집결했다. 

     

    그러자 왜군도 당연히 행주산성 아래로 모여들었고, 총 7개 부대로 나눠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즉 1군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6군 등으로 구성된 총 3만 명의 대군이었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음력 2월 12일 아침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향해 총공격을 해왔다.

     

     

    당시의 전황도

     

    이에 반해 행주산성의 조선군은 3천 명에 불과했으니, 그것도 김천일의 의병부대와 처영스님의 승병을 합친 숫자였다. 그럼에도 조선군은 성에 의지해 왜군이 갖지 못한 화포와 대완구 등의 무기로써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화살이 떨어질 즈음 충청 수사 정걸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바, 해가 질 무렵 왜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후퇴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무기들 / 위로부터 조총, 승자청통, 별황자총통, 대완구 (전쟁기념관)
    한강과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우리는 이 행주산성의 승리를 행주대첩이라 부르며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으로 기리고 있다. 큰 승리이기도 했지만  한반도 중앙전선의 향배를 바꾼 중요한 승리이기 때문이었다. 행주대첩 초건비(初建碑)는 선조 35년(1602)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 최립(崔岦, 1539~1612)이 짓고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글씨를 썼으며, 선원 김상용이 비의 명칭인 두전을 썼다. 비의 뒷면은 권율 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이 짓고 명필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행주산성 내 행주대첩비와 초건비(初建碑)가 있는 비각

     

    덕양산 정상의 초건비(높이 188×너비 80×두께 19㎝)는 이처럼 당대의 명사들이 총동원돼 제작된 비였지만, 일제강점기 비문이 모두 훼손되었다. 이는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 조선총독부가 각 도 경찰부에 전달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문서로써 고의 파손이 확인된 바 있는데, 고양 행주전승비(지금의 행주대첩비)는 철거 목록의 첫머리에 올라 있다. 기타 왜군과의 전승기록인 운봉 황산대첩비, 명량대첩비, 이치대첩비 등 20여 개가 파손되었다.  

     

     

    행주대첩 초건비
    두전에는 '원수권공행주대첩비(元帥權公幸州大捷碑)'가 쓰여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것이 정식 명칭이다.

     

    이 초건비는 훗날 자연 풍화로 인해 마모가 심해졌다. 이에 헌종 11년(1845)에  초건비 비문 내용을 그대로 담은 새로운 '원수권공행주대첩비'(元帥權公幸州大捷碑)를 건립해 행주산성 서쪽 행주서원에 세웠다. 비문은 옛 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비 뒷면은 조인영이 일부 내용을 추가해 비문을 짓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글씨를 썼다. 조인영은 1817년 추사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비봉(碑峰)에 올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사람으로 친숙하다

     

    비문을 쓴 귤산(橘山) 이유원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사 이항복의 9세손이다. 이유원은 1841년 과거에 급제한 후 의주부윤·전라도 관찰사·성균관 대사성·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친 후 1864년 좌의정에 올랐다. 비문은 그가  32세 때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기 직전 쓴 것으로 이미 당대의 명필로서 이름이 알려진 때였다. (☞ '임하필기에 기록된 천마산 보광사 중수기')

     

    행주서원은 1942년 현종 임금의 명으로 건립한 권율 장군의 사당 기공사(紀功祠)를 전신으로 하는 서원으로, 훗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으나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다. 이후 서원 안에 있던 중건비는 1970년대 행주산성 내에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莊祠)가 세워지면서 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1년 3월 행주서원이 복원된 후 서원 내 본래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중건비가 이전될 때 심준용 고양시청 학예연구사가 "문화재는 원래의 위치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것이며, 이번 행주대첩비 이전을 계기로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발언이 눈에 띈다. 말이야 옳은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소중한 문화유산'은 세인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바, 충장사에 있을 때는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비가 행주서원으로 옮겨진 후로는 관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행주대첩비는 초건비와 중건비를 합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돼 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비문에는 1593년 행주대첩의 경과와 권율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쓰여 있을 것인데, 그 비문을 보기는 아마도 어려울 듯하다. 행주산성 내의 초건비는 마모가 되어 읽을 수 없고,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127-17 행주서원 내에 있는 중건비는 서원의 담을 넘지 않는 한 가까이 갈 수 없다.

     

    밀집된 카페촌 사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서 있는 행주서원은 아마도 충장공 권율 장군의 기일을 제외하고는 364일은 닫혀 있을 것이다. 그럴 거면 복원은 왜 했나 싶다. 권율 장군의 제례는 행주산성 내 충장사에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행주산성 충장사 앞에 있을 때의 중건비 / 고양시청 사진
    굳게 닫힌 행주서원의 문 / 신헌이 쓴 '행주서원' 현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신헌은 무장(武將)이나 김정희에게 글씨를 사사한 명필로서 문무겸전의 인물이다.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입구의 행주서원지 표석과 안내문
    문틈으로 보이는 강당
    담장 너머 보이는 강당
    담장 너머 보이는 사당과 행주대첩 중건비
    여기까지가 볼 수 있는 전부이다
    중건비의 고양시청 제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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