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비운의 경의선(I)ㅡ남은 신촌역과 사라진 수색역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23. 22:30

     
    예전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을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 탄 버스 안에서 누가 나를...?'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도 몇 되지 않아 더욱 의아함이 느껴지는 순간,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야! 여기야, 여기!"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운전석 앞 거울에서 머리가 반쯤 벗어진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의 운전사가 웃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야 그 운전사가 고등학교 동창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름이 바로 생각났는데, 그러고보니 우리는 서로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였던 듯하다. 하지만 세월 탓일까? 기억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는 못한 듯했고, 다만 한 가지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것은 신촌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백마역 부근에 있는 그 친구의 집에 다녀온 일이었다. 철원 백마고지역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간이역을 말함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서 '(구)백마역을 아신다면 연식이 꽤 되시는 분'이라는 멘트를 본 기억이 있다. 하긴 (구)백마역 주변에 하나 둘 생겨난 카페가 어느덧 역 주변을 온통 뒤덮었고, 급기야는 호텔까지 들어서 복작대다 신도시 개발의 강풍에 쓸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과거가 존재했었다. 박기영이라는 남자가수가 작사·작곡하고 동물원이 불렀던 '백마에서'라는 노래는 그 무렵의 백마가 배경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백마역은 그보다도 앞선 백마역으로, 청바지에 통기타를 메고 경의선 완행열차를 탄 또래 젊은이들을 보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이다. 당시 내가 갔던 백마는 1980년대의 카페촌(아마도 '화사랑'과 '밤까치'가 효시였을 듯)이 생겨나기 전으로, 입구에 홍시 매달린 감나무가 보이는 그저 조용한 시골동네였다. 그 친구는 그곳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촌에 있는 학교를 통학했었는데, 그때의 신촌역이 지금은 장소가 옮겨져 같은 이름의 전철역 앞에 복원되어 있다. 

     

    경의·중앙선 신촌역 앞에 복원된 옛 신촌역
    공덕동 '연트럴파트'에 짧게 남은 옛 경의선 철길

     
    인근의 수색역은 설왕설래 끝에 철거되었다. 2000년대 초 경의선이 전철화되면서 생긴 일로서, 이중 신촌역은 억지로나마 복원돼 서울시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됐지만, 이보다 더 문화재적 가치를 지녔음직힌 수색역은 사라진 것이다. 1908년 4월 경의선 보통역으로서 문을 연 수색역은 한때 경의선 역사(驛舍) 중 가장 번창했던 곳이었지만 2005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나 역시 뾰족지붕 구조가 신촌역과 어금지금했다는 것 정도만 떠올려질 뿐, 벌써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낭만의 추억 하나가 함께 사라진 기분이다.    
     
     

    1958년 건립된 수색역 / 규모 254.2㎡로 그외 601.18㎡의 부대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나무위키의 옛 수색역 사진
    현재의 경의중앙선 수색역

     
    하지만 경의선은 낭만보다는 아픔이 큰 철길이다. 앞서 '화전공동묘지 무연고 합장묘와 덕은동 쌍굴'에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경의선은 일제가 러일전쟁의 수행을 위해 서둘러 건설한 철도로서 그러한 만큼 사고가 많았고, 특히 수색 조차장과 쌍굴 터널이 있던 수색역 부근에서는 경의선 건설에 동원된 많은 한국인의 희생이 있었다. 수색 조차장은 일제가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건립한 교통편의시설이나 지금은 용어 자체가 생소하다. 조차장(操車場·Classification yard)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을 다시 옮겨야 할 듯하다.  
     
    조차장은 행선지가 각각 다른 화차 및 객차가 섞인 열차의 각 차량을 행선지별로 분류하여, 행선지가 같은 한 편성의 열차를 만드는 작업을 위해 존재한다. 이런 새로운 열차 편성을 만드는 작업을 '조성'이라고 한다. 열차의 조성을 위해 열차를 역 시설 내에 유치하고, 열차에서 객차와 화차를 분리하여 분류작업을 실시한다. 이 분류작업을 '입환'이라고 한다. 입환 중인 철도차량은 기존 열차에서 분리되어 나와 각 행선지별로 분류된 선로, 분류선으로 이동하여 다른 차량과 결합, 같은 행선지로 이뤄진 새로운 열차로 만들어진다.

     

    수색조차장의 흔적이 남은 수색역 차량기지

     
    일제는 서울~신의주간 경의선을 1906년 4월 완공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1904년 12월에 완성한 경부선에 이어붙여 본토의 병력과 용산의 조선주차군을 한반도 북쪽과 만주로 진출시킬 수 있었는데, 그 경의선 철도의 상행선이 통과한 곳이 지금은 도로로 사용되는 수색역 부근의 덕은동 쌍굴이다. 수색 조차장은 대륙으로 가는 열차의 '조성'과 '입환'을 위해 건설한 대규모 조차장이었으나 완공 직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무용지물이 되었고, 우리는 대륙으로 진출할 일이 없으니 버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색역 부근의 덕은동 쌍굴
    항공대학교 부근의 옛 수색조차장 부지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묘 / 일본 토목회사 하자마구미가 경원선 건설 때 죽은 무연고 노동자들을 묻은 곳이다.

     
    하지만 정작 러일전쟁은 경의선의 완공 전 치러졌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목적으로 건설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의 완공 목표일이 1904년이기 때문이었다. TSR이 완공되면 러시아는 동부 유럽의 병력을 거의 무제한으로 연해주와 만주로 쏟어부을 수 있을 터, 가뜩이나 병력이 달리는 일본으로서는 이판사판식의 개전이 불가피했던 것이었다. 이에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과 뤼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지옥의 문을 열었다. 
     
    당시 일본은 개전 전 상황이 여러가지로 불리했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의 요동반도를 전리품으로 취했으나 러시아 주도의 이루어진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게 되고, 러시아는 이에 대한 댓가로써 1896년  청나라와 밀약을 맺고 동청철도(東淸鐵道, 치타∼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 부설권을 얻어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1898년 3월에는 동청철도 지선인 남만주철도(하얼빈∼선양∼대련) 부설권마저 얻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 동청철도를 거의 만주 부근까지 접근한 TSR과 연결시키게 되면 만주는 사실상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었다.
     
     

    만주의 철도 상황

     
    그러자 영국과 일본이 급해졌다. 이에 영국은 1898년 10월 중국과 경봉철도(京奉鐵道, 북경∼산해관∼선양) 건설 계약을 맺음으로써 맞불을 놓았고, 일본은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건설을 두고 러시아와 다투었다. 하지만 경의선 건설에 있어  정작 러시아와 일본은 권리가 없었으니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권은 프랑스 휘브릴사(社)가 가지고 있었다. (1896년 5월  7월에 휘브릴사가 조선정부로부터 획득) 
     
    하지만 휘브릴사는 과거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가진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그랬던 것처럼 투자자 모집이 원활하지 못해 착공을 못하고 시간만 까먹다가 결국 일자가 도래하고 말았다. 1899년 7월 이내 착공해야 한다는 것이 계약의 조건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6월 26일 휘브릴사에 계약 해지를 통고하였고, 1900년 내장원(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두고 휘브릴 사의 기술자를 승계하여 직접 서울~개성 간 측량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자본과 기술이 모두 부족했던 대한제국의 공사가 원할할 리 없었다. 그러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일본은 개전에 앞서 체결된(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제4조의 권리조항(일본이 전쟁 중 조선의 영토를 마음대로 군사용지로 전용할 수 있는 권리)을 근거로 경의선 철도 부설권의 이양을 압박해댔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3월 12일,  50년간의 임대조약을 맺고 일본에 부설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은 곧 서울∼신의주 간의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고 빠른 속도로 공사에 들어갔다. 
     
    당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던 지라 일제는 실제답사를 통한 정밀한 조사를 하지 못한 채 5만 분의 1 지형도로만 위치를 결정하고 측량을 하였다. 그리고 1904년 3월 12일 용산∼개성 사이, 4월 9일 개성∼평양 사이, 6월 25일 평양∼신의주 사이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0월 28일 용산∼임진강 사이에 철도건설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
     
     

    군용철도 경의선 건설공구 약도

     
    이어 1905년 1월 26일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되었고,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한국과 만주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일제는 이 노선을 통해 만주를 넘어 대륙진출까지 획책했는데, 지난 2005년 마포구 상암동 일대의 택지 개발을 진행하던 SH공사가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우연찮게 그 흔적 중의 하나를 발견했다. 1930년대 지어진 22동의 일본군 관사 단지였다. 당국은 그 관사의 처리를 두고 고심하다 네거티브 문화재로 복원을 결정하고 그중 상태가 양호한 2동을 이전·복원했다. 비용으로는 13억 원이 들었다. 전해지는 자료가 전혀 없어 일제가 왜 이 건물을 건축했는지 알 수 없으나 수색 조차장과의 연관성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상암동 부엉이 근린공원에 복원된 일본군 관사
    위관급 장교 숙소로 추정되는 곳 / 안에 3개의 방이 있다.
    위 사진과 같은 건물임
    위쪽의 다른 관사 / 대위급 이상의 장교 숙소로 보인다.
    위 사진 같은 건물임
    별 내용이 없는 안내문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