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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공동묘지 변천사와 개포동 구룡마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10. 00:09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구룡마을 재개발이 확정되었다는 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랫동안 강남땅을 지켜왔던 개포동 구룡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그간 꾸물대다 놓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최근엔 집에서 멀지 않은 상봉 시외버스터미널의 마지막 모습도 담지 못했다) 이번에는 곧장 현장으로 갔다. 어쩌면 구룡마을은 옴봄이 가기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가면서 논현동 사거리, 강남 개포아파트, 도곡동 그랑프리 백화점, 타워팰리스를 지났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두가 크고 작은 역사가 새겨진 장소들이다. 논현 사거리는 1990년 초까지만 해도 학동이던 곳으로 일대의 야산에 학(鶴)이 많아 학동으로 불리었다. 그 야산은 논현동 고개로 흔적을 남겼지만 학동이라는 지명은 사라지고 지금은 논현 2동으로 바뀌어 불린다. 논현동도 근방 논과 야산 고개(峴)에서 유래된 향토색 짙은 지명이니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논현리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며 성동구 논현동이 되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이전에는 일대가 공동묘지였다.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미국에 재차 망명해 1897년 필라델피아에서 죽은 서광범은 이곳 언주면 논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옛 학동 남포면옥 자리 / 이후 몇 차례 이장되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 야산에 안장됐다)  반면 1894년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그해 4월 12일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후 나뉜 시신이 전국으로 보내져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버려졌다. (지금 충남 아산시 아산리에 있는 그의 무덤은 가묘이다)
     
    암살자 홍종우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군 아현리, 지금의 만리동 일대 환일고등학교 부근의 봉학산 공동묘지에 만들어졌으나 일대가 개발되며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서울에서 사라진 공동묘지가 한 둘이 아니니, 일제강점기 시구문(광희문) 밖에 있던 신당동·황학동 공동묘지는 이태원, 한남동, 금호동, 옥수동으로 옮겨지며 사라졌다. 금호·옥수동 일대는 확인된 무덤만 3만2천 기가 있던 무덤 천지였는데, 금호초등학교 인근인 금호동 2가 672번지에 관리인(묘지기) 사택이 있었다고 한다.
     
     

    1922년 <경성도> 속의 광희문(시구문) 밖 공동묘지 / 아래 수철리 공동묘지가 금호동 옥수동 일대에 조성된 묘지이다.
    당시의 신당리 묘지
    울고 있는 아이 위쪽으로 광희문이 보인다. / 아이 부모의 무덤이 있는 곳은 한양공업고등학교 쯤일 것이다.

     
    이태원동 일대도 공동묘지였는데, 1935년 일제가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내며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부터 이장이 추진되었던 바, 유연고 묘 4778기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나머지 무연고 묘 2만8000여 기는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경성부 위생과 주관으로 화장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던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속절없이 망실되었다. 원래 표석도 없이 묻힌 까닭이었다. 
     
    이태원 무연고 묘지 화장재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현재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는 합장묘 앞  '유관순열사 분묘합장 표지비'는 그 역시 망우리 묘지 무연고자 묘에 잠들어 있으리라 추정하여 '(사)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와 '이화여고 총동창회' 등에서 세운 비석이며, 그 옆의 비석은 망우리로 옮겨온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이다.  
     
     

    망우리로 옮겨온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망우리묘원의 합장묘와 '유관순열사 분묘합장 표지비'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내에는 마포 노고산 공동묘지의 무연고자 합장처도 있다. 1938년 만리현 봉학산(아현동 묘지)과 현 숭문고등학교, 서강대 뒤쪽 일대의 야산 공동묘지(염리동 공동묘지)가 주택지로 개발되며 옮겨온 무연고자 시신을 화장해 합장한 곳으로, 서울 서쪽 노고산에 묻힌 뼈를 옮겨와 묻었다는 의미의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글씨는 당대 최고 명필인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아래 비면에는 노고산장택지경영주식회사 전무 송택상이 지은 글과 서예가 김흡의 글씨가 새겨졌다.  
     
     

    경서노고단천골취장비

     
    금호동, 이태원, 노고산에 있던 유연고 묘지는 대부분 미아리로 이장되었다가 1959년 다시 지금의 개포동 일대로 이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있던 시인 이상의 묘가 사라졌다) 현 개포동 일대의 땅은 1939년 언주 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어 (당시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므로) 경성 부립묘지(府立墓地)라는 이름으로 관리되었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지만 당시에는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만만한 땅이었을 터이다.
     
     

    미아리 공동묘지의 1958년 사진

     
    놀랍게도 언주 공동묘지는 1970년 말까지 존속되었다. 그리하여 해마다 성묘철에는 뚝섬, 광나루, 마포, 서빙고 등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논현과 잠원을 경유해 성묘를 가는 사람들로 나루터가 만원이 되곤 했는데, 한국전쟁 후 미아리 일대가 택지 개발되며 1959년 묘지 약 2만 기(무연고 분묘 1만3천여 기 포함)가 서울시립 언주공동묘지로 옮겨 와 성묘철에는 더욱 붐비는 곳이 되었다. 
     

    당시 서울 근교 야산의 공동묘지 / 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조선견문기(Things korean)>에 '서울 주변 민둥산에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의 무덤은 마치 마마를 심하게 앓은 사람의 얼굴과도 같았다'고 썼다.
    1970년대 초까지 볼 수 있었던 한강 도하 광경

     
    1970년대 강남이 개발되며 강남구 신사동과 학동, 그리고 언주 공동묘지 등의 8개 분묘지가 파주 용미리 공원묘지와 남양주시 화도읍 공동묘지 등으로 옮겨졌다. 이후 강남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 과정에서 도곡동 그랑프리 백화점은 울고 웃었다. 그랑프리백화점은 1985년 우성건설이 대치동 우성아파트단지를 조성하며 같이 지어 운영했으나 당시로서는 외졌던 까닭에 도곡동 그랜드백화점(현 롯데백화점 강남점)에 밀려 죽을 쒔다.
     
    이후 1987년 폐업하며 물류센터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2000년대 초 새로운 부촌의 대명사로 자리한 타워팰리스가 들어서며 부활했다. 그 멀지 않은 곳에 오늘 다녀온 구룡마을이 있다. 나는 '어쩌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강남의 원주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본래부터 강남에 살았으나 개발업자들의 농간에 밀려 쫓겨온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큰 경작지를 가졌던 강남 토박이들이야 별 지장이 없었겠지만....
     
    아무튼 강남은 그렇게 개발되었고 졸부가 탄생했으나, 반면 빈자로 전락해 구룡마을로 들어온 사람도 다수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판자집에 살며 당시에는 드물었던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당장의 불편을 감수하며 머잖아 시행될 개발을 바라보았던 무써운 사람들이었지만 개발 방식을 둘러싼 서울시와 강남구의 갈등으로 사업은 장기간 표류하였고, 2014년 9월 결국 개발계획이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러한 채로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울에 이처럼 많은 무덤이 생겨난 것은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택(幽宅)은 무한했으므로.... 그렇듯 삶이 유한하기 때문일까? 그 짧은 삶 동안 우리는 참으로 아등바등 다투며 산다. 어차피 저렇듯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곡동 개포아파트 독골근린공원 일대도 예전에는 공동묘지였다.
    근방의 대치중학교는 1986년 1월에 개교했다. 90년대 초 강남으로 이주해 온 많은 학교들에 앞서는 터줏대감이다. 대치중학교 야구부 선수들이 연습 중이다. 올 시즌 화이팅!!
    대한적십자사 남부혈액원 다리를 지나면 구룡마을이다.
    다리 위에서 본 양재천
    남부혈액원 옆에 원 구룡마을이 있다.
    참으로 많은 화재가 났던 곳이라 곳곳에 소화기가 놓였다.
    화재단속 현수막도 여러군데 걸려 있다.
    무허가 건물로 폐쇄 조치된 집 앞에도 소화기가 놓였다.
    작년 2월에 난 화재 / 뉴시스 사진
    이곳이 개포중학교 옆에 있는 진짜 구룡마을이다.
    '생존권 단결투쟁' 위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인상적이다.
    원 구룡마을은 여기가 끝이다.
    안쪽은 대부분 무허가 건물로 폐쇄 조치된 집이 많다.
    마찬가지로 폐쇄 조치된 집들이다.
    반면 텃밭을 두고 유유자적 농사 짓는 집도 있다.
    '단결투쟁' '생존권 쟁취'의 구호는 진즉에 사라졌다.
    화살표는 무슨 의미일까?
    여기가 입구인 셈인데,
    옆으로는 주민들이 살다 떠난 땅들이 보인다.
    문 앞에 붙은 '개조심' / 이 집 개는 정말 사납다.
    다시 길 하나를 건너면
    370년 된 은행나무와
    옛 공동묘지였던 담터 근린공원 등을 만나는데,
    거기에 구룡마을과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교회도 보인다. 이름도 '방주교회'다.
    이 동네는 마치 서울의 마지막 도심 같은 느낌을 준다.
    굴뚝이 보이는 개포동 현대아파트 단지 / 이곳도 곧 개발될지 모르겠다.

     

    * 2편, 진짜 구룡마을 이야기 '구룡마을의 용은 승천할까?'로 이어짐. 

     

    구룡마을의 용은 승천할까? 능곡 혹은 아홉수?

    우리나라에서 아홉 마리의 용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구룡리, 구룡산, 구룡사, 구룡계곡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제껏 내가 다닌 여행지 중에서는 남원 구룡계곡이 최고의 절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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