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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사실이 충돌하는 남양주시 풍양궁 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1. 20:37

     

    앞서 말한 인빈 김씨의 무덤 순강원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내각리에서는 또 조선시대 대궐지를 만날 수 있다. 흔히 부르기를 내각리 대궐터라 하는데, 근방에는 대궐터라는 기막힌 명칭을 사용하는 아파트 단지도 있다. 이런 시골에 무슨 대궐터가 있겠냐 싶겠지만 사실이다. ' 내각리 대궐터' 버스 정류장 부근의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를 증명하는 비석 2기가 서 있다. 이름하여 '풍양궁 구궐유지비'(豊壤宮 舊厥遺祉碑)다. 

     

     

    순강원과 대궐터가 있는 내각리
    내각리 원일 대궐터 아파트
    '풍양궁 구궐유지비'

     

    간단히 말하자면 풍양궁지(豊壤宮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723-21 일대에 있던 조선 왕조 이궁(離宮)의 터로서, 풍양궁은 1419년(세종 1) 상왕이 된 태종의 명으로 건립됐다. 풍양(豊壤)은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진접읍·오남읍 일대를 이르는 지명으로, 조선시대 말 안동김문과 함께 세도가문을 형성했던 풍양 조씨는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풍양 조씨의 인물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번 아시안컵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준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 조현우도 풍양 조씨이다.  

     

    즉 풍양은 (지금은 오히려 생소한 지명이 되었지만) 뿌리 깊은 고장으로 한(漢)고조의 고향 풍패(豊沛)와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격(格)을 느끼게 해준다. '豊壤'을 훈으로 를 풀면 '큰 고을' '비옥한 고을'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퇴계원을 비롯한 많은 지역이 도시화되었지만 이곳은 예로부터 서울 북쪽의 너른 옥토로서 다양한 농작물의 생산지였다. 한때 오염이 심했던 왕숙천은 예로부터 이곳 풍양의 젖줄이었다.

     

     

    구리시 왕숙천

     

    <세종실록>에 따르면 풍양궁지는 세종 2년 1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한양 일대를 둘러본 후 직접 선택했다고 한다. 한양 도성에서 40리(16㎞) 떨어진 곳으로서 도성과 멀지 않고 풍요로운 이곳은 이궁으로서는 적격지였던 바, 태종은  수강궁(壽康宮, 창경궁의 전신)과 이곳 풍양궁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다. (<세종실록> 세종 2년 7월 6일 기사에 태종이 풍양궁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양궁이 주요 생활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은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 등을 건립한 유명 건축가 박자청(朴子靑)이 직접 설계·감독하여 1419년 12월부터 2년의 공사 끝에 건립했으며, 풍양궁의 수각(水閣)은 일반 이궁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수변 누각으로, 이궁 서편에서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아 그 가운데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어떤 정자에 비유될까? 예천 초간정이 그만했을까? 

     

     

    예천 초간정

     

    태종은 생의 마지막 2년여를 풍양궁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세종은 내시 이촌(李村)을 자주 보내 아비의 근황을 살폈고, 본인도 한 달에 두어 차례씩 풍양궁을 직접 방문해 문안을 올렸다. 태종은 세종 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궁은 살피는 이가 없어 풀만 무성하다가, 세조 때에 군인 500명을 보내 수리를 시켰다. 사냥을 좋아하던 세조는 이 일대에 자주 거동했는데, 당시는 이곳 천점산 일대에 호랑이도 서식했던 것으로 보이니 세조는 사냥을 할 때 호환(虎患)을 당한 두 사람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해 주고 쌀과 술을 내려주었다. 
     

    풍양궁은 이후 성종과 연산군 때도 사냥을 위한 이궁으로 사용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兩亂) 이후 소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풍양궁 구궐유지비'를 보존하기 위한 비각만 있는데, 영조 때 세운 비와 고종 때 추가해서 세운 비, 두 개가 서 있다. 그런데 영조 31년(1755) 영조 임금의 명으로 경기감영이 세운 초건비(初建碑)에는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祉), 즉 '태조대왕이 상왕으로 계실 때의 궁궐 자리'라고 설명돼 있어 역사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고종황제가 친필로써 추가해 세웠다는 중건비에도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라고 잘못 쓰여 있다. 오랜 역사를 지내다 보니 이곳이 태조 이성계의 이궁으로서 잘못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니, <영조실록> 45년 기사에는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세웠던 인경궁조차 그 위치를 알지 못해 동네 노인에게 물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인데, 재미있게도 그 동네 노인조차 터를 몰랐다. 아무튼 옛 이궁의 흔적을 남기려는 영조의 노력 덕에 지금은 그 위치라도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풍양궁 구궐유지비' 비각
    이 안에 약 2m의 비석 2개가 있다.
    비각 앞 하마비는 유일한 국초(國初)의 유물로 보인다.
    대궐터 정거장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주변 절에서 지은 것으로 역사적 건축물은 아니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풍양궁으로 생각해 부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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