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빈김씨가 묻힌 순강원과 남양주 봉영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27. 23:55

     
    앞서 말한 명필 의창군 이광의 어머니는 선조의 후궁이던 인빈 김씨(1555~1613)로, 그녀가 오늘 포스팅할 인물이다. 그녀는 후궁으로서 내명부 내관 최고위인 정1품 빈(嬪)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남편인 선조와의 사이도 좋아서 첫째 아들인 의안군 이성(李珹)을 비롯한 4남5녀를 두었다. 굳이 열거하자면 의안군 이성, 신성군 이후, 정원군 이부, 의창군 이광,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이다. 
     
     

    드라마 '불의 여인 정이' 속 인빈 김씨



    인빈 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일찍 죽었다. 그래서 신성군 이후가 장남 역할을 하며 어머니를 보살폈는데, 임금 선조도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아껴 임진왜란 때는 정비인 의인왕후 대신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데리고 의주로 몽진했다. 선조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알게 해주는 대목으로, 이대로라면 신성군이 세자에 올라 왕위를 계승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 여독(旅毒)에 시달리던 신성군은 의주에서 1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자 신성군 대신 광해군이 부각됐다. 광해군은 어미인 공빈 김씨가 일찍 죽어 뒷배가 없었다. 따라서 왕이 되기 힘든 처지였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급히 세자로 책봉됐고, 전쟁 중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력을 발휘하였던 바, 세자로서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자 제 아들 중의 한 명을 세자로 만들려던 인빈 김씨는 더 이상 무리수를 두지 않고 순리대로 광해군을 밀었다. 이에 훗날 왕이 된 광해군조차 "지금 내가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庶母)의 공이 컸다"고 말할 정도였다. 


     

    드라마 '허준' 속 공빈 김씨

     
    정비인 의인왕후는 정유재란 때도 남편 선조와 함께 하지 못하고 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피난을 갔으나 역경에 몸을 많이 상했다. 이에 한양으로 돌아와 45세의 나이로 승하하는데, 그때까지도 후사를 두지 못했다. (의인왕후는 그외는 모두 평이 좋다. 흔히 말하는 호인이었던 듯하다) 왕비가 죽자 선조는 계비를 선택해야 했지만 인빈 김씨를 비롯한 여러 후궁들이 있었음에도 그들 중에서 선택하지 않고 밖에서 새로 젊은 여자를 들여 계비로 삼았다. 이 여자가 바로 비운의 왕비 인목왕후(=인목대비=소성대비)이다.
     
     

    동구릉 목릉 내의 선조 유택(왼쪽)과 의인왕후 유택(오른쪽)

     
    인목왕후가 궁으로 들어오자 후궁들은 당연히 입이 나왔다. 이에 후궁들은 모두 벌레 씹은 얼굴로 인목왕후를 맞았지만 인빈 김씨만이 시종 밝은 표정으로 인목왕후를 대했다. 이것을 보면 인빈 김씨는 본래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이거나, 혹은 처신이 귀신같은 여자이다. 하지만 후자일 경우는 거의 인귀(人鬼) 수준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그녀는 이모저모로 선조의 여러 후궁 가운데서도 계비 1순위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목왕후를 밝은 얼굴로 맞이하였던 바, 이는 천성이지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다. 
     
    반면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인목왕후는 덕스럽지 못했다. (그는 왕비였지만 세자인 광해군보다도 아홉 살이나 어렸다). 그래서 제가 낳은 자식 영창대군을 적자(嫡子)라는 이유로써 왕의 후계자로 만들려 했는데, 그것이 너무 티가 나 세자인 광해군을 자극했다. 1608년(선조 41) 10월, 52세의 선조는 숨이 가빠 쓰러지며 세자에게 전위 (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광해군은 명실공히 일인자가 되었지만 소북의 영수 류영경 등은 여전히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인목왕후 역시 딱 부러진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미적대다 결국 계축옥사로 제 아들(영창대군)을 잃고 친정은 박살 나고 본인도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드라마 '허준' 속 인목왕후
    인목왕후가 유폐됐던 덕수궁 내 석어당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일은 결국 1623년의 인조반정을 불러왔다. 김류와 이귀 등을 비롯한 반정의 무리는 광해군을 대신할 왕으로 인빈 김씨와 선조 사이에 낳은 셋째 아들 정원군의 맏이인 능양군 이종(李倧)을 옹립하니 그가 곧 조선 16대 왕 인조이다.
     
    아는 바 대로 그는 무능하고 독선적이었으니, 인조반정으로 왕이 되는 행운은 누렸지만 결국 정묘·병자호란을 불러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했고, 제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며 아들과 나라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제 며느리도 죽이고 손자들은 귀양 보냈다. 동서고금에 찾기 힘든 국왕이자 아비였다.  (그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이 왕이 됐으면 다  무난할 법했다)
     
     

    고양시 군부대 내에 있는 소현세자의 두 아들 무덤

     
    그러면서도 인조는 제 아비 정원군은 왕으로 만들었다. 정원군은 임해군·순화군과 더불어 남의 재물 빼앗고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한 악마지만, 제 아들 덕에 원종(元宗)이라는 추존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또 이 덕에 인빈 김씨는 졸지에 왕을 낳은 후궁의 자격으로 칠궁(七宮)에 위패가 모셔졌으니 청와대 부근에 있는 육상궁 사당 내의 저경궁(儲慶宮)이 바로 인빈 김씨의 사당이다. 
     
     

    이른바 왕릉뷰 아파트로 문제가 되고 있는 김포 장릉이 바로 원종의 릉이다. 정원군은 죽어서도 말썽인 듯하다. 유네스코 지정 취소까지 걸려 있는 이 사안은 현재 재판 중이다.
    청와대 길에서 보이는 칠궁의 가장 왼쪽 사당이 인빈 김씨의 저경궁이다.
    안에서 본 저경궁 / 저경궁은 본래 송현방에 있었으나 1907년 황제의 칙령으로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과 함께 칠궁 내로 옮겨졌다. 한국은행 본관 앞에 옛 저경궁의 하마비가 남아 있다.

     
    인빈 김씨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에 있는 순강원(順康園)이다. 한낱 후궁의 묘로서 방치되었을 뻔한 인빈 김씨의 묘는 아들 정원군이 원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왕의 사친(私親) 묘로서 보호받았다. 사친 묘는 전례가 드물어 예법 또한 세우기 힘들었으니 신도비를 세우는 것으로서 추존을 종결하였다. 하지만 이후 영조 대에 사친추존제도가 성립되면서 1755년(영조 31)에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저경궁, 묘를 순강원으로 추봉하고 정자각도 세웠다.
     
    순강원 내에는 인빈 김씨의 무덤과 앞에서 말한 넷째 아들 의창군 이광의 무덤이 있는데, 현재 닫혀 있어 들어가기가 번거롭다. 까닭에 묘원의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으로 갈음하며, 대신 묘원 부근의 원찰 봉영사(奉永寺)의 사진을 올릴까한다.
     
     

    의창군 묘와 신도비
    순강원 입구
    안내문
    담장 너머 보이는 제각
    봉영사와 연지
    봉영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민왕 글씨를 번각해 걸었다.
    무량수전 내 아미타불 / 협시불을 따로 모시지 않은 것을 보면 봉영사는 화엄사찰임에 틀림없다. 화엄에 의거한 아미타불은 협시보살을 두지 않으며 법당 앞에 탑도 세우지 않는다.
    눈여겨 봐야 할 아미타후불 설법도 / 정식명칭은 '영산후불탱(靈山後佛幀)'으로 1853년(철종 4)에 응성당(應惺堂) 환익(幻翼)이 그리고 경선당(慶船堂) 응석(應釋)이 도와 제작한 불화이다. 서방극락세계에서의 아미타여래의 설법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천점산 봉영사' 편액이 걸린 불전
    예스러워 보이는 이 편액 글씨는 매우 뛰어나다.
    지장전
    지장전 편액은 2006년 월운스님이 썼다.
    산신각
    봉영사 입구의 관세음보살상
    순강원 주변의 산하
    순강원 표지판 앞에서 목격한 사고 /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듯했으나 한참동안 길이 막혔다.
    사고로 늘어선 차량 / 보이는 건물은 주변 절에서 지은 것으로 역사적 건축물은 아니라 한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