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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품사현과 견줄만한 선조의 아들 의창군 이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2. 26. 01:50

     
    신품사현(神品四賢)은 신(神)의 작품이라 일컬을 만큼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 신라·고려시대의 명필 김생, 유신, 탄연, 최우를 말함이다. 귀하기는 하나 이들의 글씨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김생의 글자를 집자(集字)해 만든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를, 순천 송광사에서는 유신의 보조국사비를 볼 수 있으며, 춘천 청평사에서는 탄연이 쓴 문수원기 비석이 복원돼 있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비문의 김생 글씨 / 직접 쓴 글씨는 전하는 게 없고 집자된 글씨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파손된 문수원기의 비편
    비문은 파손되었으나 탁본은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을 비롯해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가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불렸고, 그밖에도 유공권, 성세창, 박팽년, 이황, 성자제, 김현성 및 성종 임금 등이 명필로 꼽힌다. 후기에는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몽인 정학교, 흥선대원군 등을 꼽을 만한데 임금으로서는 숙종이 명필을 자랑했다. 우리에게 재수없는 인물로 꼽히는 선조 임금도 명필에 속한다. 
     

    숙종 어필
    성종 어필
    선조 어필
    선조 어필

     
    글씨가 흔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 1589~1645)은 숨어 있는 명필로 꼽을 만하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인조실록>에 실려 있으니 1642년(인조 20년)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 닛코(日光)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에 게시할 어필을 요청했을 때 그 글씨를 의창군 이광이 대필시킨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인조는 의창군에게 아래의 '日光淨界 彰孝道場'(일광정계 창효도량)의 여덟 글자를 쓰게 했다. '닛코(日光)의 깨끗한 땅을 효(孝)를 창성케 하는 도량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닛코 동조궁에 전하는 이광의 글씨 / '닛코(日光)의 깨끗한 땅을 효(孝)를 창성하게 하는 도량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닛코 동조궁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와 무덤이 있다.

     
    의창군 이광은 1589년(선조 22년) 1월, 선조와 김한우(金漢祐)의 딸 귀인 김씨(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모가 그를 안고 서쪽으로 피난하였다고 하는데, 용케 무사하여 1597년(선조 30년) 의창군에 봉해졌다. 그는 자신의 형 광해군이 인창대군을 죽이는 등 패륜 일삼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1618년(광해군 10) 허균과 반란을 도모하였다가 허균이 능지처참된 후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의창군이 허균과 공모한 이유는 그가 허성(許筬)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그 자식인 허성 · 허봉 · 허난설헌 · 허균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오문장가(許氏五文章家)'라 불렀다. 허성과 허균은 배가 달랐으며 나이가 스무살 차이가 났음에도 친했는데, 허성은 막내 허균을 자식처럼 보살폈다고 한다. 허균 또한 스무살 차이가 나는 조카사위 의창군을 아껴 시문 나누기를 즐겼는데, 이것이 결국 반란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허균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필시 의창군이 새로운 왕이 되었을 터이다.  

      

    그는 왕이 되지 못했으나 그의 조카 이종(李倧)은 1623년 왕위에 올랐다. 다음 회에 자세한 설명이 있겠지만, 의창군 유배 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이에 의창군은 졸지에 왕의 작은 아버지가 되며 풀려나 복권되었다. 의창군의 어머니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 맏아들 의안군을 비롯한 4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이중 셋째인 정원군의 맏이인 이종을 김류와 이귀 등의 반정의 무리가 광해군을 대신할 왕으로 옹립했던 것이다. 

     

    사서에는 그를 딱이 명필이라 칭한 내용이 없지만, 그가 쓴 구례 화엄사 일주문의 '지리산 화엄사' 편액(≒현판)과 대웅전 현판, 고성 옥천사, 보은 법주사, 예산 수덕사 대웅전 현판 등을 보면 명필임에 틀림없다. 그밖에 완주 송광사, 장성 내장사, 하동 쌍계사, 서울 진관사·봉은사·조계사 현판이 그의 글씨를 모각(≒번각)했는데, 우리나라 절에 한 사람의 현판이 이렇듯 많이 모각된 예는 전례가 없다.* 의창군의 글씨가 명필이라는 증명에 다름아니다. 예산 수덕사 댕우전 현판 글씨는 번각이 아니라 직접 쓴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판 왼쪽의 서명과 도서는 원담(圓潭)스님의 것이다.**

     

    * 조계사 대웅전 현판은 최근의 것이니 화엄사의 것을 갖다 썼음이 분명하다. 완주 송광사, 서울 진관사, 봉은사 현판도 화엄사의 것을 번각한 것이다. 칠곡 송림사 대웅전 현판은 지금껏 숙종 임금의 것이라 알려져 있으나 의창군의 글씨로 여겨지며,(숙종의 해서와는 글씨체가 완전 다르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글씨를 번각한 것이다. 불국사 현판 역시 법주사 대웅보전의 '보'자를 떼고 번각한 듯하다. 

     

    ** 원담은 대선사 경허와 만공의 법맥을 이은 수덕사 3대 방장으로, 명필로서 알려져 있다. 까닭에 수덕사에서는 그의 글씨를 꽤 볼 수 있는데, 입구의 누각에 붙어 있는 '禪之宗刹修德寺(선지종찰수덕사)'와 '德崇叢林(덕숭총림)' 편액도 그가 쓴 것이다. 보는 분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원담의 필체와 의창군의 필체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 현판에는 원담이 썼다고 돼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원담스님이 의창군의 필체를 흉내내 썼다는 정도이나 개연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수덕사 대웅전 현판이 구하스님의 글씨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는데, 최근에는 수덕사를 방문한 적이 없어 아직 확인을 못했다.


     

    화엄사 일주문 편액 / 1636년 가을에 의창군 이광이 썼다고 되어 있다.
    화엄사 대웅전 편액 / 마찬가지로 1636년 가을에 의창군 이광이 썼다고 되어 있다.
    고성 옥천사 대웅전 현판
    화엄사 대웅전 의창군의 것을 번각해 걸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 편액 / 왼쪽 위 '의창군 서'라는 작은 글씨를 볼 수 있다.
    2015년에 촬영된 수덕사 대웅전 편액 / 분명 의창군의 글씨인데....
    최치원의 진감선사탑비와 쌍계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 현판
    법주사 대웅보전 일제강점기 사진
    법주사 대웅보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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