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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룡마을의 용은 승천할까? 능곡 혹은 아홉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12. 00:10

     
    우리나라에서 아홉 마리의 용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구룡리, 구룡산, 구룡사, 구룡골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제껏 내가 다닌 여행지 중에서는 남원 구룡계곡이 최고의 절경으로 기억에 남는다. 정식명칭은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이나 지리산과는 멀리 떨어져 오히려 시내에서 가깝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의 비경(秘景)이기 때문일까? 남원사람들조차 구룡계곡을 물으면 잘 모른다.
     
    까닭에 내비를 켜거나 물어 가기 위해서는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六茅亭)을 기억해야 한다. 육모정은 육각형 형태의 정자로 전국에 흔하지만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아홉 곳의 절경은 9경인 구룡폭과 구룡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구룡담은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좁아 보이나 오랜 세월 굽이친 급류가 암반을 깎아 만든 모양새는 확실히 용이다. 
     
     

    구룡계곡의 가을 / 전북일보 사진

     
    서양에선 일곱이 완성수인 반면 동북아시아에서는 열(10)이 완성수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7을 절대자의 수로 꼽는다. 조물주는 세상을 6일 만에 이루고 7일째 쉬었는데, 이로서 일주일이 생겼다. 반면 6은 악마의 숫자로 666은 루시퍼의 수로도 불린다. 동양에서 비견되는 9는 미완성의 수이다. 구우일모나 구절양장, 혹은 구사일생은 열을 채우기 위한 과정이거나 혹은 다행히도 미달한 경우이다.
     
    위에서 말한 구룡(九龍)과 구미호(九尾狐) 등도 이에 속한다. 하나만 더 채우면 승천하거나 사람이 되거나 할 수 있지만 이를 이루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아홉수라는 말도 필시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예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도 완성을 위해 끝없이 나아가는 우주열차였는데, 이데아의 세계를 구했던 철이와 메텔은 결국 찾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은하철도 999' 속의 철이와 메텔

     
    생뚱맞게 들리겠지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능곡(陵谷)도 비슷한 경우로 유래되었다. 1904년 개통한 경의선과 1963년 개통한 서울교외선의 분기역으로 나름 교통의 허브였던 능곡역은 지금은 경의·중앙선으로 연결되는데, 고양시 신원동 부근에는 추억의 서울교외선 선로가 남아 있다. 능곡의 이름은 원래 능골로서, 그렇게 불리게 된 이유는 왕릉이 될 뻔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의 속설에는 왕릉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열 개의 골짜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골이 많은 이곳은 늘 후보지로 올랐지만 결국은 1개를 찾지 못해 그저 이름만이 회자되었고, 그것이 지명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능내(陵內) 역시 왕릉이 없으나 임금의 무덤 못지않게 큰 양절공 한확의 묘가 쓰이며 능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삼한갑족 가문 한확의 낯 뜨거운 출세기')
     
     

    고양시 신원동에 남은 서울교외선 선로

     
    앞서 '서울의 공동묘지 변천사와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얼마 전 재개발이 확정된 강남 구룡마을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면서 곧 사라질 구룡마을의 사진을 찍어와 올렸는데, 그때 소개한 사진은 대한적십자사 남부혈액원 옆의 원 구룡마을이다. 앞서도 말했듯 본래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던 이곳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며 성동구 개포동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가 분구되며 강남구 개포동이 되었다. 개포(開浦)라는 동명은 양재천 갯펄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묘지(서울시립 언주공동묘지)가 대부분이었던 개포동과 포이동은 강남구에 속했지만 워낙에 끝자락이라 도곡동까지만 강남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도곡동에 개나리·진달래아파트 단지가 지어질 때 개포동 우성아파트 단지도 들어섰지만 '한데'로 취급받았고, 1979년 도곡동에 들어선 그랜드백화점(현 롯데백화점 강남점)이 쌩쌩 잘 나갈 때 1985년 건설된 개포동 그랑프리백화점은 죽을 쑤다 물류창고로 전락했다.

     

     

    지하철 한티역과 구 그랜드백화점 / 한티는 큰 언덕을 이르는 순 우리말로 한자로쓰면 대치동의 대치(大峙)가 된다.
    한티역 앞 거리


    구룡마을은 그때도 있었다. 아니 그전부터 존재했으니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잠실·송파 부근의 낡은 집들이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강제철거당했고 결국은 밀려 밀려온 곳이 개포동 끝자락 대모산과 구룡산 사이의 농촌 마을이었는데, 구룡산을 좇아 구룡마을이라 불렸다. 하지만 이름에 비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잘 알려진 그대로 구룡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서, 당시는 식수와 땔감마저 귀했다. 

     

     

    구룡마을 위치

     
    그렇다고 당시 개포동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모두 다 편하게 잘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개포주공1단지 아파트와 개포시영아파트는 '연탄을 때는' 이른바 연탄 아궁이식 아파트였다. 그러나 강남 광풍이 불며 엄청난 지가 상승으로 인해 그 재래식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부자 대열에 낄 수가 있었다. 반면 구룡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으니 그들에게 남은 희망은 이곳도 어서 개발되어 개포동 아파트 단지나 인근의 대치동, 도곡동과 같은 수준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구룡마을 전경 / 서울연구데이타서비스 사진
    구룡마을 한 구석
    개포동의 어느 아파트 단지


    정부에서는 2011년 드디어 개발을 결정했다. 하지만 개발 방식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강남구가 대립했다. 서울시는 일부를 환지(換地)하여 비용을 절감하자는 입장이었고, 강남구에서는 전면 수용한 후 현금보상을 한 다음 개발하자는 원칙론적 입장을 고수했다. 타협점을 찾기 어려웠던 사안은 장기간 표류하다 2014년 9월 결국 사업계획이 백지화되었다. 이에 처음의 막연한 상태로 돌아간 구룡마을 사람들은 절망 속에 다시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투기 목적으로 전입한 사람들도 지쳐 하나 둘 되돌아갔다.  

     

    그간 달라진 것이라곤 무허가 주택이라 전입신고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행정소송을 통해 전입신고가 가능해졌고, 그리하여 그들도 강남구 주민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무늬만 강남구일 뿐 재개발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는데, 올해 드디어 복음이 들려왔다. 올해 초 서울시와 강남구가 재차 개발을 추진하기로 전격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구룡마을은 원래 아파트 2838가구(임대 1107가구·분양 1731가구) 등으로 개발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존 8만 평의 개발 면적을 확대하고 용적률도 높여 1만 가구 이상의 대단지 아파트를 공급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니 이제 원 구룡마을 포함한 구룡마을 달동네 모두는 개발의 과실을 맛보게 될 것 같다. 흔한 말대로 인내는 썼으나 열매는 한없이 달 것이다. 

     
    앞서 '옛 묘도와 만석동 괭이부리말'에서도 말했듯 인천의 대표적 빈촌인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도 원 괭이부리말과 현 괭이부리말이 있다. 그곳 이야기를 쓰면서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와 그와 관련된 오마이뉴스 기자의 글을 빌려 온 적이 있다. 정확지는 않지만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만석동 아랫동네인 송현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동네 어른들로부터 화도고개 위에 사는 만석동 아이들과는 절대로 놀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은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송현동이 그리 잘 살던 동네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비단 인천 뿐이았겠는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였던 이 동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개포·대치·도곡동 일대의 어린이들은 구룡마을 아이들과는 절대로 놀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문득 20년 전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다시 떠오르는데,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고양이를 부탁해>와 같은 영화를 요즘은 볼 수 없다. 만일 누군가 그런 영화를 제작한다면, 그것도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원 괭이부리말 철길을 걷던 영화 속 지영이
    만석동 옛 철길 자리는 그림으로 남았고 만석고가에는 방음펜스가 쳐졌다. / 오른쪽 집들은 그림이 아닌 실사이다.
    원 괭이부리말 역은 겉모습만 작게 부활됐다.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참 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개천용은 천연기념물보다 귀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고대한다. 이곳에서 절치부심 노력했던 아홉 마리의 어린 용들이 모두 승천해 하늘 높이 오르기를. 

     

     

    구룡마을 입구의 잘 정리된 연탄재
    입구의 사람 살지 않는 집 / "고양이가 들어가니 뜯지 마세요. 새끼 낳으면 안 돼요"라고 쓰여 있다.
    입구 골목 / 사람이 사는 집과 떠난 집이 엉켜 있다.
    폐지를 모아 놓은 집
    골목에서 보이는 대모산
    주민이 거주하는 집
    거주가구 표식과 '입춘대길'이 붙어 있는 집
    구룡마을 윗동네로 가는 길
    윗동네의 주민 사는집
    윗동네의 폐허가 된 집들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중간에 있는 집
    구룡마을 윗동네에서 바라본 아랫동네
    사는지 안 사는지 불분명한 집
    마찬가지로 불분명한 집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일을 하고 있다.
    아랫동네로 가는 길
    거듭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내려가는 길의 시온성 교회 / 올라가는 길로 여겨도 물론 상관 없다.
    왼쪽 집이 시온성 교회다.
    높은 건물과 낮은 지붕들
    카페와 음식점을 겸한 '둥지'라는 이름의 휴게실도 있다.
    아랫동네의 주민 사는집
    아랫동네 풍경
    천변에 지어진 집들
    사람들을 볼 수 있었던 마을회관 앞
    여러가지로 인상적이었던 마을회관 옆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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