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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묘도와 만석동 괭이부리말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7. 20. 00:41

     

    인천시 만석동 앞바다에 있었다는 섬 묘도(猫島)는 고양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묘도뿐 아니라 근방의 괭이부리 마을도 고양이로부터 유래되었다. 특별히 알려질 이유가 없었던 가난한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작가 김중미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마을 이름의 유래를 분명 그렇게 밝혔다. 그래서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도 괭이부리를 괭이갈매기와 같은 조류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긴 여기는 고양이보다 갈매기가 더 많다.

     
     

    괭이부리 마을에서 만난 고양이 / 반갑잖은 손님에 잔뜩 긴장해 숨었다.
    '지역 N 문화'의 괭이부리 마을 풍경
    '지역 N 문화'에 실린 괭이부리 마을 풍경
    2023년 7월의 풍경 / 조금 더 퇴락한 것 외에 변한 것이 없다. 기타 아래 괭이부리 마을 풍경도 마찬가지임.
    괭이부리 마을 입구
    괭이부리 마을의 여기저기 / 집집마다 놓인 큰 물통이 이곳의 열악한 물 사정을 말해준다.
    벽에 써 븉인 경고문
    벽돌 훔쳐가다 걸리면 욕 바가지로 먹을 각오해야 함.
    아래쪽 괭이부리 마을 / 과거의 공장 사택이 그 뿌리다.
    괭이부리 마을의 문화 공간 '우리 미술관'
    골목 사이로 '우리 미술관'이 보인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속의 주인공들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만석동 포구 / 아마도 2001년 쯤?
    지금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하지만 지금 묘도는 없어졌고 고양이도 그리 흔치 않다. 없어진 것만은 묘도뿐이 아니니 그 섬에서 해안을 지키던 묘도포대와 일대의 드넓은 갯벌도 사라졌다. 묘도포대는 1879년 일본이 인천의 개항을 압박해올 무렵, 화도진지 및 소래 포구의 장도포대(獐島砲臺), 논현동의 호구포대(虎口砲臺) 등과 함께 설치한 해안 방어 포대였으나 1883년 인천개항 후 존재의 이유가 사라짐에 따라 사라졌고, 갯벌은 1905년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 가쓰히코(稻田勝彦)가 만석동 앞바다를 매립하며 자취마저 없어졌다. 
     

     

    1930년대의 인천 지도 / 왼쪽 큰 섬이 월미도이고 위쪽 ●이 묘도이다.
    묘도포대는 화도진에서 관할하던 인천 8개 포대 중 하나였다. / 사진은 논현동 호구포대

     

    1905년 만석동 바다는 큰 지형 변화가 있었다. 1900년대 초 인천에서 여관업을 하던 이나다가 조선정부의 매립허가를 받아 만석동 앞의 갯벌을 약 50만㎡(15만평)의 뭍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이후 이곳은 이후 아카사키 무라(赤琦村)로 불렸다. 아카사키(赤琦)는 '붉은 포구'라는 뜻이다. 왜 그렇게 불렸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나는 이나다가 마구 싫어온 인근의 븕은 마사토가 그와 같은 이름을 만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사람들은 그때 묘도가 사라졌다고들 하나, 위 지도를 보면 그때까지 묘도는 있었으니 아마도 연륙도처럼 뭍과 연결된 상태로 존재하였던 듯하다. 이는 1911년 생겨난 아카사키 유곽이라는 이름의 허름한 집창촌이 매립지 초입에서부터 묘도까지 줄지어 있었다는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곽은 본래 이나다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이나다는 매립지 아카사키를 요즘의 공단 부지와 같은 용도로 활용해 비교적 싼 임대료로 정미소와 간장공장 등을 유치했는데, 그러면서 바다를 부쳐먹고살던 조선인 원주민들은 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이곳의 공장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곧 다른 곳으로 철수했다. 황급히, 대충 메운 땅의 지반 침하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공장주들은 지대(地代)의 환불과 시설비 등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일확천금을 노렸던 이나다는 알거지가 되었다. 이후 버려졌던 이곳에 1911년부터 2층 목(木)구조 집 6, 7채가 매춘을 목적으로 들어섰다. 선화동(지금의 신흥동)의 부도유곽의 흥행에 고무된, 하지만 부도유곽에는 끼어들 돈이 없었던 가난한 일본인들이 역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들어왔던 것이다. 부도유곽에 대해서는 앞서 '공창(公娼) 신흥동 부도여곽과 숭의동 옐로우하우스'에서 설명한 바 있다.
     
    희망과 달리 아카사키 유곽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은 너무 외져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이곳은 드문드문 채소밭 등으로 쓰이며 방치되다가 1932년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이 들어오며 다시 상전벽해를 맞았다. 동양방적은 만석동의 2만9천여 평을 평당 5원이라는 헐값에 구입해 땅을 단단히 다진 후 대규모 방직공장을 지었고, 1934년 10월 1일부터 가동된 공장은 그간 내쫓겼던 이 일대 주민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후 1937년 광산용 기계 생산업체인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의 일본 기업 공장이 들어오며 인구 유입이 더욱 증가되었다. 묘도는 이 무렵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양방적 인천공장 전경
    괭이부리 마을에서 보이는 동일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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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즈음하여 일제는 과거 다소면 고잔리에 속했던 이 일대를 하나부사리(化房里)라는 행정구역으로 만들어 관리했다. 초대 일본공사로써 제물포항 개항에 지대한 공을 세운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이후 하나부사리의 공장들은 일본의 대륙 침략에 즈음하여 군사 용품과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 기지로 전용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3년에는 조선기계제작소 등이 잠수함 건조장으로 바뀌며 옛 묘도 부근에 1천300명의 공원(工員)을 수용할 112동의 숙사 건물이 지어졌다. 이것이 괭이부리말(마을)의 시작이었다. 

     
     

    에코 타임즈의 2012년 괭이부리말 사진
    작가 김중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 /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이다.

     

    그러면서 일대는 다시 '똥바다' 동네라는 이름이 생겼다. '똥바다'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후 이곳에 몰려 살았던 실향민들을 범인으로 몰고 있다. 그들이 바다에 내다 버린 분뇨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으니, 위에서 말한 1천300명의 인력이 생활했던 숙사 112동에 화장실이 단 6곳이었다는 증언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화장실의 똥도 직접 다 바다로 떨어졌다) 아울러 해방 후 이곳에 밀집했던 여러 공장들의 산업폐수와 여과 없이 배출된 인근의 생활하수 또한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중미는 '똥바다에 게가 산다'도 썼다. /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똥바다에서 게도 잡고 바지락도 캐고 수영도 하고 그랬다.

     

    그 똥바다에는 언제나 대성목재가 수입해 온 원목들이 빼곡히 떠 있었다. 합판산업은 섬유·봉재산업과 더불어 개발도상국이 거쳐가는 필수 코스로서, 1936년에 세워진 조선목재공업을 전신으로 하는 대성목재는 당시 대기업에 속했다. 대성목재는 지금의 인천만석비치타운 아파트 단지에 있었으며 괭이부리말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저임금의 단순 노동에 종사했다. 그리고 대성목재의 똥바다는 괭이부리말 사람들의 땔감도 공급해 주었으니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조각들은 똥물에 수영하겠다는 각오만 있으면 얼마든지 주워 올 수 있었다.

     

    대성목재 부두에 떠 있는 통나무들
    대성목재의 위치(화살표)와 괭이부리말(●)
    항공사진으로 본 인천 북항과 괭이부리말(●)

     

    대성목재의 원목들이 떠있는 똥바다는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똥바다 물 속에서 통나무 굴리기 놀이를 했고, 잠수해 원목 밑으로 지나가는 위험한 놀이도 즐겼다. (실제로 익사 사고도 있었다)  물놀이가 싫증 나면 아이들은 똥바다 옆의 철길로 올라와서 놀이를 이어갔는데, 대성목재가 사라지고도 철길은 계속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철길에서 놀던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장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2001년 그 철길가를 걷던 여상(女商) 출신의 지영이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과거 똥바다 중 하나였던 곳 / 북성포구 쪽 사진
    과거 똥바다 중 하나였던 곳 / 만석포구 쪽 사진
    대성목재 자리에는 인천 만석비치타운 아파트가 서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속의 지영이

     
    하나부사리는 해방 후 만석동, 북성동, 송월동 등으로 나뉘었다. 언제 어떤 기준으로 나뉘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다시 북성동, 송월동이 합쳐져 개항동이 되었다. 2년 전인 2021년의 일이다. 비단 행정구역뿐 아니라 지금은 다시 많은 것이 바뀐 듯 보이니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놀던 철길도, 영화 속 지영이의 머리 위를 지나던 만석동 고가차도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예전의 밴댕이 속알닥지 마냥 좁았던 길도 넓어졌고, 옛길을 추억해 그려진 철길 그림에서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원 괭이부리마을 옛 철길 자리에 그려진 선로
    그려진 철길과 바람과 섬과 배와 기차
    만석동 원 괭이부리마을 풍경
    원 괭이부리마을역도 부활되었다. 여기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실물임.
    원 괭이부리마을 표지판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만큼 넓어지고 여유로워졌을까? 20년 전쯤 오마이뉴스의 기자가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의 배경의 찾아 르뽀 형식으로 썼던 글이 생각나서 물어본 말이다. 정확지는 않지만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만석동 아랫동네인 송현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동네 어른들로부터 화도고개 위에 사는 만석동 아이들과는 절대로 놀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은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송현동이 그리 잘 살던 동네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비단 인천뿐이겠는가? 서울의 어떤 동네의 아파트 단지(역시 별로 잘 살지 못하는)에서는 자식들이 부근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교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아파트 단지 사이에 아예 철제 펜스를 설치했다는 말도 들었다. 실화가 아닌 우화이길, 혹은 못된 마귀할멈이 사는 동네를 그린 나쁜 동화 속 이야기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우화는 현실의 반영이기에, 나쁜 동화의 모티브는 언제나 사악한 주변에서 빌려오기에 가슴 아리다.


     

    북성포구의 노을 / 보이는 공장이 대성목재다.
    동화나라 등대 같은 화수부두 조형물
    화수부두
    화수부두의 간판 없는 횟집들
    수리되는 배
    다시 만난 고양이
    하늘에서 본 인천 북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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