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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장 근대역사문화회랑에서 만난 막강 화상(華商)의 흔적(I)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8. 7. 08:27

     

    다시 인천역 앞에 섰다. 그리고 곧장 길을 건너가 인천 차이나타운의 랜드마크인 패루(牌樓)를 향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목적이 있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다시 차이나타운을 방문한 목적은 구한말 인천의 상권 제패를 넘어 조선의 경제를 통째로 쥐고 흔들었던 화상(華商)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다. 옛 청국 조계지에 세워졌던 청나라 건물들은 기본이 벽돌로 지어져 목조인 일본식 건물에 비해 훨씬 튼튼했을 터임에도 이상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들이 드물다. 물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이겼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인천역 광장 '개항장 근대역사문화회랑 표석' / "곧바로 가시면 차이나타운입니다"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패루 안쪽에서 찍은 사진 / 인천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산동성 위해(威海)시에서 선물한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중국음식점 거리가 시작된다.
    청관, 공화춘 등 유명 중국집들이 보인다. 공화춘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옛 청관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청관은 조선인들이 부르던 거리 이름이다.
    구한말의 지나정(支那町) / 일본인들이 청관 거리를 부르던 이름이며 중국인들은 췌화가(萃華街)라 칭했다.
    췌화가의 지금 풍경
    1960년대의 청관 거리
    지금도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위의 사진들은 그나마 현재에도 볼 수 있는 옛 거리 모습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천에 자리한 화교의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고종의 청병(請兵)으로 입국한 청나라 오장경이 청군의 보급책으로 데려온 65명의 중국 민간인을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이듬해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된 이후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중국 조계지에 정착했고, 이후 화교들은 주로 요식업 쪽으로 진출했다.

     

    그래서 흔히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차이나타운을 중국 조계지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구한말 원세개의 비호를 맡으며 조선 경제를 쥐고 흔들었던 화상들의 월 스트리트는 따로 있었으니 지금의 선린동 25ㅡ2 상가 일대였다. 그들은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라고 명시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의 무소불위 상거래 조항을 근거로써 마구잡이로 조선의 상권을 잠식하였으니, 대표적으로는 동순태(同順泰)·광대호(廣大號)·인합동(仁合東)·동화창(東和昌)·금성동(錦成東)·조공순(兆公順)·쌍성태(雙盛泰)·서성춘(瑞盛春) 같은 회사들이었다. 

     

    화상들은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며 중국에서 영국산 면직물, 중국산 비단, 식료품, 잡화 등을 수입해 팔고 조선의 쌀을 무더기로 실어갔다. 담비가죽이나 수달피, 사금, 홍삼 등도 가져갔는데, 청국 해군의 지원 속에 밀무역도 서슴지 않았다. 그중 동순태는 일본과 동남아에도 지사를 둔 거상(巨商)으로 파이낸셜과 선박운송업에도 진출하였고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던 바, CEO 담걸생은 1923년 납세 1위의 실적을 기록하였으며 사옥인 동순태루는 서울 명동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서울대 소장 동순태(同順泰) 관련 문건
    청국 조계지의 월 스트리트 영화가(永華街)
    영화가의 지금 모습 / 조계지의 월 스트리트였던 선린동 25-2 일대는 지금은 많은 빈 상가들로 금석지감을 자아낸다.

     

    욱일승천하던 화상들은 1896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1914년 이 거리는 미생정(彌生町)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해방 후 인천시지명위원회가 다시 선린동(善隣洞)으로 개명했다. 선린은 '착한 이웃'이라는 좋은 뜻이지만 과연 중국이 한국의 착한 이웃이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이 지역은 조선말기의 행정구역상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였으므로 그대로 선창동으로 지명 회복을 하면 되었을 것을.....

     

    그 화려했던  화상들의 흔적은 지금 남아 있는 곳이 없고 취화가, 영화가, 계후가(界後街), 동횡가(東橫街), 서횡가(西橫街), 중횡가(中橫街)로 불리던 가로의 지명도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그 화상 중의 하나였던 의생성(義生盛)의 건물이 재발견되며 주목을 받고 있다. 

     

     

    1900년대의 의생성 건물
    의생성의 현재 모습 / 왼쪽 건물
    의생성 건물 입구 / 왼쪽으로 대불호텔이 보인다.

     

    의생성은 청나라에 유화성(裕和盛)이라는 본사를 두고 서울, 인천, 부산, 목포 및 일본 나가사키에도 우회성(祐和盛)이라는 지점을 두었던 거상으로 의류, 양주, 식료품, 화장품 등을 거래하였다. 의생성은 청일전쟁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자체 복권을 발행하여 판매한 기록도 보이나 언제 폐업해 철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인천 의생성 건물은 1908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서 1908년 발행된 <인천개항25년사>와 <인천사정>, 1911년 토지조사부 기록 등에 모두 등장하는데, 여러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음에도 원형이 거의 남아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이 건물은 1983년에는 '수정'(壽亭)이라는 요정으로 쓰였고, 이후 '사파리'라는 고급술집과 중국음식점 '태림봉' 별관으로 이용되었다. 2012년 11월부터는 화장품 판매점인 '휴띠끄'가 들어섰다가 중국특수가 사그라들며 폐업하고 현재는 커피전문점 'Cafe ㅊa(차)'가 성업 중이다. 

     

     

    반대편에서 본 모습 / 기둥이 예술이다.
    원래의 조적벽을 노출시킨 지하공간
    2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천정
    계단참 벽
    대들보
    천장 트러스
    천정과 아치 창문이 있었을 벽
    2층 내부
    2층 창에서 보이는 풍경
    항구로 뻗은 근대역사문화회랑
    근대역사문화회랑 옆의 사진관
    청나라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때 지은 건물이 인천의 추억을 담는 장소가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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