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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8. 17. 23:51

     

    앞서 말한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터인 중구 해안동 공영주차장에서 KT항동지점 방향 대각선 쪽에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이 있었다. 지금의 인천문화재단 자리이다. 이 자리는 전에는 바다였던 곳으로 일본이 조계지를 넓히려 매립한 땅이다. 여기뿐 아니라 길 건너편에 있는 미두취인소도 바다였는데, 아래 사진은 당시 매립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뒤에 붉은 점을 찍은 곳이  미두취인소이고, 바로 앞 큰 건물이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이다.
     
    * 인천 미두취인소에 대해서는 '인천 용동 권번 골목 - 일제시대 선물 투기열풍과 맞물렸던 해어화(解語花)의 영화(榮華)'에서 설명한 바 있다.  
     

     

    개항장 매립지에 세워진 조선식산은행과 미두취인소(●)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 인근 건물 중 가장 예뻤을 것 같다.
    또 다른 사진 / 이 르네상스식 건물로 1989년 철거됐다.
    위 사진과 같은 같은 방향에서 찍은 인천문화재단 건물
    인천문화재단 건물과 옛 매립지 길
    1920년으로 여겨지는 사진
    위 길의 2023년 사진
    인천문화재단 건너편의 미두취인소 자리
    옛 미두취인소(오른쪽 건물) 부근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 / 뒤 고층건물 자리에는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이 있었다.
    옛 미두취인소

    ▼ 미두취인소에 대해서는 

     

    인천 용동 권번 골목 - 일제시대의 선물 투기열풍과 맞물렸던 해어화(解語花)의 영화(榮華)

    지금의 코인 열풍, 증시 열풍 같은 투기 붐이 조선 땅을 휩쓴 적이 있다. 1920~30년대 피크를 이루었던 인천 미두취인소, 속칭 인천 미두장(米豆場)의 선물거래가 그것이었다. 쌀 수출항 인천에

    kibaek.tistory.com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대한제국 황실과 상인이 연합하여 설립한 국내 유일의 민족 정통 은행으로 조선식산은행과 대척된다.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1월 30일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근본이므로 은행을 설립코자 청원하오니...."라는 대한제국 탁지부(재정경제부)의 청원을 고종이 받아들여 자신의 주머니 돈(내탕금)을 내었고 여기에  조정관료, 조선상인 등이 납입한 이른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은행이다. (내 생각으로는 고종이 내탕금으로 제대로 된 행위를 한 것은 대한천일은행의 자본금을 댄 것밖에 없는 듯하다)
     
    발기인은, 관료로는 탁지부대신과 군부대신을 겸임한 심상훈, 농상공부대신 민병석, 육군부장 민영기, 법부협판 이근호, 전환국장 이용익, 원수부군무국장 조동윤 등이 있었고, 실업가로는 송문섭, 정영두, 김기영, 김두승, 박경환 등이 있었다. 자본금은 고종이 공칭자본금(법정자본금) 5만 6천원 중 3만 원을 냈고, 불입자본금은 실업가들이 2만8천 원을 부담했는데 공칭자본금의 나머지 2만6천 원은 관료들이 나눠 부담했다. 
     
    상호는 ‘하늘 아래 첫째 은행’이라는 뜻에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라 했고, 초대 행장에는 창립발기인이자 농상공부대신인 민병석이 취임했다. 민병석은 여흥 민씨 민왕후의 척족으로 훗날 이완용과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약한 자였다.* 아니 당대에도 이 자는 친일파였으니, 겉으로는 민족자본을 표방하였으나 발족에 있어서는 황실 자본에 의지하였고 운영에 있어서는 일본 다이이치은행의 지원을 받았다. (까닭에 '국내 최초의 민족 정통 은행'이라는 표현은 사실 어폐가 있다)
     
    * 민병석은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인물이나 기억해야 할 중요 민족반역자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장은규를 파견한 전력이 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육군대신에 올라 대한제국 군대를 무력화시켰고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 통감 부임에 적극 협조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였을 때는 궁내부대신으로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이완용과 함께 금척훈장을 받았으며 일제에게는 훈1등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합방 후에는 중추원 고문을 5차례 중임하고 애국금채회의 발기인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금전적 후원에 앞장섰으며 조선사편수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 고문 등을 지내며 민족정신 말살에도 앞장섰다. 친일파 중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친일한 놈은 드물다.  
     

     

    민병석(閔丙奭, 1859~1940)
    대한천일은행 본점 터 표석 / 1899년 보신각 뒤쪽에 본점건물이 세워졌다.
    당시의 대한천일은행 본점 사진 / 왼쪽 아래 보신각이 보인다.
    의외로 오래 존속한 건물 / 대한천일은행 본점 건물은 이후 동일은행, 조흥은행 종각지점으로 사용하다 1976년 8월 4일 철거되었다. 사진은 철거 중인 건물이다.
    대한천일은행 종로지점 건물 / 1909년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광통관'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공공건물로, 이 건물 1층에 대한천일은행 종로지점이 개설됐다.
    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건물 / 광통관은 1914년 화재로 일부 소실된 것을 1915년에 복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외관이 바뀌었다.
    이후 바로크 풍으로 바뀐 건물 / 이 사진은 '오마이뉴스'의 2021년 11월의 사진이며 현재 이 건물은 전체 보수 중이다. 2002년 3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1909년 건립 당시의 건물 / 지금의 외관과 많이 다르다.
    이 건물은 지금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쓰인다. 다만 내부는 여러차례 리모델링을 거치며 옛 모습이 전부 사라졌다.
    내부에 전시된 대한천일은행 설립인가서
    내부에 전시된 대한천일은행 설립자 고종황제의 흉상
    광무 10년 개정판 천일은행 정관

     
    아무튼 대한천일은행은 이렇게 민족은행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으나은행 설립의 실질적인 출자자였던 실업인들이 민족은행으로서의 성격에 회의를 가져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1905년 경제 불황에 자본금이 미약한 대한천일은행은 휘청하여 약 1년 동안 휴업에 들어갔다. 이후 1906년 6월 경영 정상화를 위해 자본금을 15만원으로 증자하고 실업인들에게 은행의 운영을 맡기며 민영은행으로 탈바꿈하였으나, 이때 탁지부 재정고문 메카다 다네타로의 알선으로 정부로부터 25만 원의 자금을 대여받고 운영 직원으로 일본인이 고용되며 다시 취지가 흔들리게 된다.
     
    대한천일은행은 이후 민족반역자 여흥 민씨 민영휘가 은행장에 취임하며 본격적인 매판자본으로 변질되는데, 민영휘는 이때 여러 사업을 벌이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현재 돈 1조 원의 거부가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그 아들 민대식은 동일은행장으로서 부자가 대를 이어 경성의 돈을 주물렀다)  대한천일은행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2월 조선상업은행으로 개편되어 이름만이라도 존속됐던 민족은행으로서의 간판이 사라진다. 
     

     

    남대문로 조선상업은행 본점 건물 / 1908년 개설된 남대문 출장소 자리에 1924년 신축 이전 개업했다.
    남대문로 조선상업은행 건물 / 1930년대 사진으로 왼쪽 건물은 조선은행(한국은행)이고 오른쪽은 경성우체국이다.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 자본을 희석화시키려는 노력을 가속화하였으니 1912년 4월에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漢城公同倉庫株式會社)와 합병하고, 1923년 6월에는 원산상업은행과 다시 합병을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선상업은행 한국인 주주들은 주주총회에 불참하고 임원진이 사표까지 제출하며 합병 반대를 외쳤으나 결국 경영권을 박탈당했고, 은행장에 전 총독부 재무국장 와다 이치로가 선임되며 경영권이 일본인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일제가 1928년 공표한 신(新)은행령에 의해 1928년 삼남은행(三南銀行), 1933년 북선상업은행(北鮮商業銀行), 1941년 대구상공은행이 각각 흡수 통합되며 일본을 위한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광복에 이른다. 
     
    광복 후인 1950년 4월 조선상업은행은 한국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2002년에 이르러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변경되었다.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5월 10일 인천 중구 신포동에서 첫 영업을 시작했다. 위에서 말한 인천문화재단 자리이다. 이후 1956년 조선상업은행 경동출장소 자리로 이전한 한국상업은행이 그 맥을 이었던 바, 현재 우현로 76번지에 자리한 우리은행 인천지점 건물에 '우리나라 최초 은행지점'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역사를 말함이다.  

     
     

    우리은행 답동지점 기둥의 안내문
    우리은행 답동지점 건물 / 동인천 역 가까운 곳에 있다.
    대한천일은행 장책 / 1899년 6월에 작성된 대한천일은행의 장부로, 은행개설 연도인 1899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있었던 대한천일은행의 개인별, 기관별, 항복별 입출금 명세서이다. (인천시립박물관 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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